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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 문화

역지사지 정신으로 서로를 배려해주는 따뜻한 세상만들자

▲ 진영곤 감사원 감사위원
대기업 임원이 항공사 승무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가 하면 식품회사가 대리점에 밀어내기를 강요하고 폭언을 퍼붓다 소비자의 불매운동으로 매출이 급락하는 등 비뚤어진 갑을관계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가 고조되고 있다. 사실 비뚤어진 갑을 문화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오래된 병폐지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여론이 더 크게 들끓고 있는 것이다. 갑을이라는 말은 본시 계약서를 작성할 때 쌍방의 이름을 일일이 반복해 적기가 불편해서 이를 간략하게 대체하고자 사용한 것에서 비롯됐다. 계약이란 것이 집이나 물품의 거래를 하거나 공사계약을 하거나간에 쌍방이 필요에 의해서 서로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느 일방이 우위에 있고 다른 일방은 열위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계약문화가 정착된 서양사회에서는 우리와 같은 약탈적 갑을문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외국의 기업들은 납품업체가 적정이윤을 확보해 거래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서로 간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납품업체가 기술적·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경우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의 잘못된 갑을문화는 비즈니스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자기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횡포를 부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최근 대통령의 방미시 성추행 물의를 빚은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도 개인의 품성 탓도 있겠지만 인턴여직원 정도는 막 대해도 된다는 비뚤어진 갑을문화 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런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도 음식점에서 또는 매장에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꿎은 종업원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콜센터 상담원이나 114 안내직원들에게 희롱과 폭언을 해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는 갑과 을이 언제 어느 때나 고정돼 있는 게 아니다.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도 식당에 가서는 종업원에게 갑으로서 상처를 줄 수 있다. 현대차의 사내하청 근로자도 정규직과 비교하면 스스로를 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보다 처우가 열악한 3차·4차 협력업체 직원들과 비교하면 갑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사용자를 갑으로, 자신들을 을이라 생각하는 정규직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해 주말특근을 거부함에 따라 또 다른 을인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갑이라고 생각하는 공무원들도 사무실에 와서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 민원인들에게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도 선거 때가 닥치면 국민들을 갑으로 모시는 시늉을 한다. 비즈니스석을 타는 고객은 우월한 인간이고 승무원은 열등한 인간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 자체가 갑과 을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서로의 역할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행동해야 비뚤어진 갑을문화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안 쓴다 해서 갑을문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 고매해서가 아니라 내가 을의 입장에 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 갑의 위치에 있을 때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역지사지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물질적으로 잘 살고 못사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관계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 고향에서 부터 잘못된 갑을문화를 떨쳐 버리고 이웃과 약자를 배려하는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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