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깃 쳐도
늙지 않는 휘닉스.
모양이기를 거부한 채
떠돌이 넋이 되어
어디를 가 보아도
한 걸음 앞서
어느 조각공원에서
너는
나의 눈길이 닿기도 전에
비너스의 보드라운 곡선을
더듬으며 있었고
......
밤낮없이 시간의 빈터에서
5할의 탄생과
5할의 소멸로
질서 정연한 움직임 속에
꽃잎 피는 화음(和音)
-「바람」 에서
'바람'을 '휘닉스' , 곧 '불사조'로 은유하면서 거기에서 우주의 본성을 감지하고 있다. 이는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는 허(虛) 혹은 노장의 '도(道)'나 불교의 '공성(空性)과도 다르지 않는 우주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바람은 '어디를 가 보아도/ 한 걸음 앞서' 있고, 또 나보다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을 무시무종(無始無終)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빈터인 셈이다.
시인은 이처럼 현상 속에 내재된 '우주의 본상(本相)에 대한 깨달음, 곧 만해의 〈알 수 없어요〉에 나타난 '오동잎', '푸른 하늘', 혹은 '저녁놀' 등과 다름이 없는 절대자의 현현(顯現)으로서의 '바람', 이른바 '현상의 법신관'을 이 시의 배면에 함의하고 있다.
어느 가랑이 큰 여신(女神)이
산 /산을 / 한 발에 걸터앉아
지금 / 달거리 중이다.
(양도 많기도 하지
명년 봄에 얼마나
큰 / 봄의 아들을 낳으려는지)
-「가을 산」 전문
'어느 가랑이 큰 여신(女神)이/ 산/ 산을/ 한 발에 걸터앉아' '달거리'를 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명년 봄에 얼마나/ 큰/ 봄의 아들을 낳으려는지' 저리 붉게 산이 물들어 있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시작이 끝이 되고,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자연의 순환론적 발전 논리에 대한 우주적 견성, 그는 이미 이처럼 '가을'은 소멸이 아니라 그 안에서 또 다른 생명(봄)이 시작되고 있다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을 배면에 깔고 있다.
얼마를 흔들리고 흔들린 /뒤라야 /네 쪽도 아니고 / 내 쪽도 아닌/중심의 심대를 잡아 //……// 한없이 작아졌다/ 한없이 커졌다/ 무위자연의 하늘/ 둥둥/ 한 점 달로 뜰까.
-「추를 보며」 에서
두 개의 상반된 방향 사이에서 그것을 하나로 합일시키고자 하는 힘을 중도(中道)라 하고 그 중심에 추(錘)가 있다. 시인은 이처럼 하나의 추에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원리를 관(觀)하면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中道的) 삶의 경지를 다지게 된다.
그러기에, 여기에서의 '중(中)'은 산술의 평균적 중(中)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가 깃든 근원처로서 만물을 다 포용하는 중허(中虛)의 세계다. '달(月)' 또한 자연의 이치 혹은 보이는 것(色) 안에 숨어사는 무위자연의 도(道)나 수행자가 추구하는 궁극적 세계로서의 일원상(一圓相)이라 하겠다.
시인·백제예술대학교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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