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건 고창 '책마을 해리' 대표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움직임이 있다. 종이책을 일상으로 다시 들여놓는 일, 책과 책읽기의 가치를 주목한 '책마을' 운동이다. 이 문화운동을 먼저 시작한 곳은 유럽의 도시들이다. 이들 중에는 마을공동체를 살리고 관광명소로 발전시키는 결실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도시들이 적지 않다. 현재 세계적으로 책마을로 지정된 곳은 '세계 최초의 책마을'을 선언했던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 와이를 비롯한 27곳. 모두가 마을의 역사와 문화, 풍광을 온전히 껴안은 아름다운 공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책마을을 가질 수 없을까. '고창의 책마을 해리'가 반가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블로그로 만난 '책마을 해리'는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였다. 작은 마을의 폐교를 터 삼아 책마을을 만들고 있는 이대건 대표(44)를 만났다. 출판기획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환경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책마을운동을 시작한 그의 꿈과 용기가 궁금했다.
여름더위가 느리게 물러가고 있는 9월 초, 고창 읍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해리면 월봉마을 가는 길, 양옆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먼저 마음을 빼앗았다. '책마을 해리'는 지난 2001년 폐교된 나성초등학교의 새로운 이름이다. 잡풀로 덮인 넓은 운동장과 두개의 단층짜리 교사, 조그만 부속건물이 전부인 이곳에서 이 대표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책마을 해리'를 만날 수 있는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마을이 참 예쁩니다. 초등학교가 꽤 오래전에 폐교되었더군요. 10년이 넘었는데 인연이 있었습니까.
"이 마을은 아니지만 조금 떨어져있는 매남마을이 고향입니다. 이 학교는 증조부께서 지어 마을에 기증한 것이죠. 증조부는 시골에서는 큰 부자였는데 적지 않은 일을 하셨습니다. 흉년들었을 때 노적을 헐어 나누는 일은 기본이고 지게지고 겨우 다니던 길을 넓혀 '구루마'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와 큰 저수지를 만들어놓으셨어요. 1930년대 말에는 땅 3천 평과 산을 내놓고 교사 한 채를 목조로 지어 내놓았지요. 그래서 학교를 유치했습니다. 나성초등학교는 1933년 정식학교가 아닌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았는데 당초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 교사가 지어지면서 이사해왔습니다. 새 터전을 갖게 된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다시 이 학교를 얻게 된 것인가요.
"나성초등학교가 2001년에 폐교되었는데 당시에는 폐교를 매각하는 정책이어서 교육청에서 연락을 했더군요. 교육목적으로 기증을 받았는데 그냥 매각해버리면 그 뜻과 달라져버리니 후손과 연고자들에게 먼저 동의를 구하는 절차였어요."
-그럼 다시 사신 거군요. 책마을을 만들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계기가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꿈꾸어온 일이기도 하고, 증조부의 뜻을 받는 길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제 증조부를 인근 주민들은 '참봉 하나씨'라고 부르며 존경했습니다. 선각자셨지요. 사실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교육사업을 하시려고 했다면 어떤 의지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후손으로서 마땅히 그 길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상의해 이 학교를 다시 인수했죠. 2006년 1월입니다."
-그렇다면 아직은 사유재산인데 책마을은 공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이 학교는 공적인 공간이 되어야 하고 공적인 기구가 만들어지면 기부해야죠. 학교를 매입한 아버님과 또 다른 친척분의 동의를 이미 얻었습니다. 만약 실컷 일해 놓았는데 '팔 테니 나가라'하면 어쩌겠어요.(웃음) 이 공간의 가치를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뜻이기도 합니다."
-'책마을 해리'란 이름이 참 잘 어울립니다. 언제 문을 열었습니까.
"작년 2월입니다. '출판캠프'는 작년 7월부터 시작했고요. 그러나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했어요. 2006년 학교 인수를 한 후 거의 격주로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오다가 나중에는 가족들과 함께 왔죠. 그때는 물론 풀을 베거나 교사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모으기 시작했죠. 지금은 10만권 정도 모았습니다. 아는 출판사들이 도와주었고, 독서운동 단체와 지인들,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가 나서서 모아준 책들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귀향했는데,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준비기간이 길어서 그나마 큰 반대는 없었습니다. 물론 결단이 필요했어요.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그랬고. 애들한테는 동물원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죠. 격주로 내려와 텃밭을 가꾸고 동물들도 가까이하면서 아이들의 거부감을 줄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도 잘 적응하는 편이고 아내는 저보다 더 즐거워합니다."
-책마을이 지니게 될 공공성으로 보자면 공간도 그렇지만 운영방식도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래서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우선은 영농조합으로 했는데, 이름이 '꽃피는'입니다. 이 법인에서 학교를 장기임대해 운영하는 형식이죠. '꽃피는'은 다섯 명 조합원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두 고창 사람들이고 선후배 사이죠. 책마을을 마음의 양식만이 아니고 몸양식도 같이 주는 공간으로 만들어내자는 데 뜻을 모은 동료들입니다. 책마을이 지역사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나 가공품들을 유통하는 통로로 기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출판 캠프도 함께 운영합니다. 그러나 조만간 법인을 사단법인으로 바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영농법인이면 영농과 관련된 일이 중심이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죠. 영농조합은 목적이 영농행위가 중심이니까요. 그러나 체험 학습이 가능하죠. 그래서 출판캠프도 체험학습의 성격으로 진행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출판과 영농체험이 상관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저희는 오히려 그 간극을 깨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지역에서 꿰어 낼 수 있는 콘텐츠들은 모두 '영농'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농'에 대한 규정이 흥미롭군요.
