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한옥, 구수한 소리, 넉넉한 여유
비가 오는 날은 허름한 막걸리 집, 갓 부쳐낸 두툼한 파전 한 접시가 문득 생각나고 더위가 내려앉은 날엔 에어컨 바람 나오는 커피숍에 앉아 얼음 알갱이 토독 씹히는 빙수 한 그릇을 움켜쥐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맛깔난 우리 가락 한 소절을 가장 맛있게 들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예쁜 곡선이 살아있고, 바람 소리와 흙냄새, 넉넉한 여유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 상상하신 그대로 바로 한옥이다.
전라북도는 관광객들이 한옥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특별한 추억을 담아갈 수 있도록 지난해 한옥 자원을 활용한 야간상설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전북 방문의 해를 맞아 기획된 것이어서 올해는 볼 수 있을까 하고 아쉬워할 찰나, 도내 곳곳에서 10월까지 공연이 펼쳐진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조용하게 비어있던 한옥이 한바탕 들썩인 그날의 풍경을 함께 들여다보자!
△ 아흔아홉 칸 옛집부터 소박한 돌담길까지
눈꺼풀이 치즈처럼 녹아 붙어서 꼼짝 않고 싶던 토요일 오후, 약간 멍한 몸으로 익산시 함라면 이배원 가옥에서 펼쳐지는 삼부잣집 잔칫날 공연을 찾았다. 공연 시간이 7시라고 들었지만, 본 공연에 앞서 함라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조금 서둘렀다. 내비게이션에 이배원 가옥은 나오질 않아 함라파출소를 찍고 파출소 뒤편에 주차장이 있어 그곳에 차를 세웠다.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주차장 앞이 삼부자 중 하나인 조해영의 가옥이고 그 옆이 김안균 가옥, 이배원 가옥은 워낙 소리가 북적여 금세 찾을 수 있었다.
1918년에 지어진 조해영 가옥은 열두 대문 집으로 불릴 정도로 크다, 궁궐 짓는 도편수가 3년 걸렸다고 전해지니, 가히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김안균 가옥은 전북에서 가장 큰 99칸 옛집(대지 7,649m², 건평 620m²)으로 1922년 김안균의 부친이 지었고, 한옥과 일본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보존이 잘돼 있지만, 후손들이 꺼려 집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아쉬웠다.
상설공연이 펼쳐지는 이배원 가옥은 1917년 지은 것으로 현재 안채 사랑채만 남아 있고 원불교 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함라마을에는 세 만석꾼의 가옥 외에도 소박한 돌담길이 구석구석 이어져 눈길을 사로잡았다. 흙과 물, 돌, 그리고 사람의 정성으로 빚어낸 소박한 담장의 아름다움은 초여름 들꽃처럼 순수하고 온화한 정취를 한껏 뽐낸다.
△ 후한 인심에 눈과 귀, 입이 즐겁다 '함라 삼부잣집 잔칫날'
마을 곳곳을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이배원 가옥으로 들어섰다. 조그만 마당에 무대가 설치돼 있고 공연 시작도 하기 전에 주민을 비롯해 관광객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가옥 밖에서는 서예, 탁본체험, 전통 악기 체험 등 한옥과 어울릴법한 소소한 체험과 먹거리 장터가 마련됐는데 장구를 배우고 있다는 한 학생들은 '덩더더쿵 더러러쿵~' 신명나는 장단 한 가락을 선보여 나도 모르게 얼쑤~하고 추임새로 화답한다.
또,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준비한 쑥이 쏙쏙 씹힐 것 같은 개떡과 김치 부침 등은 삼부자의 그것처럼 넉넉하고 따뜻한 인심이 담겨있는 듯했다. 먹거리 장터 때문인지 사회 보시는 분께서는 "손님들 이제 공연 보러 들어오세요~"라고 여러번 재촉한다.
△ 삼 부자가 살았던 한옥 아래에서 듣는 살아있는 '삼부잣집 이야기'
드디어 6시 30분이 되자 '김미김미', '그때 그 사람' 등 추억의 음악과 국악가요 '이몽룡아' 등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퓨전 마당극 '삼부잣집 마당극'이 시작된다.
극에 등장하는 삼부자는 많은 부를 가지고도 보릿고개나 흉년이 들 때 자신들을 찾아온 걸인과 풍각쟁이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번에 각색된 악극은 삼부자라는 각 인물들을 성악가, 국악가, 악기를 다루는 이로 역을 나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지를 우리 소리와 함께 좀 더 이색적으로 전해주었다.
대사로만 전개되는 극이 아닌 중간중간 흥겨운 음악이 펼쳐진 덕분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살짝 비가 뿌렸는데도 관객들의 호응은 식을 줄 몰랐다. 멀리서 실루엣만 보고 오는 공연이 아닌 한옥 마당 안에 오밀조밀 모여앉아 즐기는 공연에선 무대도 음악도, 소리도 직접 콕콕 꽂히니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터질 것만 같았다. 출발 전, 멍!함은 사라지고 떠들썩한 소리 한 자락, 마지막에 쾌지나 칭칭나네를 이어 부를 땐 의자 위에 깡충 올라가 춤을 추고 있는 낯선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 10월까지 펼쳐지는 한옥 야간상설공연 맛보기
한옥 자원 활용 야간상설 공연은 5월부터 10월까지 전주, 익산, 남원, 임실, 고창 등 도내 5곳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펼쳐진다. 주말마다 영화관, 카페, 카페, 카페 영화관을 반복하셨던 분들이라면 이번 주말에는 한옥 아래에서 신나는 마당극으로 시원하게 스트레스를 날려보는 건 어떨까? 주말, 엿가락처럼 늘어져 소파와 하나 된 채 리모컨만 까딱이지 마시고, 가까운 한옥으로 사드락사드락 나서보길 바란다.
※ 임선실씨는 익산시청 홍보담당관에서 재직 중이며 현재 2013 도민블로그 단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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