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달린 '함바식당'…영화제작의 꿈 향해 달려요"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희곡도 써봤고, 기획사를 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어요. 전북일원에서 제작되는 영화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우리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의 문턱이 너무 높더라고요."
'밥차'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기능으로 분류해보자면 그보다 앞서 시작된 '함바식당'이나, 세련된 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케이터링 서비스' 류가 된다. 이 밥차의 성장이 참으로 놀랍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 뮤직비디오나 뮤지컬 제작현장의 전유물로 기능했지만 이제 국토대장정이나 동아리 체육대회 같은 현장에서도 존재의 가치를 빛낸다. 덕분에 수도권을 비롯해 각 지역마다 적지 않은 '밥차'가 운영되고 있다. 시장경제로 보자면 '밥차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사업성이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이 '밥차'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현장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이동 식당차'로 시작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이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년을 조금 넘는 연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침이 없이 성장해온 '밥차시장'의 존재는 흥미롭다. 이러한 성장의 중심에 '전주밥차'가 있다. '전주밥차'는 '밥차'란 이름을 만들어낸 연원이자 그 자체로 밥차의 역사다. 물론 90년대 초부터 음식 관련 업체들의 '외식부페'나 '캐터링 서비스'가 현장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온전히 '밥차다운 밥차'는 '전주밥차'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지금 '전주밥차'는 밥차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전주밥차'를 부르기 위해 줄을 서고, 영화나 드라마 제작현장에서도 섭외 순위 1위도 불변하다.
'전주밥차'의 채수영사장(44)을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봄이다. 밥차를 시작한 것이 2002년, 5년차 밥차의 젊은 사장은 도전과 열정이 넘쳐보였다. 이미 전주밥차의 이름을 한껏 올리고 있었지만 온전한 '밥차'를 만들기 위한 실험과 투자가 필요했던 때여서인지 경제적 여건은 녹록치 않았었다. 7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밥차시장의 선두를 지키고 있는 '전주밥차'의 성장과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사이 밥차가 8대로 늘어날 정도로 사업 규모가 커졌지만 채사장은 여전히 밥차가 있는 현장에 있었다. 1.2톤 밥차위에서 쉴 새 없이 일을 하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행복해보였다.
-여전히 밥차를 지키고 있군요. 지금도 직접 하십니까.
"밥차 사장이 현장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요. 오늘 아침 일찍 올라왔습니다. 현장에 문제가 생겨서 불 끄러 왔어요.(웃음)"
-사장님이 직접 와야만 해결되는 큰일이 무엇일까요.
"큰일은 아니고요. 스태프들이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10개월째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데, 조금 변화를 주려고 밥차팀을 바꾸었더니 바로 민원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올라왔지요."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곳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다. 전주밥차는 지난해 9월부터 이곳에서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스태프 식사를 1년 가깝게 전담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공연팀의 식사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채사장이 '오늘은 괜찮죠?'라고 묻더니 환하게 웃었다. '만족스럽다'는 답을 들은 덕분이었다.
-예전보다 일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다른 업체에게 일을 넘겨줄 정도면 매출도 적지 않겠군요. 이제 직접 현장에 나오지 않고 관리만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경제적으로는 많이 좋아졌지요, 그렇다고 제 할 일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하다 보니 저만의 노하우가 생겨 웬만한 곳은 혼자 다닙니다. 운전하고 현장에 가서 음식 만들고 배식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해결해도 380명 정도의 점심과 저녁은 너끈합니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전주밥차 채사장은 혼자 다니는 사람으로 이름났어요."
-밥차를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CF나 영상물을 제작하는 기획사를 차렸어요. 그런데 지역의 일거리가 한정되어 있고, 일을 맡아도 스태프를 구성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때 제작 현장을 다니면서 가졌던 고민이 스태프들의 식사였어요. 현장에서 밥다운 밥을 먹을 수는 없을까 생각하다가 외식부페나 케이터링서비스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밥을 해주는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밥차였어요."
-그때도 밥차가 있지 않았을까요.
