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위용에 잠깐 머뭇거렸다. 큰 대문이 열렸다. 비가 막 그친 오후, 정갈한 한옥 마당을 딛는 느낌이 행복하고 편안했다. 어깨를 잇대고 있는 여러 채 한옥과 소나무의 조화가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창덕궁 돌담길을 끼고 있는 서울시 원서동 북촌 한옥마을의 은덕문화원 풍경이다. 은덕문화원은 원불교 도량이지만 '종교 울'을 튼지 오래다. 2007년에 개관했으니 올해로 6년째, 은덕문화원은 서울 북촌한옥마을의 문화를 가꾸어가는 중심에 있다. 대중들을 위한 문화활동을 시도하는 종교 도량이 없진 않지만 은덕문화원처럼 적극적으로 '종교 울'을 트고 세상과 소통하는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도량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우리문화의 참다운 모습을 가꾸어가는 정신문화의 공간으로 이미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새삼 이 공간의 태생이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공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시대적 의미를 살려 오늘의 은덕문화원을 만들어놓은 사람은 이선종 원장(69·원불교 교무)이다. 여러해 전 교도로부터 건물을 희사 받아 그 쓰임새를 고민해오던 이 원장은 한옥의 가치를 되살려 우리 문화의 요람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세웠다. 예산도 없었고, 교단의 호응도 적었지만 척박한 환경을 의지와 열정으로 극복했다. 뜻을 세우니 길이 열렸다. 520평 대지위의 안채와 이층 일식 주택, 사랑채와 낡은 창고 등 보존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집을 2년여 동안의 우여곡절 공사 끝에 전통한옥과 2층 일본식 주택 양식을 그대로 보존한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이 원장을 인터뷰로 만나는 일은 어려웠다. 그렇고 보니 20대부터 사회활동을 시작해 새만금 살리기, 반핵, 평화와 인권, 여성, 환경 등 파장이 큰 시민운동을 반세기 가깝게 주도해온 사람치고는 '이선종'이란 이름 외에 본격적인 그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일은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 싶었다. 언론을 통해 개인적 삶이 드러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해왔던 때문이었다.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는 7월 장마가 머뭇거리는 하순, 은덕문화원 인화당 접견실에서 있었다. '인생의 가을'을 맞고 보니 성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이 원장은 '회광반조(回光返照-자신을 반성해서 곧바로 자기 심성의 성품을 비쳐보는 것)'를 일상으로 들여놓은지 오래라고 말했다. 종교인으로서 사회참여의 길을 선택해 곁눈질 하지 않고 걸어온 삶의 지평이 넓고도 깊어 보였다. '원불교 교법 사회화'의 진정한 실천이 그의 50년 교역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건물이 훨씬 아름답고 고졸한 느낌을 줍니다. 손수 공사를 지휘하셨다면서요.
"어릴 때 한옥에 살아서 한옥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어요. 기왕에 시작하는 일이니 제대로 하고 싶었지만 재정이 부족해 건축비를 절약하려면 직접 뛰어들 수밖에 없었죠. 밤늦게까지 벽돌 나르고 마당에 돌을 깔고 온갖 일을 몸으로 함께 때운 교무들의 고생이 컸습니다. 원불교가 돈은 없지만 정신은 살아 있어서 그 힘으로 버텨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은덕문화원'이란 이름이 원불교의 이미지를 담아 지은 것인 줄 알았는데, 기증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더군요.
"이름 지을 때, 내놓고 큰 반대는 없었지만 교단 내부에서 이견은 있었어요. 그러나 원불교 이름을 내세우기 보다는 기증자(전은덕)의 뜻을 기리는 것이 좋다고 보았고, 교법의 사회화를 위해서도 포장으로 '울'부터 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원불교 재단에서 수리했다는 안내도 조그맣게 붙였어요."
-원불교 도량이면서도 종교적 정체성 보다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웠는데 교단의 호응을 얻기 힘들진 않았나요.
"쉽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원불교가 이제 좀 더 큰살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바로 앞에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있는데 세속적인 기준으로 공간 활용을 앞세우면 안 되잖아요. 창덕궁과 같은 콘셉트로 자리 잡으니 서울시민들에게 확대경으로 비쳐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과적으로는 원불교에 대한 이미지도 높아졌고요. 지금은 문화원 자체적으로 꾸리는 사업이 아니어도 시민사회단체, 정부부처, 재외대사관 관련인사들의 왕래가 잦습니다. 다 종교 울을 튼 덕분 아니겠어요."
-은덕문화원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지평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문화교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희망하지요. 격조 높은 수도도량으로서 국제교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국제교화의 장이자 종교와 사상을 넘어 문화로 하나 되는 창의적인 교화의 장, 그리고 원불교 사상과 현대담론을 통한 인재 양성의 산실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많던데요. 그중에서도 역시 사람을 키워내는 아카데미 운영이 눈에 띄었습니다.
"중심은 역시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니까요. 아카데미에서는 지금까지 300명을 배출했어요. 장학사업도 활발하죠. 대부분이 원불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도가 아닌 사람도 있어요. 아카데미는 원불교 교법과 사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시대담론과 코드를 읽는 강좌를 개설해 의식의 눈을 뜨게 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합니다."
-시대담론을 읽고 의식의 눈을 뜨게 하는 강좌를 종교 도량에서 운영하는 일이 흔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원장님의 지향과 관련이 있겠군요.
