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중한 눈병을 얻어 치료를 받고 있던 그에게 훈련차 진안에 왔던 원불교 교무님이 물었다.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그의 답을 듣고 다시 일렀다. "그렇다면 그 꿈을 갖고 인류의 스승이 되어라." 출가를 결심했다. 교무님이 봉직하고 있던 부산까지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들어가서는 학점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공부에 전념하면서 '원불교에 내 삶을 온전히 뿌리내리고 살수 있겠는지' 스스로 실험했다. 원불교 교단과 공동체는 대학시절 건강한 리더쉽을 발휘했던 그를 눈여겨 보았다. 첫 부임지는 서울 종로교당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 등 대도시의 생태에 관심이 갔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지도자들을 예리한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원불교 사상으로 스스로를 다지고, 밖으로는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눈으로 원을 그리고 싶었다. 유네스코와 흥사단, YMCA 등 여러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역사와 시대, 사회의식을 갖게 됐다. 종교적 사상의 뿌리를 더 단단하게 해준 함석헌 김수환 강원용 이태영 지학순 같은 시대의 지도자들과 한국문화에 눈을 뜨게 해준 한창기 전영필 최완수 같은 문화인들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사회성 강한 단체에 참여하는 그를 교단은 반가워하지 않았지만 그 길을 꿋꿋히 갔다. '원불교 교법의 사회화'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상과 교유하면서 모든 '울'(울타리)을 트기 시작했을 때 병을 얻었다. 요양을 겸해 여수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도 쉬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지형을 새롭게 바꾸어놓을 정도로 '신나게' 일했던 여수시절은 그의 삶 정점에 놓여있다.
원불교 총부 문화부장과 종로교당 교감 및 종로지구장을 거쳐 여성 교무로는 이례적으로 서울교구장을 지냈으며 중앙훈련원장을 맡아 '교법의 사회화' 실천의 길을 열고자 했다. 종로교당 교무시절 교도(전은덕)가 희사한 서울 원서동의 창덕궁 옆 520평 한옥을 보수하고 일부는 신축해 지난 2007년, 지금은 원불교 문화운동의 보고가 된 은덕문화원을 열었다.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사회 참여 활동은 '이선종'이란 법명을 종교인의 울안에 가두어놓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표적 진보인사로 더 널리 알려지게 했다. 평화 인권 환경 여성운동 단체와 다양한 인연을 갖고 있는 그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지금은 환경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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