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철학교수의 현란한 언술에 대항하고, 막걸리 탁자에 마주앉아 형이상학적 단어들과 저명한 외국 사상가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선배와 동기들을 제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나의 말발이나 내공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는 순간 정신적 철학적 빈곤감에서 탈출하고픈 강한 지식욕이 전신을 자극하였다. 지식과 논리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했다. 굳은 결심으로 캠퍼스내 나무의자에서 외판하는 아줌마로 부터 12권짜리 세계사상전집을 할부 구매하였다.
그 당시 제법 큰돈을 들여 장만을 했으나 초기의 의욕과는 달리 읽을수록 난해하고 재미가 없어 대충 넘기다가 '내가 누구인가?' 라는 화두에 걸려 독서보다는 야단법석에 술자리를 깔고 말았다. 그 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기는커녕 변변히 정독하지도 못한채 결국은 책꽂이 장식용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러면서 세월은 무심히 흘러 군대가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통속하게 살다보니 진지하게 몸과 마음을 가라앉혀 내 인생과 자신에 대해 깊게 성찰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삶의 세찬 회오리 바람이 나에게 불어왔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들떠있던 인생이 바닥으로 차분히 내려 앉아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요구하고 있었다.
20대 초반에서 다시 20년이 더해지던 때에 다시 한번 나를 찾으라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때 만난 김흥호 교수는 '사색'을 통해 미완성의 인간으로서 오로지 정의와 분노와 좌절로 청년기를 보낸 내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동시에 짜릿한 충격을 주었다. 1919년 태어나 이화여대 인문학 교수로 정년퇴임하고 감리교 신학대학교수로 계시다가 작년 12월 5일 타계한 김 교수는 35세 때 주역을 읽다가 견성한 도인이자 동양적 기독교 목사로 유명하다. 다산 유영모의 제자로 스승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 스승을 뛰어 넘는 또 다른 경지를 이룬, 동양 유불선의 사상을 넘나들던 김 교수의 저서는 역사의식과 내적인 성찰이 가볍다고 자각하는 이시대의 선량들과 이해관계에 눈먼 힘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종교와 이념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맹목적 이분법 논리에 사로잡힌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1970년부터 12년간 발행한 김흥호의 개인 월간지 '사색'에 게재했던 글들을 모은 시리즈로 10권으로 되어 있다. 1권은 사물의 실상을 그린 수상과 일기 일부 그리고 현대 사조의 특징과 간단한 종교적 단편을 수록한 '생각없는 생각', 2~3권은 '인물중심의 철학사'로 고대·중세·근대 합리론에 속하는 철인들의 생애와 근대 경험론과 현대 자유진영에 속하는 철인들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4권은 '철인들의 작품'으로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니체, 하이데거의 평이한 형이상학 해설이며 5권은 '실존들의 모습'으로 키에르케고오르, 야스퍼스, 니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을 이야기 한다. '철학속의 문학'이란 제목의 6권은 도스토예프스키, 릴케등 문학 사상가의 생애와 사상, 7권 '길을 찾은 사람들'은 한국, 중국, 인도의 동양 철인들의 생애와 사상을 얘기한다. 노자와 장자, 무문관, 대학, 중용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해석하는 8권'老.莊 사상과 무문관 해설'은 압권이다. 9권 '벽암록의 향기'에서는 불교 경전의 하나이며 선종 최대의 전수인 벽암록을 작가의 내공으로 해석하며, 마지막 10권 '제소리'는 존경을 넘어 합일 일체의 지극으로 모셨던 스승 다산 유영모 선생의 말씀과 글월을 해설한 내용이다.
저자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맑히는 길은 생각하는 길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생각할 때 내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나는 선생이라 생각한다. 선생이란 나를 초월한 존재다. 그것은 인생이 자기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초월하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인생을 보고 싶거든 선생을 보라. 선생을 보는 것이 인생을 보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선생을 알라는 말이다. 선생을 아는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요, 선생을 가지는 것이 자기를 가지는 것이요, 선생을 보는 것이 자기를 보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니다. 선생이 나다. 나의 본체는 선생이요, 나의 진면목은 선생의 모습이다. 키케르케고오르가 영원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오직 한마디 너는 절망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한마디뿐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수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절망에 신음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생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를 못 가졌기 때문이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가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선생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생명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선생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선생을 따르지 않으면 인생은 없다.
무더위가 요란히도 기승을 부렸던 올여름, 촛불이다, 취업난이다 하는 힘든 시절 이지만 이러한 맑은 선지식이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라는 한줄의 글귀가 오늘도 세상을 힘겹게 사는 나에게는 청량한 활력소 이다.
※김영배씨는 전주효문여중 교장(직무대리)·천년전주사랑모임 이사장·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 상임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전북민예총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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