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맹목이 된다." 한승헌(79) 변호사는 폰 바이체커 옛 서독 대통령이 1985년 나치 패망 40주년 기념식에서 한 연설 일부를 인용했다.
산촌 어린 시절부터 검사로, 변호사로, 감사원장으로, 교수로 살아온 삶을 돌아본 에세이 모음집 '피고인이 된 변호사'(범우 펴냄)를 가리키면서다.
한 변호사는 "우리는 지난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체험자로서 기록을 남기고 아픈 추억을 들쑤셔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도록 충동질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진안 출신인 한 변호사는 국내 시국 사건 전문 변호사 1호로 꼽힌다.
전북대 정치학과 졸업 직전 지금의 사법고시인 고등고시 사법과를 통과한 그는 4·19혁명의 폭풍으로 숙청과 사퇴가 잇따르던 1960년 11월 부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의 검사로 부임, 5년 후인 1965년 변호사로 전업했다.
그는 '정의의 수호자'나 '약자의 편에 서는 법관'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갖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교사·아나운서·언론인의 꿈을 접으면서 취업을 위해 본 시험에서 운 좋게 합격해 이 길을 걷게 됐다고 했다.
"지금의 여느 젊은이들처럼 졸업은 다가오고 취업을 해야해서 본 시험입니다. 그런데 법조인이 되고 난 후 세상에 접어들고 보니 상황을 방관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이를 외면한다면 훗날 스스로 가책에 사로잡힐 것 같았고, 그걸 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후발적인 역할 자각'을 한 셈입니다."
실제 그는 소설 '분지' 사건을 시작으로 동백림 간첩단 연루 문인사건, 담시 '오적' 사건, 정부 '보도 지침' 폭로 사건 등 필화 사건을 도맡았다. 무죄를 확신했지만 재판부의 유죄 판결도 자명했던 사건들이다.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걸어간 그 길에서 그는 많은 선생을 만났다고 했다.
첫 담당 필화 사건의 발단이 된 소설 '분지'의 남정현 작가를 비롯해 '천상(天上) 시인' 천상병(1930-1993), 리영희(1929-2010) 교수 등은 그의 법조 인생 길목의한 페이지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공소장이나 판결문만 있었다면 결국 평생 죄인으로 남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변론서, 진정서, 자전적인 글들이 함께 기록됐기에 훗날 이들의 죄 없음이 규명될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시 제 변론으로 모든 것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써 남긴 글들이 결국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법리가 아닌 정치논리가 지배하는 법정을 몸소 경험한 그는 법치(法治)의 정의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법을 빙자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고 했다.
"근대 입헌주의 아래에서 법치주의는 견제 수단으로서 법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소수 지배 엘리트의 이익에 복무하는 법이 아니라 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막기 위한 절차와 테두리로서의 법이라는 말입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이 된 한 변호사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미군정과 독재정권, 이후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후 찾아온 반목과 혼란을 겪은 그는 정반합의 사이클을 거기서 찾았다.
"1960년 4·19혁명 후 찾아온 5·16 군사정변, 10·26 사태와 5·17 쿠데타, 이후 6월 항쟁까지….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나선 저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냉혹하고 암담한 상황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계속 가보자고 한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역사의 중요한 어느 한 단락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단락을 앞당기느냐 늦추느냐의 문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을 겁니다."
그는 최근 '피고인이 된 변호사'를 포함해 총 4권의 선집을 발간했다. 그가 변호한 필화 사건과 표현의 자유의 문제를 다룬 '권력과 필화'(문학동네),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범우, 다음 달 출간 예정), 일본에서 나온 '한일현대사와 평화·민주주의를 생각한다'(일본평론) 등이다.
"제게 있는 밑천이라면 많은 경험을 했고, 다양한 곡절 속에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 삶을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이 정의를 외면하는 시대를 산 변호사로서 법정 밖 동시대인에게 제가 목격하고 체험한 일을 남겨 역사가 망각되지 않도록 하려 합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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