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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안에 갇히지 않고 세상 교화시킨 진보인사 이선종 원장

▲ 이선종 원장은 원불교 교법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종교 울을 터야 한다고 말한다. 울 안에 갇히지 않고 밖으로 나온 그의 교화 대상은'소통하는 세상'이었다. 안봉주기자 bjahn@
이선종 원장의 고향은 진안이다. 1944년 정미소집 여덟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지역 사회 활동이 활발했던 아버지로부터 사회성을, 덕과 역량이 높았던 어머니로부터 나누는 삶을 배웠다. 원불교 집안이어서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만 원불교에 나가지 않았다. 원불교를 마음에 들이고 사상에 눈을 뜨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중학교 3학년때였다.

 

위중한 눈병을 얻어 치료를 받고 있던 그에게 훈련차 진안에 왔던 원불교 교무님이 물었다.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그의 답을 듣고 다시 일렀다. "그렇다면 그 꿈을 갖고 인류의 스승이 되어라." 출가를 결심했다. 교무님이 봉직하고 있던 부산까지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들어가서는 학점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공부에 전념하면서 '원불교에 내 삶을 온전히 뿌리내리고 살수 있겠는지' 스스로 실험했다. 원불교 교단과 공동체는 대학시절 건강한 리더쉽을 발휘했던 그를 눈여겨 보았다. 첫 부임지는 서울 종로교당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 등 대도시의 생태에 관심이 갔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지도자들을 예리한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원불교 사상으로 스스로를 다지고, 밖으로는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눈으로 원을 그리고 싶었다. 유네스코와 흥사단, YMCA 등 여러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역사와 시대, 사회의식을 갖게 됐다. 종교적 사상의 뿌리를 더 단단하게 해준 함석헌 김수환 강원용 이태영 지학순 같은 시대의 지도자들과 한국문화에 눈을 뜨게 해준 한창기 전영필 최완수 같은 문화인들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사회성 강한 단체에 참여하는 그를 교단은 반가워하지 않았지만 그 길을 꿋꿋히 갔다. '원불교 교법의 사회화'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상과 교유하면서 모든 '울'(울타리)을 트기 시작했을 때 병을 얻었다. 요양을 겸해 여수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도 쉬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지형을 새롭게 바꾸어놓을 정도로 '신나게' 일했던 여수시절은 그의 삶 정점에 놓여있다.

 

원불교 총부 문화부장과 종로교당 교감 및 종로지구장을 거쳐 여성 교무로는 이례적으로 서울교구장을 지냈으며 중앙훈련원장을 맡아 '교법의 사회화' 실천의 길을 열고자 했다. 종로교당 교무시절 교도(전은덕)가 희사한 서울 원서동의 창덕궁 옆 520평 한옥을 보수하고 일부는 신축해 지난 2007년, 지금은 원불교 문화운동의 보고가 된 은덕문화원을 열었다.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사회 참여 활동은 '이선종'이란 법명을 종교인의 울안에 가두어놓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표적 진보인사로 더 널리 알려지게 했다. 평화 인권 환경 여성운동 단체와 다양한 인연을 갖고 있는 그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지금은 환경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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