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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화가 하반영 선생]"내 작품 세계는 사랑…많이 그리는게 좋은 그림 얻는 길이야"

▲ 인터뷰가 있던 날 선기현 전북예총회장이 동행했다. 선회장은 선생이 아끼는 후배화가이기도 하다. 인터뷰 말미 선생이 선회장에게 "한국화에서 보여지는 비백을 서영화 기법으로 담아냈던 예전 작업이 참 좋았다"며 "그 작업을 다시 찾으라"고 조언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붓을 드는 선생의 작업실에는 미완성 작품들이 쌓여있다. 안봉주기자 bjahn@
화가 하반영 선생이 완주군 상관에 작업실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여름 초입이었다. 말년의 삶을 고향 군산에 의지해왔던 선생의 갑작스러운 이주소식은 뜻밖이었다. 90세가 넘어서도 변하지 않는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아온 선생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고향을 떠나야했던 이유도 궁금했다.

 

사실 선생은 암투병중이다. 지난해 가을, 선생의 대장암 수술은 우리나라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95세 암환자의 대장암 수술 시도도 그렇지만 그 과정을 거뜬히 이겨낸 환자의 정신력과 건강이 화제였다. 수술 받은 환자가 화가 '하반영'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의 이목은 더 집중됐다. 수술 받은 지 사흘 만에 선생은 병상에서도 화구를 챙겨 그림을 그렸다.

 

상관면 소재지에 있는 작업실은 병원에서 퇴원 한 후 선생이 몸을 의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통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에 있는 선생은 걸음만 불편할 뿐 건강해보였다. 시간은 줄었지만 붓을 잡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는 선생은 올해 96세, 여전히 세상에 남길 이야기가 많다. 장르와 형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화풍을 구축해온 선생의 붓이 마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투병의 일상에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선생은 지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백수전을 꼭 하고 싶어. 이대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어. 아흔아홉 살에 전시회를 하게 되니 이제 3년도 채 안 남았거든. 열심히 그려야지."

 

선생의 생애는 한 세기 한국미술사위에 온전히 놓여있다. 그 이유만으로도 선생은 한국미술의 살아있는 역사다.

 

-기대보다 훨씬 건강해보이십니다. 작업실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 보니 걷기가 예전만 못할 뿐 지낼만해요."

 

-치료는 어떻게 받으십니까.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통원치료하지. 대장암수술이 잘되었어요. 그런데 수술 하지 못할 부위에 종양이 또 있대.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경과가 좋다고 하니 다행이지."

 

-선생님 연세에 암수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워낙 건강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건강을 타고 났나봐. 여든만 넘어도 수술하기 쉽지 않다던데. 한 달 정도 금식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의사가 검사해보더니 수술해도 되겠다고 하더라고. 암튼 내 수술이 화제가 되어 방송도 나가고 그랬잖어."

 

-수술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드셨을 텐데 백수전 계획도 그때 하신건가요.

 

"백수전 계획은 오래됐어. 몸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암 상태도 좋아졌다고 하니께 할 수 있을 것 같어. 내가 지금도 보청기 없이 이야기하고 안경 안 쓰고 신문 보거든. 이만하면 되지 않겄어.(웃음)"

 

-충분하시죠. 요즘도 날마다 그림 그리십니까.

 

"생각만큼 몸이 따라 주진 않지만 붓은 늘 잡지. 암수술 끝나고도 가장 먼저 붓 가져오라고해서 손힘 먼저 봤어. 몸이 불편하니 다소 둔해졌지만 다행이다 싶었지."

 

-건강을 타고나셨다고는 해도 비결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가방끈이 짧잖어. 그래서 한 가지 일, 그림 그리는 일에만 완전히 집중해온 덕이 아닌가 싶어. 많은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그림 그리는 것만 붙잡고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왔거든. 세상 눈치 안보고. 이것저것 생각하면 복잡해지잖아."

 

사실 선생이 걸어온 삶의 풍경은 사회적 규범이나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사적으로는 더 그렇다.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하기도 한데, 누군가는 그것의 근원을 선생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목한다.

