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거리에서든 광장에서든 무리지어 춤을 추는 아이들은 이제 도시의 풍경이 되었다. 풍경이 되었다는 것은 '소통'의 힘을 얻었다는 증거다. 이러한 변화를 거리 춤의 진화라고 해두자. 그런데 사실 진화하고 있는 것은 춤만이 아니다. 춤을 담는 공간과 소통 방식의 진화는 더 새롭다.
거리에서 공연장 안으로 들어온 춤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몸짓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예술이 아닌 것으로부터 예술이 되는 일, 혹은 예술이 되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우리 의식을 지배해온 편견의 산물인 '경계의 명징성' 때문일 것이다.
비보잉 '라스트 포 원'의 리더 조성국씨(31)를 만났다. 2000년대 초반, 힙합의 대열에 혜성처럼 등장한 '라스트 포 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비보이 그룹 대열의 중심에 있다. 전주출신 10대 비보이들의 재기 발랄함으로 무장한 '라스트 포 원'이 거리로 나온 것은 2002년, 각종 대회를 휩쓸면서 주목을 받았던 이들은 2005년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에서 우승하면서 정상에 섰다. 비보이들의 우상이 된 '라스트 포 원'의 이름은 창단 11년째를 맞는 지금까지 건재하다. 그런데 그들의 활동이 뜸해진 듯 했다. 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전통문화'의 정적 이미지에 갇힌 도시 전주에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이미지를 안긴 '라스트 포 원'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전주와 서울의 연습실에서 그와 팀원들을 만났다. 현실과 싸움하고 있는 그들의 전투력(?)은 의외로 강해보였다. 지금 그들에게 춤추는 일은 고행과도 같지만 그것은 쉽게 중단될 것 같지 않은 고행이다.
"춤은 우리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 이예요. 그러니 쉽게 포기할 수 없지요."
그래서 알게 됐다. 비보이들의 춤에 열광만 하지 않고 그들의 저항정신과 자유를 향한 치열한 몸짓의 진정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와 공연으로 보아서인지 친숙하게 느껴지는군요.
"영화 '플래닛 비보이'를 꽤 많이보셨더라구요. 그래서 더러 알아보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화 덕분에 '라스트 포 원'이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전주는 자주 내려오나요.
"공연이 있을 때 내려옵니다. 오늘은 '2013 전주 B-boy 그랑프리' 심사가 있어서 왔습니다. 아버지가 전주에 계시니 자주 내려와야 하지만 이럴 때 뵙고 가는 정도지요."
-영화에서 보니 춤추는 것을 반대하셨던 아버지께서 나중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던데요. 춤은 언제부터 추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어요. 티브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추는 춤을 보았는데 정말 멋있더라구요. 그 춤을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춤만 생각하며 살았어요. 중학교 때는 H.O.T와 젝스키스가 우상이었지요. 생각해보니 아이돌 1세대의 춤이 제 교과서였네요."
-그때 우리나라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힙합은 단연 선풍적인 인기였지만 열 살짜리 아이가 비트가 강한 음악과 빠른 리듬을 입힌 힙합에 그렇게 마음을 뺏겼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티브이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따라 추었어요. 나중에는 인터넷으로 외국 사이트를 뒤지거나 비디오를 구해 연습했고요. 학교 갔다 오면 춤만 추었어요. 독학이었지요."
-공부는 안하고 춤만 추면 부모님 걱정이 많으셨겠군요.
"반대를 많이 하셨죠. 제가 중학교 때 부모님이 헤어지셨는데, 그때까지 저를 키워주신 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함께 알게 되었어요. 충격이 컸죠. 그래서 더 춤에 빠졌던 것 같아요. 뭐랄까. 가족관계의 혼란스러움을 잊을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지요."
-춤이 위로가 되었군요. 춤 연습은 어디서 했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춤이 있어서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춤을 출 수 있는 모든 공간은 다 연습실이었어요. 롤러장은 가장 훌륭한 연습실이었고, 빌딩 앞 공터나 좀 한산한 길거리까지. 원래 힙합이 길거리 춤으로 시작했잖아요."
-그때만 해도 춤을 추는 아이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았죠. 그것도 길거리에서 떼로 몰려다니며 춤추는 아이들에 대한 편견은 심했을 때인데.
"공부 안하고 놀러만 다니는 애들에 대해 인식이 좋을리있겠어요. 춤춘다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을 불량배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았어요.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저희를 '양아치'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편견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냥 춤만 열심히 추었어요. 최고의 춤꾼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아버지께서 인정해주신것도 결국은 실력으로 가능한 일이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팀을 만들어 온갖 대회를 다 나갔거든요. 상을 받으면 꼭 아버지께 보여드렸어요. 처음에는 눈길도 안주셨는데, 가출까지 하면서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비보이 대회에 나가 입상하고 왔을 때 '꼭 춤을 춰야겠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정말 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묵언의 허락이었어요."
-춤이 우선이었으면 학교와는 담을 쌓았겠군요. 졸업은 했나요.
"믿기 어렵겠지만 중학교 때는 개근상 받았어요. 대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지요.(웃음)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은 간신히 했어요. 출석이 워낙 부족했거든요."
