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망혜(竹杖芒鞋)라는 단어가 있다. 대지팡이와 짚신을 뜻하는 이 단어는 먼 길 떠날 때의 간편한 차림새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한 손으로는 대지팡이를 짚고 어깨에는 한 꾸러미의 짚신을 메고 산수를 유람했던 옛 사람들과 달리 오늘날 우리는 차(車)를 타고 카메라를 메고 여행을 떠나곤 한다. 소설가 김병용 역시 카메라를 메고 길을 나선 후, 자신이 걸은 길을 자신의 글과 사진으로 기록해 놓은 여행기가 바로〈길 위의 풍경〉이다.
김병용은 〈길 위의 풍경〉첫 장에서, 길을 떠나기 전 먼저 지도를 보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지도가 순수 추상과 인간 경험의 오랜 교직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므로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삶터의 전후좌우와 동서남북, 이 땅의 산과 들과 물에서 자연과 사람을 만나고 거기 스며들어 온몸으로 체득한 것들을 ‘지리적 풍경’으로 남겨 놓는다. 2005년 전북의 동남부 산악지대 1,500리를 도보 답사한 적이 있었던 그는 마이산,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섬진강 물줄기, 지리산길, 선암사-송광사, 망해사, 고군산열도, 어청도, 가거도, 강진-해남-보길도, 장흥-벌교, 남해-통영, 덕유산길, 금강의 공주-부여, 논산-군산, 부안, 백양사-내장사, 정읍-고창 등의 길을 걸으며 그의 글에, 사진에, 몸에 지도를 새겨 놓았던 것이다.
또한 김병용은 물길, 산길, 들길, 골목길, 신작로, 철도, 고속도로 등 길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통과한 시간의 터널, 그 ‘역사적 풍경’을 〈길 위의 풍경〉에 그려 놓는다. 지리산에서는 이현상 루트를 따라 빨치산이 활동했던 일대를 탐사하고, 김헌창의 난과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던 공주에서는 동학군의 우금치 패배를 떠올린다. 나당연합군에 맞선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죽을자리로 선택한 논산 황산벌이 왕건의 군대와 대치하다 견훤이 죽은 곳이며 6.25로 인해 남한 최대의 신병훈련소가 들어온 곳임을 말하며 역사의 짓궂음에 애석해 한다. 또한 일제에 의해 개항된 후 미군 진주와 함께 아메리카타운이 세워진 군산에서 새만금 개발을 바라보면서 20세기 한국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군산을 실감한다.
그러나 〈길 위의 풍경〉이 다른 여행기와 차별화되는 것은 소설가 김병용이 보여 주는 ‘문학적 풍경’ 때문이다. 그는 “문학 기행의 목적이 바다와 산과 길과 사람들 사이에서 내 문학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길 위의 풍경〉 도처에는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해남-강진-보길도 기행에서 문학의 육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문학 작품이 작가의 육체적 노동에 의해 탄생되는 것이고 작가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정직하게 결부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다산초당, 김영랑 생가, 김남주 생가, 고정희 생가, 보길도 부용동을 지나면서 황석영, 황지우 등의 문학적 성장을 지켜본 땅이 바로 이곳이었음에 숙연해 한다. 조선시대 ‘장흥가단’을 형성했던 ‘관서별곡’의 백광홍 이래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등을 배태한 장흥 천관산에서는 문학이 상호 영향 없이 저 홀로 서지 않음을 확인한다. ‘통영오광대’로 이름난 통영에서는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박경리,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중섭 등을 떠올리면서 ‘문화 도시’의 자부심에 젖는다. 또한 그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따라 남행하는 길을 우리나라 최고의 문학가도라고 부르며, 박두규, 박남준, 이원규 시인이 살고 있는 지리산에서 〈토지〉 〈태백산맥〉 〈지리산〉 〈혼불〉과 같은 대하소설의 자취를 읽기도 한다.
더구나 이 〈길 위의 풍경〉의 미덕은 “여행의 귀착지로 사람, 그리운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김병용의 ‘마음의 풍경’이 펼쳐진 데 있다. 먼 안데스 산지를 헤매고 다니다가 전주천으로 돌아와, 고덕산 아래 자기 사는 동네의 골목과 담벽과 대문에 미친 김병용의 사진과 단상을 보고 읽노라면 문학과 예술과 인생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의 맑고 깊은 눈빛과 시심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소슬한 가을날, 우리들 역시, 카메라를 들고 빈 마음에 파문을 새겨 놓을 풍경 하나를 찾아 떠도는 길손이 되고 싶은 것이다.
*김혜원씨는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백제예술대와 중앙대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여 국내외에서 네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또 우석대대학원 문창과와 전북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시를 전공했다.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이후 백제예술대에서 사진을, 전북대에서 현대시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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