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11 23:34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chevron_right 이 사람의 풍경
일반기사

고전번역학자 변주승 전주대 교수 "고전 번역은 마라톤…동료들과 만드는 한편의 영화"

▲ 번역학자 변주승 교수의 18년 고전 번역의 산실인 완주군 비봉면 천호성지 사제관 1층에는 아직도 그와 번역팀의 지난했던 작업과정의 흔적이 남아있다. 변교수는 이곳 사제관 김진소 신부의 서재에서 10여년동안의 주말을 꼬박 바쳐 고전의 숲을 일구어냈다. 안봉주기자 bjahn@

고전(古典)은 장강(長江)이다. 크고 작은 물길을 거두어 도도하게 흐르는 길고 큰 강처럼 고전은 시대와 역사를 안아 오늘의 우리를 비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장강과도 같은 고전을 잊은 지 오래다. 새로움과 속도만을 앞세우는 시대에서 고전의 가치는 빛을 잃었고 창조적 미래를 꿈꾸는 세대도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진정한 삶의 가치와 지혜는 언제나 고전에 있었다. 고전이 외면 받는 불행한 시대에서 고전의 가치를 주목하며 고전의 숲을 가꾸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나라 고전번역의 중심에 있는 번역학자 변주승 교수(51·전주대)를 만났다.

 

지난 2009년 50권 분량의 '여지도서' 번역본을 펴내 화제를 모았던 그는 2004년부터 시작한 '추안급국안' 번역을 이미 오래전에 마무리하고 90권 장대한 규모의 책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전 번역을 시작한 것이 1996년, 삼십대와 사십대의 빛나는 시절을 거쳐 올해 지천명의 나이가 된 그에게 고전번역은 지난 18년 동안 삶의 전부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전 번역은 학문영역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한편의 영화이고, 개인적으로는 마라톤과도 같았다. 그만큼 고전을 향한 애정은 깊고 뜨거웠으며 번역의 목표는 명징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번역'하기 위해 바친 그의 일상은 경이롭고 신선했다. 현실의 유혹을 밀어내고 오래된 것을 더욱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내는 삶은 치열했으며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덕분에 그에게 듣는 고전은 더 새로웠다. 이제 우리가 고전의 가치에 눈뜨는 일이 남았다. 고전의 숲속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머리가 많이 센 것을 보니 번역작업 18년 동안의 고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혹시 유전은 아니겠지요.

 

"집안에서 머리가 센 사람은 저 혼자이니 유전은 아닐 겁니다. 번역작업의 고단한 작업에서 얻은 훈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고전 번역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번역이 운명이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96년에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해에 지도교수님께서 사료 하나를 넘겨주셨어요. '신유박해' 사료였습니다. 처음에는 왜 나한테 이 일을 주시는 것인가 의아했죠. 한문을 잘하는 동료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시키신 일이니 대학원 선배들과 함께 12월에 번역을 시작했는데, 아이엠에프가 터졌어요. 원고료도 못나오는 지경이 되니 교수님이 중단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가 제 인생의 기로였던 것 같아요. 선배들도 그만두었는데, 혼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꼬박 3년이 걸렸지요. 그런데 은혜를 받았는지 나중에 예산이 만들어져 원고료도 나오고 명예훈장까지 받았어요."

 

-천주교 신자셨습니까.

 

"아니에요. 저는 유학자이셨던 아버님(변시연 선생) 덕분에 유교의 학풍에서 성장했고, 처가는 기독교 집안이었으니 천주교와는 인연이 없었죠."

 

-아무 연고도 없는 전주는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제가 전주로 온 것이 96년인데, 92년부터 전주대 강의를 나왔긴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고, 특별한 계기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님이 늘 '너는 노령산맥 이남으로 오지 마라. 오면 내가 이룬 것도 망치고 너도 큰일을 못한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죠."

 

-번역을 시작 할 때 박사논문까지 마친 때였으니 취업이 더 절실했던 것 아닌가요.

 

"학문의 길을 택했으니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것이 우선일 수 있었겠죠. 그러나 번역을 시작하고 나서는 대학으로 가는 일이 그렇게 절박한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번역은 학교로 자리 잡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환경인데도 왜 그렇게 번역에 매달렸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때는 번역 책 한권이 논문 한편으로도 평가받지 못했었을 때거든요."