"현장에 와서 식사를 주는 차는 있었죠. 그런데 그 차들은 대부분이 이미 조리된 밥이나 반찬을 가져와서 도시락처럼 배식해주는 식이었죠. 모든 음식을 현장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게 하는 즉석 밥차는 없었습니다."
-밥차란 이름도 전주밥차가 처음 썼다면서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저는 밥차란 이름이 서민적이어서 친근했는데 다른사람들의 밥차에 대한 선입견이 그렇게 안좋은줄 몰랐어요. 사회적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멸시하고 무시하고, 난장 밥장사처럼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사업을 시작하고 가장 어려웠던 것도 그런 편견과 사회적 인식이었어요."
-가장 힘든 점이 사회적 편견이었다니 뜻밖입니다. 경제적 여건은 괜찮았나요.
"어려웠지요. 보기에는 차한대에 간단한 설치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밥차는 새로운 영역이어서 계속 투자를 해야 했거든요. 게다가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혼자 힘으로 대학을 다니고 사업도 혼자 힘으로 시작해서 형편이 늘 빠듯했어요."
-투자란 것은 밥차 시스템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렇죠. 제 경우 밥차를 연구하고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꼬박 3년 걸렸어요. 어떤 현장을 가도 기능을 다할 수 있는 현재의 모델을 얻은 것이 2005년이니까요."
-어떤 문제들이 있었던가요.
"우선은 대부분의 현장이 실내가 아닙니다. 특히 영화제작 현장 같은 야외는 기상 여건도 다 다르죠. 어느 때는 바람이 불어 불이 날아다니니까 제대로 조리할 수 없고, 어느 때는 수백 명 밥을 하기 위해 가스 화구를 계속 사용하니까 밥차가 열기를 못 이겨 문제가 생기기도 하구요. 여러 번 경험하면서 뜯고 다시 만드는 과정을 거쳐 화구를 개발했습니다. 이제는 다됐다 싶었는데 한번은 스태프들이 '청소좀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밥차위에 조리 찌꺼기들을 채 치우지 못하고 배식 하다 보니 지저분한 광경을 그대로 보게 된 것이죠. 그래서 배수구 설치 시스템을 고안해냈어요."
-이제 완벽한 시스템을 얻으셨습니까.
"전주밥차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완벽하다고 자신하죠. 현장을 다니다보면 가파른 경사도 올라가야하는데 잘못하면 뒤집어지고 쏟아지고 난리가 나죠. 전주밥차는 그럴 염려가 전혀 없어요. 짐들이 서로가 서로를 다 잡아주어서 경사진 곳을 올라가도 끄떡없거든요."
-시행착오를 여러 번 거쳤겠군요. 다른 밥차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이제는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대한민국의 밥차 상당부분이 저희 차의 시스템을 가져간 것이에요. 그동안 별별 일을 다 겪었거든요. 새벽에 몰래 와서 차 내부를 사진으로 찍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 배운다고 왔다가 아예 차를 갖고 도망간 예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주밥차 덕분에 밥차를 잘 만들 수 있었다고 인사하는 분들도 있으니 아주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녜요."
-밥차다운 밥차를 만든 것도, 자의든 타의든 대중화한 것도 결국 전주밥차였네요. 그 전에는 온전한 밥차라고 보기 어려웠겠어요.
"그래서인지 허영만 화백께서 저희 차를 꼼꼼히 보시더니 '야 이것이 진짜 밥차'라고 하시면서 차에서 경험이 묻어나온다고 하셨어요. 그 인연으로 식객 주인공이 되었죠."
-저도 보았습니다. 식객 70화이던가요. 밥차가 대중화되는데도 식객만화가 기여했을 겁니다. 서울 종로에 식객촌을 조성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저희도 초대되었습니다. 10여개 업체가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식객 주인공들 중에서 선정했다고 하더군요. '전주밥차'를 걸고 처음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어서 설레고 기대도 됩니다. 12월에 오픈할 계획인데 실내디자인을 준비중입니다."
