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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양병호(楊秉浩) 편] 한국적 로컬리즘의 새로운 서정미학

▲ 양병호 시인
끈끈한 풀을 쑵니다.

 

식구들 가을 양지 녘에 앉아

 

비바람 맞으며 살아온 삶의 무늬

 

얼룩 얼룩진 파리똥

 

어지러운 문종이에

 

물을 처발라 좍좍 뜯어냅니다.

 

놀이하듯 신나게 남루를 발겨냅니다.

 

눈부시게 새하얀 내일을 재단하여

 

각진 문살에 창호지 척척 발라

 

뉘엿뉘엿 쓸쓸한 하오의 햇볕

 

서러운 가을바람에 말리면

 

꾀죄죄한 살림이 시나브로 탱탱해집니다.

 

퀴퀴한 세상이 상큼 환해집니다.

 

귀뚜라미 울음 머금은 댓잎

 

별빛 우러러 파르란 국화 잎사귀로

 

사군자 치듯 무늬를 수놓으면

 

출렁이는 달빛 휘영청 쏟아지고

 

길손 바람 문풍지를 흔들며 놀다 가면

 

이윽고 배부른 해가 꺼억, 트림처럼 떠오릅니다. - '가을 門 도배' 일부

 

고고학자들이 문화재를 발굴하듯, 양병호 시인(1960~, 전북대 국문과 교수)는 잊혀져가는 지난 날 우리네 유년의 공간에 대한 향수와 추억을 오이관복(吾以觀復)의 자세로 정관(靜觀)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말처럼 '바람 속을 속수무책 통과하며 스친/ 풍경들을 그러모아/ 추억의 박물관을 건축하는' ('구봉서와 배삼룡' -시인의 말)일이요, 잃어버린 낙원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길이기도 하다.

 

매콤 쏘면서도 달큼하게 앵키는 알싸한 그 맛이여라우.

 

푸-욱 썩어서 그러것지라우.

 

시한이면 겁나게 춥고

 

여름이면 또 펄펄 끓어버리는 옥천에서

 

미역도 감고, 밤하늘 별도 헤면서

 

맨날 푸르게만 자랐지라우.

 

아 그러다가 뒤숭숭 바람불어쌓던

 

열여섯 가을에 참말로 바람이 나버렸지라우.

 

맵고 독하고 얼큰하게 바람 들어버렸지라우.

 

우리는 눈 맞자마자 들이댑다

 

가마솥에서 뻘뻘 온몸을 달군 다음

 

아랫목에서 큼큼 뜨겁게 사랑하다가

 

서까래에 매달려 엄동설한 깡깡 얼었다가

 

장독에서 소금물에 질끈 절여졌지라우.

 

글고도 숯과 고추가 오장육부를 다 뒤집어버리데요.

 

기진해서 인생 포기하고 널브러져 누웠는데

 

동네 아주메들이 달라 들어갖고

 

이도령 기다리는 춘향이 마음 한 줌

 

회문산 휘돌아온 서러운 바람도 한 자락

 

전봉준 이글거리며 타는 눈빛 한 줄기

 

강천산 흘러내린 옥천물도 한 바가지

 

동학 때 베잠방이들의 울분과 함성 한 주먹

 

별빛 머금은 여치 울음소리도 한 가락

 

섞어갖고 육자배기 부르며 설설 버무립디다.

 

한 많은 이 세상

 

썩어 문드러진 이 년을 어르고 달래

 

붉고 찰지고 알싸하게 앵키는 년으로 맹글어버립디다.

 

생각해 봉께, 이러코롬 살아온 내도 모진 년은 참 모진 년인갑소.

 

- '순창고추장', 전문

 

전통 순창고추장의 숙성 과정을 모질고 강인한 이 고장 여인네들의 일생에 비유하여 한 편의 서사시처럼 장중하게 읊고 있다. 정감어린 전라도 지방(남원·순창) 방언의 토속적 구사도 그려러니와, 지난 날 우리네 농촌의 풍경과 그 속에 깃들어 사는 농민들의 애환과 시대상이 한 폭의 민속화를 보듯 정겹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마치 걸쭉한 육자배기처럼 때로는 구수한 재치와 입담으로, 때로는 범상치 않은 풍자로 우리의 무딘 타성과 무료한 일상에 일침을 가하면서 한국 향토시의 새로운 장(場)을 연 또 다른 로컬리즘의 서정 미학이 아닌가 한다. 〈끝〉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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