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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주인… 스스로 건강한 삶 찾는다

전북의료생협에서 찾은 힐링 - '30초 진료' 관행 탈피…조합원간 연대감 형성…건강공동체 행복 쑥쑥

▲ 김길중 전주 무지개한의원장이 의원 벽에 걸린 의료생협에 대한 안내문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추성수기자 chss78@

한 대학병원 진료실 앞에 카메라가 설치됐다.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첫 환자는 31초, 그 다음엔 22초, 41초, 29초, 29초, 36초가 걸렸다. 평균 31초. 의사 출신인 송윤희 감독이 제작한 의료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의 한 장면이다. 감독은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현실을 진단하고 병원의 불합리한 행태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처럼 의료 서비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놀라울 만큼 적다. 환자들이 아프면 달려가는 병원에서 말로만 듣던 '30초 진료'를 받는다. 그리고 환자들은 점점 불신을 갖는다. 환자와 병원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대안은 정말 없는 걸까.

 

전주 평화동에 위치한 무지개한의원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벽에 붙은 의료생협에 대한 안내문이다. 병원의 주인이 조합원과 환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글에는 환자의 알 권리, 진료 받을 권리, 개인 신상의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 등이 요약돼 있다.

 

전북의료생협에 유일하게 가입돼 있는 무지개한의원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는 병·의원과는 개념이 다르다.

 

이곳 조합원은 현재 780세대. 1~10만원까지 출자금을 내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으며, 조합원은 물론 가족들도 혜택을 본다. 지금까지 조합원들이 출자한 돈은 1억9000여만원. 이곳은 외래환자 진료를 한다는 면에서는 일반 병원과 똑같다. 하지만 환자들이 병원 문턱이 낮다고 느낀다.

 

"다른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이곳은 그렇지 않아요. 조합원이 된 뒤에는 아프지 않아도 병원에 가서 선생님과 상담을 할 수 있거든요. 내 병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주니까. 그게 안되니까 병원 갈 때마다 의심이 드는데, 여기서는 그런 게 없어요."

 

4년 전 의료생협에 관심을 가지다가 조합원으로 가입한 서정민(52·전주성심여고 교사)씨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가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병원이 가까이 있다는 게 정말 좋다"고 했다.

 

'의료생협'은 지역 주민과 의료인이 힘을 모아 가족과 이웃의 의료와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소비자 협동조합이다. 주민 누구나 가입할 수 있고, 출자한 조합원 가족 모두가 혜택을 누리는 '건강모임'에 가깝다.

 

가장 큰 혜택은 믿고 이용할 수 있는 병원에서 진료받고 가족의 건강을 의논할 수 있다. 반면 조합원들의 돈으로 설립한 의료기관이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공동 소유하며, 대표기구를 통해 운영되므로 조합원이 적을 경우 부담이 클 수도 있다.

 

결국 협동조합에 대한 의사들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돌려놓을 '무기'는 환자가 우선되는 병원이고, '장애물'은 환자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걸 귀찮아 하는 의사들이다. 하지만 국내에 의료보험이 정착되면서 기득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의사들에게 그걸 버리고 나와 달라는 호소는 쉽게 통하질 않는다.

 

김길중 무지개한의원 원장(44)은 일본에 병·의원을 두 세개까지 갖고 있는 의료생협이 활성화된 것은 "건강보험제도가 정착되기 전부터 의료생협을 통해 환자가 주인되는 병원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가정의학과나 치과·한의원·검진센터 등 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저소득층이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독거노인 등을 위한 방문 진료를 하면서 예방 보건·건강 소모임 운영하는 일도 의사들에겐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겠으나, 환자와 의사와의 피드백이 바로바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것은 가장 큰 난관. 신뢰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한 의료인의 권위를 반박하는 이견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라는 걸 알면서도 2004년부터 전북의료생협 발족이 논의됐다. 무지개한의원은 1년 전부터 의료생협에 실천하고 있는 곳이다.

 

처음엔 알음알음 알고 김 원장의 뜻에 동조해주던 의사들이 많았으나, 1년도 되지 않아 조합원들의 부담이 커지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돌아서며 떠났다. 현재 의료생협에 가입된 병원은 1곳에 불과할 만큼 초라한 성적표를 내놓고 있으나, 여전히 여기에 희망의 끈을 걸고 있는 이들이 많다.

 

"미국의 펜실베니아주 로세토 마을의 예를 들고 싶네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는데, 희한하리 만큼 심장병에 걸린 사람들의 비율이 인접한 동네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 원인을 찾았죠. 이유는 놀랍게도 마을 공동체의 힘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이곳에 산업시설이 들어오고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심장병 유병률이 다른 지역과 같아졌습니다. 공동체가 깨진 거죠. 의료생협은 병원을 주민들의 품에 돌려주면서 연대감을 높여주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의료생협이 주목하는 것은 병원 운영만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의료생협은 주민들이 힘을 모아 건강한 마을을 가꿔가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건강한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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