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누가 외식을 하자고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갓 버무린 김장 김치에 뜨끈뜨끈한 밥만 있으면 만족스런 식탁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해마다 겨울 입구에 들면 김장도 작은 축제 같다. 젊은이는 드물고 노인들이 많은 마을이지만, 이때만큼은 유독 활기가 넘친다. 뒷짐 지고 한담이나 나누던 노인들도 적극적으로 합세한다.
트럭에서 배추를 내릴 때부터 골목이 시끄럽다. 올해는 배추 값이 아주 싸다는 둥, 운봉까지 가서 배추를 가져왔더니 배추 값보다 기름 값이 더 나간다는 둥. 잠시만 바깥에 나가도 오늘은 어떤 집에서 김장을 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어제는 앞집, 오늘은 옆집….
이 즈음이면 택배 차량도 골목에 자주 보인다. 어머니들의 손맛이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웃집에 맛보라며 두어 포기씩 배달하는 일은 주로 남자들 몫이다. 쌀집 통장님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김치를 들고 오신다.
“맛 있을랑가 모르겄어, 잉? 쪼깨 짭짤헌 것도 같은디.”
앞집 개인택시 양반도 이날엔 직접 팔을 걷고 나선다. 일의 절차며 방법을 터득한 듯 확신에 찬 목소리가 담을 넘어온다. 앞집에서 가져온 김치를 보면서 고마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느낀다. 주인양반 목소리만큼 우렁찬 포기김치가 커다란 통에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담겨 있다. 작년에도 올해에도 그랬다. 무어 특별히 잘 해 드린 것도 없고, 되레 사람들 왕래와 연주 연습이 있을 때마다 한바탕씩 소란을 피워 미안한 마음뿐인데…. 더욱이 잘 담근 김치를 그저 듬뿍 주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 찬 그분의 표정!
작년엔 우리 집 감나무에서 딴 대봉시를 그 통에 가득 담아드렸다. 그런데 올해엔 감나무를 옮겼더니 말라 죽어 버렸다. 유난히 크고 달다고 이웃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감이었건만. 이 맛있는 김치 대신 드릴 귀한 게 뭐가 있나…하다가 생각해 낸 게 ‘그래 내가 직접 김장을 해 보자. 그래서 내가 담근 김치로 보답하자’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나이 들어 난생 처음 김장을 해 보았다. 직장 생활로 버겁다느니, 몸이 아프다느니, 식구가 단출하다느니 해서 굳이 고생해가면서 김장을 해야 하느냐며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다. 어머니 생전엔 당신께서, 그 후부터는 큰언니가 아주 맛있는 김치를 늘 보급해 주어 따로 김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 번도 안 해본 김장을 내가 어찌 순순히 할 수 있겠는가? 믿는 바가 있었다. 언니가 김장할 때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다.
이웃들의 김장 일이 한참이면, 잠시 대문 밖을 나갔던 남편이 얼굴이 상기되어 들어올 때가 있다. 길 건너 집에서 김장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동네 남자들끼리 막걸리 한 잔 하고 왔다고 말한다. 갈무리 할 일도 많고 어수선할 텐데, 그 와중에서도 조촐하나마 가장 맛난 것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지극함이라니….
우연하게도 우리 동네에 예술인들이 많이 살아서 간간이 모이곤 한다. 지난주에는 가장 연배가 있는 강 선생님이 당신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김장했으니까. 걍 거그다 밥이나 먹자고.”
점심을 맛있게 먹고 돌아올 때 우리들 손에 또 선물이 쥐어졌다. 김치 두어 포기와 선생님네 논에서 지어왔다는 쌀 한 봉지씩. 뭔가 굉장한 선물을 받은 듯 가슴이 뿌듯했다.
수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한 끼도 거르지 않고 먹어 온 김치! 얼핏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제각기 맛이 다르다.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맛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밥상을 오래 지켜 왔다. 비결은, 정성과 사랑이었다. 그것을 만드는 손길에 어린 마음이 김치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었으리라.
김장 철. 여러 집에서 가져온 김치로 행복한 식탁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정치나 사회 문화 판에서 뭐 좀 한다는 주도층들, 그들에게 김치를 담그는 주부들만큼의 진심과 정성만 있어도, 우리들 눈에 혐오스러운 존재로 비쳐지진 않을 것이라고….
* 수필가 겸 소설가인 김저운 씨는 중등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요즘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에세이집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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