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국토와 국민을 지켜줘야 할 군대가 어떻게 자기 나라 국민을 무참하게 죽일 수 있나…"
지난 7월17일 경남 '산청·함양사건 양민 희생자 추모공원'에서 만난 여용석 씨(산청·함양사건 양민 희생자 유족회 이사)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사건 당시 12살과 15살이었던 형 2명과 작은집 식구 3명 등 모두 5명의 가족과 친척을 잃은 여 이사는 악명 높은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의 광기어린 학살을 떠올리며 "거창에서는 그나마 군경가족과 양민을 가려 죽였다고 하던데, 우리 쪽에선 마구 죽였다. 너무 억울한 일이다"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가 고향인 여 이사는 "설명절 다음 날(1951년 2월7일)인데, 당시 형들이 점촌 친척집에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날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친다는 말이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은 '우리 군인인데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며 숨지 않았다. 그렇게 군을 믿었다가 모두 희생되고 말았다."고 통분했다.
작전 명 '견벽청야'. 1951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평화로운 산골마을인 함양·산청군의 가현·방곡, 함양군 점촌·서주마을을 장악한 육군 3대대는 주민 400여명(유족회 주장 700여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3대대는 유림면 서주 지역에만 무려 310명을 몰살했다. 이들은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양민 700여명을 같은 방법으로 학살했다.
여 이사는 "가족 중에서 어떤 사람은 군인·경찰이 돼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는데, 정작 고향의 가족들은 그 군인들 손에 무참히 학살당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3대대 모두가 학살자인 것은 아니었다.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 진기마을. 당시 이 마을에도 1개 소대 병력이 들이닥쳐 마을에 불을 지르고 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주민을 죽이지 않고 철수했다. 불을 지르고 총을 쏘는 등 명령을 따르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여 이사는 "죽고 사는 것이 다 사람의 운명이야. 운명..."하며 안타까워 했다.
사건 당시 자혜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김창석씨(79)는 "4.3사태 등은 이념, 사상이 섞였지만 산청·함양사건은 순진한 산골마을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너무 억울한 사건이었다"며 "당시 마을에서 빨치산들의 심부름이라도 한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고 현장에 없었다. 결국 군인들은 무고한 양민들만 죽였다"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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