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때로 내 손에서 놓친 물고기가 커 보이고, 남의 자리 앞에 놓인 떡이 더 먹음직스럽고 많아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 내가 운전 할 때에 신호등의 빨간 불이 길게 느껴지고, 길을 건널 때 내 앞의 횡단보도 신호등의 녹색 불은 왜 그리 더디게 켜지는 걸까요? 정말 나에게만 그럴까요? 이같이 똑같은 상황에서의 행동이 자신이 행위자 일 때와 다른 사람이 그 행위를 하고 있을 때 서로 다르게 인식되는 것을 가리켜 '행위자-관찰자 편향 (Actor-Observer Bias)'이라고 합니다.
공부가 미숙한 범부(凡夫)에게 자신의 삶을 객관화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보는 혜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가려진 눈에 보이는 세상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고통의 시작이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인생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더 좋은 때'란 없습니다.
우리네 삶을 긴 여정이라고 할 때 그 여행길에는 언제나 지금 여기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야 하는 당위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이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혹여 불평과 원망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주어진 하루의 삶 속에서 이어지는 시간들을 오롯이 내 것으로 얼마나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지 성찰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을 껴안아 봅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며 뛴 기억밖에 없는데,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녹록치 않은 현실에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언젠가 내가 행한 일의 결과이고, 당연히 내가 헤쳐 나가야 할 일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온전히 수용하고, 기꺼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구상 시인은 '꽃자리' 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이는 자기 삶에 대한 온전한 긍정에서 비롯됩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자기 삶을 긍정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간혹 모든 실패와 고통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하고 회피하려고 하며, 상대방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구상 시인은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나의 굴레는 무엇일까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범부들에게 씌워지는 굴레는 바로 온갖 욕심입니다. 상대심입니다. 이로 인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죄업의 굴레를 장만하는 것입니다.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은 '지혜있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십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그에 만족하고 감사를 느끼며 또한 십분이 다 뜻에 맞을지라도 그 만족한 일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같이 나누어 즐기므로 그로 인하여 재앙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복이 항상 무궁하나니라' 하셨습니다.
인생은 고락이 상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십분의 육에 만족한다 하는 것은 현실의 삶에 안분하고 감사하며, 나머지 십분의 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꽃자리이자 희망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또 십분의 십을 다 얻은 사람일지라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나누며 살므로 복을 영원하게 장만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꽃자리에 앉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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