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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복씨 - 복효근 시인 〈따뜻한 외면〉

안아주고 보듬어서 슬픔까지도 나누다

△슬픔 그리고 울음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 누리 햇살에 둘리어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중에서)

 

처음 복효근 시인을 만난 것은 1993년 〈시와 시학〉에서 나온 첫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를 통해서였다. 시집의 제목이 된 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의 부제는 ‘용담꽃’이다. 한약재로 쓰이는 뿌리를 씹으면 용의 쓸개만큼이나 쓰기 때문에 붙여진 꽃말이 바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이다.

 

이제 막 삼십이 된 나는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렸다. 4월, 세상에 첫손을 내미는 나뭇잎, 초록보다 노랑물이 더 많아 여리디 여린 새잎처럼 나의 이십대는 쉽게 상처 입는 시기였다. 아마도 시인 또한 ‘눈두덩 찍어내며 주저앉는’ 이십대를 보냈나보다. 누구보다도 슬픔을 알기에 그대의 슬픔까지도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다. 나의 상처로 나 또한 누군가의 슬픔을 더 깊이 사랑하리라 결심하며 내 이십대는 위로받았다.

 

△더욱 흥건해진 슬픔 그리고 울음

 

7번째 시집을 낸 시인은 이제 오십에 닿았어도 여전히 상처 많아 아프다. 시집 곳곳에 흐르는 울음은 수직으로 가파르기도 하고(‘매미’) 흥건히 세상을 적시기도 한다.(‘소쩍새 시 창작 강의’)

 

이렇게 울음이 세상을 적시도록 상처가 아픈 이유는 천지사방의 길이 모두 막혔거나, 세상이 우리가 지켜야할 꿈과는 반대로 흐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길이 막혔을 때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한사코 길을 내는 기도의 자세를 지킨다. ‘오직, 이 길 끝에 한 줌 재도 연기도 남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무거운 오호츠크 기단을 맞서는 흰빛의 연대’를 보여주거나(‘자작나무 숲의 연대’), 또는 기어이 가야할 곳이 있기에 제 살을 깎으며 거슬러 올라가느라 상처투성이가 되고야 만다.

 

기어이 가야 할 그 어딘가가 있어

 

여울목을 차고 오르는 눈부신 행렬 좀 보아

 

잠시만 멈추어도 물살에 밀려 흘러가버릴 것이므로

 

아픈 지느러미를 파닥여야 하네

 

푸른 버드나무 그늘에서조차 눈 감지 못하네

 

오롯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어

 

〈중략〉

 

거친 물살에 제 살을 깎으며

 

강을 거슬러 오르네·(‘성(聖) 물고기’)

 

△내성적이고 두려움 많은 영혼

 

시인은 어쩌면 겁 많고 소심한 내성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위기에 닥치면 그 동안 길러온 대응방법도 모두 소용없이 ‘천적에게서 몸을 감추는 대신/ 천적으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지는 대신/ 동그랗게 제 몸을 말아서 슬픔의 팔다리와 주둥이와 항문과 성기를/ 제 몸 안으로 욱여넣고 검은 콩알로 변신(’공벌레‘)’하고 싶다.

 

그런 시인에게 ‘무거운 오호츠크 기단에 맞서거나’ ‘제 살을 깎으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하여도 가지 않을 수 없다. ‘흰빛, 얼음, 은빛 비늘, 눈빛’ 등 백색 이미지로 나타나듯이 그 길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라면 외면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리는 심청이처럼 뛰어내린다. 순수한 영혼이 시키는 대로 올바른 길을 향해 한 몸을 던진다. ‘두려움에 떨며/ 떨다가 질끈 눈 감고 뛰어내리는/ 저 작은 물줄기들의 투신에/ 폭포는 비로소 장엄폭포가 된다’(‘폭포’) ‘매달렸던 그 끝에서/ 아쉬운 듯 두려운 듯 망설이다/ 손을 놓고 뛰어내리는 물방울’·(‘소리 그림자’)

 

△더욱 따뜻해진 위로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따뜻한 외면’)

 

맘 없는 말로 표현하고 애정 없는 눈길로 위로하는 것은 손을 베는 풀잎처럼 사람을 아프게 한다. 모르는 척 외면해 주는 것이 더 큰 배려가 될 때도 많다. 누구나 자신이 모자라는 것을 잘 안다. 유난히 쉽게 아픈 생살을 안다. 모자라는 곳을 채우려는 노력을, 아픈 생살이 아물며 단단해지는 과정을, 모르는 척 지켜보는 것은 깊은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순도가 높기에 쉽게 상처 입는 영혼의 시인, 타인의 아픔까지도 내 아픔으로 공감하는 시인의 눈길이기에 그 위로 또한 더욱 따뜻해졌다.

 

퍼붓는 비를 피하겠다고 나비 한 마리가 숨어든 작은 나뭇잎, 힘없는 이가 이겨내기엔 녹록치 않은 현실의 공격을 피하겠다고 찾아든 곳 또한 부실하기만 하다. 힘겹게 견디는 그 시간을 외면으로 지켜보는 여유, 그 외면 속에서 이 겨울이 더욱 따뜻하다.

※ 양정복씨는 전주여고와 전북사대부고 국어교사를 지냈으며, 전북교원연수원을 거쳐 현재 완주교육지원청 장학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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