 

- '신유박해' 사료가 첫 번역인가요.

 

"데뷔작이었죠. 번역은 자기주장을 증명하는 논문과 달라서 옳고 틀린 것이 그 자체로 확실히 드러나잖아요. 처음 번역을 하면서 난해한 부분이 참 많았어요. 그러니 이 일이 내가 할 일인지 확신이 없었는데, 번역과 관련된 치명자산을 갔다가 거기서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을 느꼈어요. 실력이 부족해도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된 것 같아요."

 

-그 작업이 계기가 되어 번역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시게 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저를 오롯이 이 작업에 전념하게 할 수 있게 해주신 김진소 신부님과의 인연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니까요."

-김신부님께서는 교수님의 번역작업을 가장 신뢰하고 전적으로 후원해주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 팀의 번역작업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신유박해 사료를 번역하면서 천호성지로 처음 신부님을 찾아갔을 때 '한국 천주교회가 변주승 선생에게 못할 일을 했다'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담배를 한 개비 말아주셨는데 제 인생에 가장 맛있는 담배였던 것 같아요. 그때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의 끈이 느껴졌어요. 그리고는 신유박해 번역을 마무리하고 99년에 책을 냈는데, 그즈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정책으로 반영하기 시작했어요. 그 일환으로 '동서양 명저 번역 사업'이 있었는데 함께 공부했던 후배가 '신청해보자'고 하더군요. 그 책이 10권으로 발간됐던 '대한계년사'입니다. 그 작업을 천호성지의 신부님 사제관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느냐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진행하셨습니까.

 

"제 아버님이 칠십 살 되시던 해에 장성의 집을 떠나 백양사 입구 산속으로 들어가셨어요. 당시 아버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하고 계셨는데 항상 저희에게 말씀하셨던 '분수를 알고(知分) 만족할 줄 알고(知足), 그칠 줄 알아야(知止) 한다'는 교훈을 그때 실천하셨던 겁니다. 어머님은 돌아가신 뒤여서 홀로 지내시며 학문하시는 아버님 곁에 있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때 후배 몇 명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 후배들과 대한계년사를 함께 번역하게 되었죠."

 

-천호성지 사제관은 그때부터 번역작업의 산실이었군요.

 

"번역 팀의 네 명 모두 거주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었어요. 저도 시간강사라 연구실은커녕, 책상도 없었던 시절이었죠. 신부님을 찾아가 상의 드렸더니 '여기 와서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호남교회사를 정리하신 신부님 서재는 번역작업의 보고였습니다. 책만도 만권이 넘는 거대한 자료실에 저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신부님이 해결해주셨어요. 신부님께서는 저희 때문에 모든 일상이 불편하셨지만 심지어 뒤풀이 술자리까지도 응원해주셨죠. 천호성지 사제관은 18년 저희 번역작업의 모든 과정이 담겨있는 산실입니다."

 

-팀으로 번역작업을 시작한 '대한계년사'와 '여지도서' 그리고 '추안급국안'까지 정말 대대적인 과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기가 막힌 생활이었어요. 이상하게 한 작업이 끝나가는 시점에 꼭 다른 작업이 시작되었어요. 한 작업당 한 달에 한 번씩 공동 윤색을 위한 작업을 하는데 그것이 매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이거든요. 저는 모든 팀의 책임을 맡고 있어서 매주 주말을 천호성지에서 보내게 되는 겁니다. 10여년을 꼬박 주말 없이 보냈죠."

 

-공동윤색 과정이 궁금합니다. 번역을 각자해서 함께 점검하는 것입니까.

 

"네 형식은 그렇죠. 근데 그 과정이 치열합니다. 공동 작업이니까 개인이 해온 과제를 함께 읽고 번역의 표현에 동의하는 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고, 난해한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지적하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심각한 갈등을 겪기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악역을 참 많이 했어요. 더구나 쉬운 번역을 내세웠기 때문에 교정과 윤색의 과정은 더 지난하고 치열해져야 했지요."

 

-번역을 할 수 있는 인력은 충분했습니까.