 

-그럼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셨군요.

 

"군산 신풍 초등학교를 아홉 살에야 들어갔는데 일본인 교장이 내 그림솜씨를 늘 칭찬했어. 일제 때 선전(조선전람회)이 있었는데, 교장선생님 권유로 출품했거든. 그때는 내가 학생이어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냈는데 최고상인 총독상을 받았어. 학교는 4학년 다니고 안다녔고."

 

-왜 학교를 그만두셨는지요.

 

"집을 나왔거든. 거의 혼자 지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일찍부터 술 담배를 배우고 휩쓸려 다녔지. 학교 그만두고 완구공장에서 일하다 열일곱 살에 군산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어."

 

-극장 간판 그림은 따로 배우셨나요.

 

"그건게 어디 있어 그냥 그렸지. 내가 처음 그렸던 것이 게리쿠퍼가 총잡고 있는 것이었어. 브로마이드를 보고 그렸는데 잘 그렸다고 놀라더라고.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고해서 다니기 시작했지. 근데 내가 배경은 잘 그리는데 인물은 못 그렸어요. 그래서 데생을 열심히 공부했지. 그때 월급도 많이 받았어. 전주시장이 25만원 받을 때 내가 45만원 받았다니까. 우쭐했지."

 

-그 뒤에 전주로 오신거군요.

 

"전주로 가고 싶더라고. 그때 전주가 시로 승격됐거든. 전주극장 간판을 그렸어. 당시 전주극장에는 일본인이 간판을 그리고 있었는데 진짜 실력이 좋았어요. 그이가 한 달 동안 나한테 간판 잘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어. 점만 찍어 전체상을 완성하는 기법을 그때 배웠지."

 

-형편이 곤궁하지는 않았겠습니다.

 

"월급을 95만원까지 받았으니까. 인심 꽤나 쓰고 다녔지. 술사고 밥사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 나는 인력거타고 다녔다니까."(웃음)

 

-본격적인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셨나요. 극장간판만 그렸다면 화가로 입성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

 

"나는 간판쟁이 출신이지만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아. 내가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으니까. 그즈음 해방이 되었는데,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 생겼거든. 그래서 거기 출품을 했어요. 보자기에 놓인 무와 감을 그렸는데 입선했고, 2회때는 풍경화를 그렸는데 낙선했어. 그래도 7회 때까지 연속 입상을 했어. 이만하면 내가 가방끈은 다른 사람들보다 짧아도 그림 실력은 됐다 싶더라고. 국전에 출품하면서 간판 그리는 일은 그만뒀지."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사실 힘들었어요. 가족들도 고생했지. 순수미술로 바꾼 50년대부터는 그림만 그리면서 살았는데 잘 팔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무대미술이었어. 연극 무대나 다른 공연 무대의 장치를 제작했어요. 언젠가 피카소 기념관을 간적이 있는데 피카소가 젊은 시절 제작한 서커스 무대장치를 그대로 남겨놓은 것을 보니 부럽더라고."

 

-스승은 없었나요.

 

"있었지. 금릉 김영창 선생님. 전주에서 만나 모셨는데 본격적으로 사사한 일은 없어. 내가 금릉 선생을 모시고 지낼 때 하루는 이의주가 내 그림을 보고 금릉 그림과 똑같다고 하더라고. 당장 그림을 바꾸었지. 나는 예술은 자기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에게 배운 것만 지향하다 보면 영락없이 선생의 그림을 그리게 되거든."

 

-그래도 학교 공부는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상처가 된 적은 있지. 내가 그림을 그려서 내다 팔았는데, 인물화를 그렸거든. 그랬는데 미술대 학생들이 와서는 '저것 간판쟁이 그림'이라고 외면하더라고. 그때부터 인물화는 안 그려. 72년엔가는 강원도로 들어가 5년 만에 나왔는데 그때 국전에 마지막으로 냈는데 특선을 했어. 경기전 고목. 그 후로 그림이 좀 팔리기 시작했어요."

 

-국제공모전에도 출품 하셨죠.

