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01 20:32 (일)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주말 chevron_right 책과 만나는 세상
일반기사

가슴 울려주는 신선의 노래

미당의 제씨 서정태 선생님, 상대를 배려함에 있어선 미당보다 오히려 미당의 형님 같으신, 우하 선생님의 시집을 받고 전화를 드렸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세배 드렸어야 했는데…."

 

"세배는 뭐, 꽃피면 와, 그때까진 안죽고 있을 것 같으니까."

 

그 분의 전화 말씀이다. 항상 겪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전화 말씀을 열 번도 더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넉넉한 신선(神仙) 같으신 분이구나! 이승과 저승을 훤히 굽어보는 삶을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우하(友下) 서정태 선생, 그분의 두 번째 시집'그냥 덮어둘 일이지'가 출판사'시와'에서 나왔다. 권혁재 중앙일보 사진기자의 사진이 매장마다 곁들여진 이쁜 시집이다. 그분의 춘추는 올해 90세이시고, 90세에 맞춰 90편의 시가 담겼다. 첫 번째 시집'천치의 노래'(1986) 이후 26년 만의 일이다.

 

이즈음처럼 농익지도 않은 시집들이 흔전만전 나오는 풍조에서는, 정말 귀한 일이요, 귀한 본보기의 시집이다. 항상 미당(未堂)의 그늘에 가려 있어서, '또 그 아래'라는 자호를 가지신 우하 선생, 90세의 노시인이 들려주는 노래는 과연 어떤 노래일까.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단숨에 다 읽었다.

 

얼마 전 노필(老筆)로 삐뚤빼뚤 쓰신 시집 초고를 읽을 때 보다는 또다른 감동, 또다른 마음공부를 하게 만드는 시집이었다. 아아, 내가 과연 90세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선미(仙味) 넘치는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경외의 마음이 솟기도 했다. 한동안 그분은, 강원도 춘천에서 기거하시다가 얼마 전 고향 질마재 마을, 당신의 생가 옆에 초옥을 지어 귀향을 이루셨고 이제 질마래 소요산의 산자락 '友下亭'에서 한 신선처럼 살고 계신다.

 

'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되어 / 도덕암 근처 / 늙은 신선 찾아 나섰네 // 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되어 / 그도 어디론가 나가버리고 / 빈집에 자물쇠만 채워 있었네 // 돌아서서 오는 길 / 건너야 할 돌다리도 없는데 / 어쩌자고 길섶엔 저승꽃만 피었네' ('저승꽃' 전문 중에서)

 

우선 이 시는 선미가 흐르는 시다. 이 시에 보이는 '늙은 신선'은 아마도 그분의 자화상일 게다. 그분은, 도인처럼, 은자처럼, 현자처럼, 세 칸짜리 흙집으로 둥지를 이루셨다. '빈집에 자물쇠만 채워넣고' 때로는 소요산 발치에서 난초를 채집하기도 했으나, 이제 노경(老境)이 되어 산책도 어렵기만 하다. '저승꽃'이 자꾸만 밟힌다. 적막은 그분의 스승이다.

 

'뜰 앞에 심은 다박솔이 커서 / 학이 날아와 우는 날 // 그 하늘 너무나 맑기만 해 / 천사의 피리소리도 들리는 날 // 오래토록 참아왔던 나의 노래 / 그 때마다 한 곡조 불러보리.'('학이 우는 날' 전문)

 

그의 형님이신 미당에게는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라는 시집이 있다. 미당의 제씨인 우하 선생님에게는 미당의 시맥(詩脈)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학이 날아와 우는 날'을 상상하는 정서도 그렇고, 이승과 저승을 아우르는 파천황의 상상력도 그렇다. '천상의 피리소리'는 바로 오래도록 참아왔던, 시의 화자인 '나'의 노래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피리소리는, 잠시 우리를 소슬하게 만든다.

 

이즈음 괜히 난삽하기만 한 시편들, 시의 유기체적 구조미마저도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시집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정말 시가 왜 노래여야 되는지? 우리들의 가슴을 풍금처럼 울려주는 현자(賢者)의 노래여야 하는지를, 넉넉하게 보여주는 시집이라 하겠다. 송하선 시인

 

(우석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