"예를 들면 고창이 올해 유네스코 생물권지역으로 지정이 됐어요. 그래서 올해 출판캠프의 큰 주제를 '생태 생명'으로 정했습니다. 실제 농업체험만이 아니라 지역의 소중한 콘텐츠를 활용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생태체험 역사문화체험 예술체험 모두가 이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고, 그래서 이 지역을 브랜딩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큰 틀에서 볼 때 '영농'이 아니겠어요."
-지역의 콘텐츠들을 출판을 통해 활용하는 것 자체가 지역의 훌륭한 '영농'이라는 말씀이군요. 큰 틀에서 보면 굉장히 중요한 지역문화운동이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도시에서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문화운동이 아니라 지역의 가치들을 끌어올리는, 교류하면서 균형 있게 문화를 소통하게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마을은 전통적으로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일할 사람까지도 생산해내는 곳입니다. 책마을도 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자료관이든 모두 책을 소비하는 장이 중심이 되지만, 저는 그러한 책의 생태계에 생산도 함께 하는 구조를 담고 싶어요."
-문제는 그런 구조을 유기적으로 조직하고 실행하는 일일 텐데요.
"물론입니다. 생산 구조는 결국 이곳에서 책을 만드는 체험이 중심이 되는 형식이 될 텐데, 그런 구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작가들이나 편집자들이 일정한 기간에 모여 레지던스 프로그램처럼 머물면서 함께 작업하는 형식도 답이 되겠지요. 이 지역 아이들과 다른 도시의 아이들이 드나들면서 책을 만들어보고 글도 써보면서 글과 이미지를 다루어보는 경험을 한다면 그 어떤 체험보다도 이 아이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비와 생산이 결합된 구조의 미덕이겠죠."
-출판캠프 이야기를 해보죠. 책을 만드는 체험의 의미나 가치, 특히 아이들이 그런 경험으로부터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혹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책을 만드는 일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저자가 된다는 일은 나의 좌표를 설정하고 내 주변을 확산시켜 가면서 나와 만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행위의 의미를 넘어 내가 무언가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내가 무엇을 써서 내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다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런 체험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근거를 제공해주죠."
-아이들에게는 아주 큰 의미가 있겠군요.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데 큰 계기를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마을과 지역과의 소통은 어떻습니까.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고창에 책과 관련된 동아리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책마을이 문을 열면서 동화 읽는 모임 같은 동아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첫 모임을 갖습니다. 작지만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 반갑죠."
-책마을은 주민들의 참여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요.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책마을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미 지역과 연계하는 작업은 시작됐어요. 출판캠프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요소들, 이를테면 볼거리 먹을거리 등은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끈이 됩니다. 책마을은 책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지만 체험을 다양한 형식으로 확산해서 지역과 만나는 통로를 개발하려고 합니다. 체험은 현장에 있는 주민들만큼 잘 할 수 있는 주체가 없죠. 가령 갯벌체험만해도 인근의 장호마을이 최고거든요. 주민들도 재미있어하고 규모는 작지만 경제적인 활동에도 도움이 되고요. 책마을은 출판을 지역 주민들의 삶과 결합이 되는 구조로 발전시켜나갈 생각입니다."
-2006년부터 준비를 해왔다면 너무 더디가는 것 아닌가요. 혹시 운영재원 마련이 어렵습니까.
"재원 확보는 중요하지만 우선되는 가치는 아닙니다. 학교 교사를 리모델링을 하면서 농진청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운영은 자비로 충당하고 있지요. 리모델링도 아주 더디게 하나씩 하다보니까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제 끝나냐, 빨리 고쳐서 본격적으로 운영하라는 조언들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저는 책마을을 만드는 일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더디더라도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 지역을 알고 지역이 한 몸이 되고 그래서 함께 이루어가는 그릇이어야 하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이 하나의 건강한 문화운동이 되어 다른 지역에도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마을이 궁극적으로 마을을 살려내는 문화적 거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책마을이 만들어지면 좋겠군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제가 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에서 출판경기 안 좋다고 죽네사네 하지 말고 지역으로 내려가라. 귀향도 좋고, 귀촌도 좋다. 일단 지역에 가면 발굴해낼 콘텐츠가 너무 많다. 발굴은 됐지만 유통이 안 되는 것도 많다. 출판기획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널려있다'구요."
-아무리 콘텐츠가 많다해도 그것을 발견해 활용해야 가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지역의 콘텐츠로 문화상품을 만들 수도 있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에 스토리텔링을 입힐 수도 있죠. 요즈음은 스토리텔링이 근본도 없이 그럴싸하게 붙이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니 금방 사그라지고 말죠. 지역의 역사를 조명하고 스토리텔링을 만들면서 누군가 그것을 가지고 좋은 출판물을 만들고 확산시켜나가면 지역의 건강한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중심적인 역할을 출판, 혹은 출판이 이루어지는 책마을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그 역할을 '책마을 해리'가 증명해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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