 

"실력을 가늠해보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으니까. 일본 국제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에서 최고상을 받은 후로 일본에서는 내 그림이 인기 있었어. 전시회를 열면 작품 대부분이 팔렸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팔렸지만 일본에서는 나를 알아주었거든."

 

-그럼 일본 유학의 기회도 있었겠는데요.

 

"일본인 친구가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 일본에 와서 활동하라고 강권했지. 집도 주고 모든 생활비까지 지원하겠다고. 고민은 해봤지만 일본으로 가면 내가 영영 거기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안 갔어요. 지금도 오기만하면 모든 것은 다 지원하겠다는 편지가 와."

 

-젊은 시절,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니면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파리 생활은 언제인가요.

 

"79년 나 환갑때. 서양의 미술 흐름을 현지에서 경험하고 싶었어. 그때 친분이 있었던 고암 이응로 오지호 선생이 파리에 있었거든. 6개월만 있다 와야겠다고 떠났는데 파리 8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그곳 화가들과 교류도 하면서 1년도 훨씬 더 지나서 돌아왔어요. 르 살롱 공모전 우수상과 꽁파르죵 공모전 금상을 그때 수상했는데 꽁파르죵 금상은 미테랑 대통령한테 직접 받았어."

 

-국제적으로도 선생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였겠습니다.

 

"그렇지. 파리에서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 그림을 모아 85년엔가 뉴욕초대전을 하고 87년에는 미국평론가협회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미국에도 좀 알려졌지."

 

-선생님은 다작은 정평이 났습니다. 다작의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요.

 

"나는 많이 그리는 것이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화가가 그리는 일 말고 할 일이 뭐있겠어.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창작세계를 모색하고 탐구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자기 사상과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

 

지난 96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전라북도와 가고시마현의 미술인 교류전이 열렸다. 그때 가고시마에서 머무르는 5일 일정동안 선생의 손에는 늘 스케치북이 들려있었다. 어느 곳에 있든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선생의 스케치북에 담겼다. 그때 동행했던 젊은 후배들에게 선생의 치열한 일상은 큰 교훈과 감동이었다.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궁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세계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랑이에요.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 작품에는 이야기를 담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작가 스스로의 철학과 사상이 있어야죠. 나는 형식이나 기법이 한길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작품이 세상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선생을 두지 마라는 것도 바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예요. 내 사상 내 길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최근 그림은 다 추상 작품이군요.

 

"사실적인 묘사의 내면에도 추상이 있어야 해요. 그것이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랄 수 있지. 사진도 내면적 추상이 있는데 아직도 그냥 있는 그대로만을 옮겨내는 그림들이 많거든. 나도 구상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것이 잘 팔리니까.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추상으로 돌아오고. 그런 과정이 늘 반복됐지."

 

-군산 근대미술관에서 선생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데, 100점을 내놓으셨다면서요.

 

"내 미술관 건립이 추진된 적이 있는데, 시에서 근대미술관으로 다시 추진해 개관했어요. 그때 기증했지."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죠.

 

"쿠바에서 헤밍웨이 기념관을 갔어. 조그만 여관(호텔)인데 바다가 보이는 그곳 방에서 집필했대요. 초라했지만 유품을 잘 전시해 놓았더라고. 우리 기념관들은 너무 깨끗하고 화려한 경향이 있잖어. 정작 작가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나는 작은 화실에서 그림 그리다가 붓 놓고 잠든 것 같이 가고 싶어. 내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지금으로서는 백수전을 갖고 싶은데 사실 그 꿈은 너무 큰 것이어서 좀 이중적이기도 하지"(웃음)

 

선생에게 백수전은 그림으로 온 생애를 걸어온 노화가가 마지막 힘을 다할 수 있는 지점이다. '몸이 허락하고 형편이 된다면 100호짜리 화폭을 창가 쪽으로 세워놓고 물감 뿌리고 붓질하면서 맘껏 그리고 싶다'는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니 부유와 궁핍, 자유와 속박, 고난과 평화가 경계 없이 가로질러 놓여있다. 그 부침의 세월이 파란만장하지만 선생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술가의 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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