-서울 한 중심에 식당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죠. 게다가 벌써부터 '식객촌'에 대한 기대가 커서 제주도와 동부산에도 유치한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전주밥차'의 더 큰 성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예 회사를 서울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겠죠.
"전주밥차의 고향이 전주인데 옮겨가면 안 되죠. 그런데 고민은 있습니다. 저희 사업자등록증이 도소매유통으로 되어 있어서 세금을 몇 배로 내고 있거든요. 이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려면 음식으로 사업자를 내야 하는데 전주에서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 밥차들은 음식업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거든요. 다른 지역에서 되는 일이 왜 정작 음식 도시 전주에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놀라운 일이군요. 밥차를 음식업 사업자로 못 내주는 이유가 뭘까요.
"식당 시설에 대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수도권 밥차 업체들은 별 문제 없이 설명하고 사업자 등록을 다 했거든요. 그동안 여러 번 시도 했는데, 세무서와 구청이 원론적 입장만 고수하고 있어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해결되어야 할 일이군요. 전주밥차가 서울에 주소지를 둔다면 앞뒤가 맞지 않죠. 이 지역의 한계 같습니다.
"이번에 다시 길을 찾아보고 안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서울에 식당이 생기는 것이니 옮길 수 있는 길도 있구요."
-화제를 돌려보죠.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일이 좋아서 밥차사업도 착안했는데, 영화제작의 꿈은 버렸습니까.
"포기하지 못할 꿈이죠. 현장을 못 떠나는 이유 중에는 그 꿈도 있습니다. 어쨌든 영화나 광고 드라마 공연 현장에 가면 괜히 신이 나요. 저도 제작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거든요."
-영화나 연극을 왜 그렇게 하고 싶으셨습니까.
"광대의 특권 때문이었을 겁니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통로로 영화와 연극을 생각했어요.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희곡도 써봤고, 기획사를 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영화현장에서 밥을 제공하고 있으니 한국영화에 기여하는 힘이 큽니다. 전주밥차의 밥심으로 만들어지는 한국영화가 많잖아요.(웃음)
"2002년부터 함께 했던 영화들이 많이 있죠. 최근에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참여했어요. 그런 현장에서 일할 때면 영화제작의 꿈이 더 가까이 오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가고 싶습니다."
-전북일원에서 제작되는 영화현장은 거의 전주밥차의 몫이었겠군요.
"거짓말 같겠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전주시 지원을 받으며 제작되는 영화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외레 다른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에는 끊임없이 불려 다니는데, 제가 노력을 해도 우리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의 문턱이 너무 높더라고요. 지금은 포기했습니다. 일도 밀리고요."
-식객촌 식당 개업 준비로 하반기는 바쁘실 것 같습니다. 사회적 기업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인가요.
"제가 얻은 밥차운영의 노하우를 조금은 어려운 분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서입니다. 사실 밥차라는 것이 자기 노력만 있으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밥차 시스템과 운영의 노하우만 익히면 삶이 팍팍한 분들이 일어서는데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만드는데 에도 좋은 통로가 되지요. 기회가 되면 그런 일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밥차시장이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그동안 대기업들의 포식(?) 대상이 안되었던 것이 신기합니다.(웃음)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당연히 했었죠. 알만한 대기업 식품관련회사가 시도했었습니다. 그런데 밥차의 특성상 자본이 뛰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아무리 자본이 많아 투자를 한다해도 규칙적이지 않는 현장의 특성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결국 사람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요."
홍보물 하나도 붙이지 않은 작은 트럭 앞부분에 '촬영'이라는 글자만 쓰여 있는 그의 밥차가 눈에 들어왔다. 전주밥차 다운 디자인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고객들에게 드릴 수 있는 예우예요.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죠. 근사한 디자인으로 차 외관을 꾸미면 외식업체의 식당차로서는 알려지겠죠. 그러나 저는 어떤 현장에서든 그 현장의 스태프란 자세로 일하고 싶거든요."
개조한 차의 주방쪽 문을 올리니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대박을 기원합니다.'모두 함께 즐거워질 수 밖에 없는 풍경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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