 

"공부하는데 뜻을 함께 하는 선후배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2004년부터는 이 지역 연구자들을 찾아 합류시켰습니다. 지역 사람들이 판을 벌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선택은 지금생각해도 잘했던 것 같습니다. 전주가 고전번역의 도시로 주목 받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는 동안에도 인문학과 고전번역에 대한 관심이 중단되지 않은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교수님이 몸담고 있는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이 한국고전번역원 협동번역사업 준대형 거점연구소로 선정된 것도 그동안의 작업과 관련이 있겠죠.

 

"무관하지 않지만 별개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업은 학교 연구소 차원에서 3년 동안 전쟁처럼 준비했어요.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2010년에 국가에서 전통문화를 콘텐츠화하는 정책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고전번역원에서 이 일을 주도하기에는 벅차죠. 승정원일기만 번역한다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권역을 나누어 거점 연구소를 운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선정은 의미가 큽니다."

 

-교수님 번역작업과 관련해 한옥마을에 문을 연 한국고전문화연구원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만들었기 보다는 아버님이 지난 58년에 만들었던 한국고문연구회의 법통을 이어받으면서 연구원 체제를 갖추고 이름도 바꾸어 2006년 9월에 법인 사무실을 냈어요. 아버님이 평생 모으신 책과 자료들도 모두 옮겨왔지요."

 

-그 자료를 옮기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상당부분이 전남의 도지정문화재였다면서요.

 

"아버님의 뒤를 잇고 뜻을 제대로 잇기 위해서는 우선 공간을 일원화하는 것이 필요했어요. 제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제 활동영역은 전주여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 결의를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승낙을 얻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해에 책과 자료를 다 옮겨왔어요. 그래서 제가 전남과 특히 고향 장성에서는 매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님 책 중에 도지정 문화재가 있었는데 관내이탈이 되어버리니 아예 문화재 지정을 해제시키는 일이 불가피했거든요. 제가 더 열심히 연구하고 그 뜻을 잘 이어야하는 이유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30-40대를 고전번역으로만 보내셨는데 '추안급국안'을 마무리하고 운영해온 대학 연구소도 큰 성과를 거둔 지금, 개인적인 소회는 어떻습니까.

 

"헤아려보니 신유박해 초한서와 대한계년사, 여지도서, 추안급국안 작업 중 40-50권이 제가 개인적으로 직접 번역한 책이더군요. 그런데 보람이 큰만큼 허전하고 허탈합니다."

 

-워낙 큰일을 해낸 뒤여서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말씀을 듣다보니 새로운 일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커보입니다.

 

"이제는 저도 세상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고전문화연구원을 열어놓고 정작 하지 못했던 회원들과의 교류와 소통이 우선이지요. 번역에 몰입하면서 개인적인 성과는 쌓였지만 가족들과 지인들, 80년대 같은 꿈을 꾸었던 동료들이 제 삶의 반경에서 너무 멀리 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연구원 회보에 '다시 옷깃을 여미며'란 글을 썼는데, 제심경을 그대로 거기 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작업과는 성격이 다른 일을 시작하실 것 같군요.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용역'이라고 하는 사업에만 매달려(그것이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을 소진한 듯 한 느낌이 듭니다. 평가받고 기획서에 매달려온 시간의 환경을 바꾸고 싶은 욕망이 그만큼 크죠.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으니 새로운 일을 할 때도 되었고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일찍 고전 번역으로 와서 96년 이후 논문다운 논문을 쓰지 못했어요. 이제는 제 글을 쓰고 싶습니다. 특히 지역사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은데 다행히 천주교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고, 여지도서를 통해서 전라도 전체를 조망할 기회와 추안국안을 통해 전라도의 전말과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죠. 이제 20년 세월을 바친 그 번역 사료들을 바탕으로 지역을 주제로 한 글을 써볼 생각입니다. 사회와 소통하는 작업도 고민하고 있고요."

 

인터뷰 말미, 그로부터 흥미로운 번역의 원칙을 들었다. 이른바 세모꼴 원칙이다. 좋은 번역을 하는 조건으로 그는 한문에 대한 빈틈없는 독해와 아름다운 한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자기가 번역하고 있는 텍스트의 역사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꼽았다. 아랫변과 윗변 그리고 꼭짓점 도형의 세모꼴을 적용한 번역의 원칙은 그가 주도하는 고전번역에 그대로 담겨 적용됐다. 지금까지 우리 앞에 놓인 고전의 내용이 대중들에게도 흥미 있게 다가올 수 있는 비결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