-'라스트 포 원'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라스트 포 원'은 2002년에 결성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만들었던 'E. Y. C'를 받아 활동하고 있던 후배들이 '라스트 포 원'을 만든 것을 알고 합류했어요. 제가 활동했던 '맥스크루' 선배들이 군대를 가게 되면서 팀이 해체되었거든요. 그리고 맥스크루는 팝핀이나 라킹 등 여러 장르를 추는 그룹이어서 언젠가는 비보이 팀을 갖고 싶었어요."
-언제 서울로 갔습니까.
"2005년이예요. 전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활동했었는데 2003년 즈음부터 '라스트 포 원'이 완전 핵돌풍을 일으켰죠. 지방팀인데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회를 석권하면서 바빠지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아예 서울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리더를 맡고 있는데…….
"이유가 있었어요. 제 또래의 단원들이 군대를 가면서 리더를 바꾸어 할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저도 현역을 자원했었는데,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 척추분리증이 겹치고 집안형편까지 어려워지면서 면제 대상이 되었죠. 군대를 안 갔으니 리더가 감당해야할 몫이라도 잘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지금 전주 영화의 거리 입구에 있는 광장 이름이'라스트 포 원'이잖아요. 전주의 비보이가 세계 최고라는 자긍심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는데 당사자들도 자랑스럽지 않나요.(웃음)
"그때 핸드프린팅까지 했었어요. 거리의 아이들이 전주의 도시의 브랜드가 되었으니 기뻤죠. 그런데 전주는 딱 거기까지인 것 같아요. 물론 큰 규모의 비보이 대회가 만들어지고 관심도 높아졌지만 비보이를 문화의 한 장르로 정착시켜 성장시켜갈 수 있는 기반은 여전히 척박하잖아요."
-이야기가 나왔으니 '라스트 포 원'의 근황을 듣고 싶습니다.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많이 힘듭니다. 지난해 연말 즈음엔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2009년에 저희가 전속되어 있던 기획사가 파산했거든요. 투자사들로부터 제작비를 모아 만든 뮤지컬 '스핀 오딧세이'가 원인이 되었는데 월급이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서 꽤 오랫동안 맨손으로 버텼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팀원들이 나가면서 정상적 활동에 한계가 왔었어요."
-나가는 팀원들에 대한 원망이 컸겠습니다.
"섭섭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있고, 미래가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고. 털어놓자면 저도 마음이 흔들렸거든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춤과 팀을 지켜왔는데 주저앉을 수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기획사가 문을 닫으면서 연습실도 없어졌다면서요.
"지금은 '도도'라는 여성타악그룹 연습실에 얹혀서 연습합니다. 오갈데 없이 지내다가 연습실이라도 빌려 쓸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세계 최고의 비보잉 '라스트 포 원'이 연습실도 없다는 현실이 서럽진 않나요.
"춤을 출 때의 아찔함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하루하루가 불안하니까요. 그래도 뜻을 같이 하는 후배들이 있어 희망을 갖게 됩니다. 바닥까지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죠."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힘이 될 텐데요.
"월급 받으면서 맘껏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죠. 2006년부터 1년 반 정도, 매월 월급을 받았어요. 120만원. 먹고 자는 일 해결되고 월급까지 받았던 그 시절이 이제 꿈이 되었네요."
-지금은 그만큼의 수입도 안된다는 이야기군요. 그래도 이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춤추는 일 뿐이거든요. 지금은 한 달에 적게는 2-3개, 많게는 5-6개 정도의 공연을 하는데 일상적 삶을 해결하기에도 빠듯한 여건이어서 단원들이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해결합니다. 이런 궁핍한 생활은 비보이들의 운명적인(?) 삶인 것 같아요."
-힙합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힙합을 이끄는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군요. 한류의 콘텐츠로 부상한 비보잉 그룹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갖고 있어요. 비보이의 정신이 저항성과 역동성이잖아요. 현실과의 이 치열한 싸움이 어쩌면 저희의 전투력을 더 강하게 하는 기회인지도 모르겠어요."
-듣기 거북할지 모르겠지만 역동성이 생명인 브레이크 댄스에 삼십대 비보이로서 고민은 없나요.
"춤추는 일에 정년은 없어요. 어떤 춤을 어떻게 추느냐의 문제겠지요. 역동성이 블레이크 댄스의 특징이긴 하지만 분출하는 것만이 역동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역동성이 강조되는 춤도 삼십대 후반까지는 출수 있을 것 같은데요?(웃음)"
-힙합이 주류문화로 들어온 지 꽤 되었지만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환경은 여전히 미흡하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죠. 그런데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저희는 아티스트입니다. 독일 배틀대회에 나갔을때 네임카드를 주더라고요. 거기 '아티스트 조성국'이라고 써있었어요. '나는 아티스트다'는 자긍심을 그때 갖게 되었습니다. 비보이를 예술가로 대접하는 국가에 대한 경외감도 생겼어요."
비보잉과 같은 힙합은 더 이상 뒷골목에서 이루어지던 저항의 표현이 아니다. 그라피티가 미술의 정당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듯이 비보잉도 예술이다. 그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비보이들은 모든 고통과 가난을 맞서 춤을 춘다.
인터뷰를 하고 다시 궁금해졌다. 비보이의 대명사가 된 '라스트 포 원'을 자랑으로 여기는 전주는 지금 무엇으로 그들을 존중하는지. 그들의 춤을 위해, 그리고 내일의 '라스트 포 원'을 꿈꾸며 거리로 나선 청소년들을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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