"개인적 지향만이 아니라 원불교에서도 교법의 사회화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런데 내 시력으로 보면 그 방식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교법의 사회화를 원불교 안에서만 이루려고 하면 그 끝이 보이잖아요. 사실 원불교 역사는 1세기가 안됩니다. 그런데도 원불교 안에 머무는 교역자가 많아요. 나는 일찍이 원불교 교법의 사회화에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트고, '남여울' '종교울' '사상울' '지역울' 도 다 트고 큰 원을 그리려고 노력 했지요. 원불교 사상으로 무장이 되어 있다면 그 사상을 마음으로 활용해 어떻게 쓰고 있는가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원장님은 종교인으로도 그렇지만 평화 인권 환경 여성 등 시민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해온 삶의 풍경이 대중들에게는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활발하지만 아직도 종교내부에서는 경계의 영역 아닌가요.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종교인이 여전히 미미한 것을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내 경우도 진보냐 보수냐를 가르기 전에 인연으로 교류해왔지만 급진보로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아직도 그만큼 주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일 겁니다."
-스스로 '중도'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그동안의 활동 영역을 보면 그런 가름은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웃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지극히 중도적 노선을 걷고 있어요. 보수든 진보든 옳고 좋은 것은 취해 서로 보완해 나갈 때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보수는 경험이 풍부하고, 진보는 창의적 생각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역량이 있죠. 가능하다면 이런 좋은 점을 취하고 보완하면 좋겠지요."
-그럼에도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비롯해 반핵, 인권과 평화, 환경, 여성운동 단체 같은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를 지원하거나 그 중심에서 활동해왔습니다. 교단의 비판이나 정부의 경계로부터 자유로웠습니까.
"교단에서도 적잖은 지탄과 비판을 받죠. 그런데 저는 한 시대를 살면서 종교인들이 걸어야할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어떻습니까. 종교인들이 세상을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와 종교인을 걱정하는 시대지 않습니까. 격변의 시대에 종교자로서 해야 할 일은 도처에 있습니다. 그것은 곧 교법의 사회화와도 직결됩니다."
-올해 초 환경재단 대표를 맡으셨던데요.
"환경재단 최열 대표의 공석을 대신하는 역할인데, 환경단체와의 인연도 그렇고 법의 잣대로만 구속되어 있는 최 대표의 어려움을 나누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모범적으로 살아온 분들이 정치적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보면 분노할 수밖에 없죠. 재단의 60명 식구 워크숍을 하면서 '사람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교감이 되어야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화합단결하고 재단의 주인이 되자'고 말했어요."
-정복 입은 교역자로서 그런 일에 나서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예전에 한명숙 총리 기소 때 증인 채택되어 나간일도 있으시죠. 교단의 반대는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내가 잘못된 일을 거드는 것이 아니니 떳떳했어요. 종교인은 시대의 양심이고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 거리낄 것이 없죠. 일전에 '남영동' 영화를 보고(충격적 장면에 끝까지 못 보았지만) 다시 확인했어요. 김근태의원 같은 분들의 희생 이 있어 자유와 정의와 민주주의를 얻었잖아요. 그들의 희생을 딛고 살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과제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다고 적당히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며 산다면 그 분들이 흘린 땀 흘린 눈물과 고통 받은 상처를 어떻게 갚겠습니까."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식견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원불교 울안에서 언제 그런 심미안을 갖게 되셨나요.
"20대부터 크리스천아카데미 YWCA 유네스코 등 다양한 사회문화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의식을 넓히고 교양을 쌓을 수 있었어요. 지성사회를 교화하려면 다양한 영역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무는 뿌리가 튼실해야하는데, 교단에서도 그렇고 외부 사회활동에서도 그렇고 여러 역할을 맡으면서 뿌리 없는 나무로 살면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이었던 한창기 선생을 만나면서 눈을 뜨고 마음을 틔웠습니다. 우리 것 우리 얼 우리 정신 그 모든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우리 존재의 근원에 눈 뜨게 하더군요."
-은덕문화원의 문화운동 중심에 우리문화가 있는 이유가 확연해집니다. 고향인 전북은 한국적인 문화와 정서를 대표하는 지역인데, 고향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북은 미래의 가능성이 충만한 땅입니다. 한국 오천년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우리 문화와 우리 얼, 정신, 흥, 맛의 산실이지요. 지금은 불의 시대가 가고 물의 시대입니다. 정신문화의 산실인 전라도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배경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겠지요."
-격변의 시대에 정신문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일수록 종교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시대의 종교인이 지녀야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힘은 진실입니다. 종교인은 절대 진실해야 하지요. 두 번째는 공익심입니다. 개인보다는 공(公)을 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공익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헌신해야 합니다. 종교를 이용하려고 하면 종교인이 아닙니다. 자기를 썩혀 거름이 되고, 새로운 싹을 만드는 것이 종교인입니다."
이 원장은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한창일 때 새만금 반대운동 중심에 있었다. 삼보일배에도 나섰던 이 원장에게 새만금의 미래를 물었다.
"새만금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도 운명적인 것 아닌가 싶어요.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로 새만금을 보아야 하냐는 것일 텐데 나는 자연생태적인 가치와 첨단의 문화산업에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새만금의 생태적 가치를 강조한 이 원장의 조언은 명쾌했다. "더 이상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향을 잘 잡으면 새만금은 천혜의 보고가 될 수 있어요. 그래야 미래의 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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