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고향을 떠났다. 교육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농사짓는 어머니는 아들의 선택을 묵묵히 성원했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대학만은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레슨'에 쏟아부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에게 음악의 길을 열어주었던 스승을 따라 대구 영남대에 입학했다. 대학 4년 동안 공부하면서도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다. 성악의 본고장에 가서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 그만큼 깊어졌다. 이탈리아 유학을 계획했으나 준비과정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여건에서는 역시 경제적 부담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유학비를 마련하는 일이 우선이어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읍 호남고 교사로 2년, 전주 기전여고 교사로 2년 재직했다. 그 사이 교사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유학의 길은 더 멀어져 보이는 듯 했으나 끝내 이탈리아 유학을 강행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면서 오페라 가수를 선망했지만 노래를 부르는 일 못지 않게 지휘나 연출 기획 등 오페라 제작의 그 모든 것에 더 눈길이 갔다. '어차피 내가 갈 길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3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기전여대 전임강사가 된 그는 지역에 오페라 운동의 디딤돌을 놓고 싶었다. 그러나 지역의 문화적 환경은 열악했다. 경제적 여건도 그렇지만 '오페라'는 어렵고 특정 계층이 즐기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는 일이 과제였다. '시작하면 길이 보인다'는 확신을 스스로 다지며 1986년 호남오페라단을 창단했다. 첫무대는 '루치아'. 그가 예술감독을 맡아 올린 작품이었다.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이듬해 1회 정기공연으로 푸치니의 '토스타'를 올리며 본격적인 오페라 제작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제작해 올린 작품은 수십편, 순수한 창작오페라만 여덟편이나 되고 공연 횟수로 치자면 100회를 훌쩍 넘는다. 그 사이 호남오페라단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창단 10년만에 사단법인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고, 2002년에는 이 지역에서 첫 전문예술법인으로 등록했다.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새로운 도전을 했으나 예술분야의 특성을 배려받지 못하는 사회적기업의 높은 장벽 앞에서 포기해야 하는 상처를 안기도 했다.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을 비롯해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이 모든 과정에 그의 삶이 온전히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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