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문화계에서 내로라하는 주당(酒黨)들을 주축으로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술 하면 빠지지 않는 그러나 삶을 제대로 즐기는 호사가들의 오지랖 넓은 식견으로 한옥마을 10경을 정한 것. 그 좋아하는 막걸리 때문에 자가용도 마다하는 소설가 이병천을 필두로 '글빨'로는 도저히 못 당해내는 김용택·안도현 시인, 자칭 '문화시장'인 송하진 전주시장, 언론계에서도 알아주는 술고래 양창명, 한학자 이형구, 방송인 최태주씨까지 가세해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만한 곳을 엄선했다. 방문객 500만 명을 육박하는 전주 한옥마을이야 말로 도내 명소의 풍향계 아니냐면서, 그러나 아무리 들춰봐도 특별한 매력을 찾지 못했다고 투덜대는 이들을 위한 '단골 감초'다.
일단 기린봉이 토해내는 달(기린토월·驥麟吐月)과 남고사의 저녁 노을을 가르며 울리는 종소리(남고모종·南固暮鐘), 한벽루를 휘감고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한벽청연·寒碧晴烟)는 당초 전주 8경과 동일하다. "이 세곡의 풍광은 한옥마을에서도 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병천씨는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일곱 곳의 경치는 어디일까.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건국을 위해 한나라 유방의 시'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고 전해지는 오목대에서는 바람의 노래(오목풍가·梧木風歌)가 들려온다. 눈 덮인 경기전은 한 폭의 수묵화 같다. 하지만 신성한 기운이 깃든 이곳에선 '빠드득 뽀드득' 눈(雪) 밟는 소리를 눈(目)으로만 즐겨야 한다. 경기전 뜰에 쌓인 눈은 가만히 밟아볼 것(경전답설·慶殿踏雪)을 권한다.
전주 향교 처마 낙숫물이 똑똑똑 떨어지는 소리(교당낙수·校堂落水)는 선비들이 또랑또랑하게 글 읽는 소리와 닮았단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으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선비들의 학구열마저 느껴지는 곳이다.
자만동은 교동의 옛 이름. 이곳에서는 목조 이안사를 비롯한 전설과 설화가 '근사한 구라'로 풀어진다. 자만문고(滋滿聞古)는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 남천을 따라 느리게 느리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달, 냇물에 비친 달까지 두 개의 달을 품어낸 절경은 남천유월(南川流月)이다.
낱개의 물방울로 흩어져 있던 이들의 삶이 튼실한 강줄기로 모였던 곳을 옛날엔 청수동(淸水洞)이라 불렀다. 은행로를 흐르는 맑은 실개천을 이제는 남천이 대신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행로청수(杏路淸水)도 챙겨보자. 주름 펴듯 골목길을 밀어버리고 미끈한 고층 빌딩을 올리는 도시는 이제 그만. 굽이굽이 골목마다 쌓인 곡진한 삶의 이야기들이 가득한 한옥마을 골목길을 느릿느릿 산책(우항곡절·迂巷曲折)을 하다 보면 유네스코가 왜 이곳을 '슬로시티'로 지정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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