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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에서 목수가 된 김석균씨 "가락 대신 치수 세고, 열채 대신 줄자 잡죠"

어느날 임실 필봉 농악에 빠진 철학도 / 양순용 명인 집에서 1년동안 풍물 배워 / 아버지 병세 위중 귀향, 흙집 매력에 푹

▲ 순창군 인계면 초입에 창고를 고쳐 지은 작업장 계단에서 김석균씨가 흙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주에는 유독 굿쟁이들이 많다. 종교를 떠나 전문예술가는 아니지만 신명과 멋을 논하는 일반 예술인 또는 애호가로 흔히 ‘좀 놀 줄 아는 쟁이’가 많은 곳이다. 이 중 김석균 씨(51)는 흙집을 짓는 생태건축가로 알려져 있지만 노는 판에서는 자·타칭 ‘광대(굿쟁이)’였다.

 

화류계 광대 김석균을 기억하는 일부 ‘팬’에게 그는 “옛날에는 궁채와 열채를 들고 꽹과리, 장구를 쳤지만 지금은 망치와 줄자로 굿을 치고 있다”고 답한다. 그는 “집도 신명이 있어야 제대로 짓는다”며 “굿도 집도 사람과의 관계로 빚어지는 것은 같다”며 “가락 대신 치수를 세고, 열채 대신 줄자를 잡는다”고 들려주었다. 임실과 순창이 접한 순창군 인계면 초입에 창고를 고쳐 지은 작업장이자 주거지인 흙집에서 그를 만났다.

 

△신명은 관계 맺음

 

김석균 씨는 필봉 농악 상쇠였던 고(故) 양순용 선생에게 풍물을 배웠다. 스승이 스무 살을 갓 넘긴 제자에게 툭툭 던진 말은 큰 화두였다.

 

“장구채는 어떻게 만들어야 좋아요?”/“솔가지 대충 끊어서 쓰면 되지!”

 

“열채는요?”/“낫으로 쑥쑥 갈아서 써!”

 

“동작은요?”/“니가 신명 나는데로 니몸뚱아리 놀리는거지!”

 

김 씨는 “풍물은 크게 원을 따라 걷지만 그 안의 개개인은 자유롭게 논다”며 “그냥 흘러가고 있지만 약속 안에서 움직이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가락도 마찬가지다”며 “느린 가락에서 빠른 가락으로, 다시 느린 가락으로 갔다가 몰아가며 작은 신명을 쌓다가 절정으로 달려가는 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없어지고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삶이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철학도, 풍물에 미치다

 

김석균 씨는 정읍 산외에서 태어났지만 초교 2년 때 자식 교육에 열성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주로 오면서부터 제대로 놀았다고 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리랑과 같이 옛 것을 접하면 맥없이 좋았다. 그는 재수생 시절 길을 가다 소극장(극단)에 무작정 들어가 단원으로 받아달라고 떼를 써 입단했다. 극단이 자금 마련을 위해 겨울에 걸립(乞粒)을 시작하면서 풍물을 접했다. 징으로 시작해 북으로 승급할 정도로 풍물판에서 놀 수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전에 인간의 학문인 철학을 먼저 알고자 전북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 뒤에는 불교나 민족종교, 노장사상에 푹 빠졌다.

 

그는 재수시절 확인·인정받았던 끼와 신명을 무기로 동아리 등에서 공력을 쌓았다. 그러던 중 대사습놀이에 출전한 ‘할배’들의 필봉굿 가락을 듣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어르신들의 관광버스에 무작정 올라 어디 가냐고 묻고 동행했습니다. 중간에 짬을 내서 전주로 와 휴학과 함께 집에 출가를 알리고, 양순용 선생님의 집에 들어가 쇠죽 끓이던 방을 치우고 1년간 기숙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웠습니다.”

 

그는 “1년간 배운 걸로 평생을 풀어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나름 의기양양하게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오며 풍물을 했다.

 

“어느날 어르신들의 권유로 즉석에서 실력을 뽐냈더니 칭찬을 하시면서도 ‘원박만 좀 잡으면 되것네’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가락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할아버지들의 말처럼 꾸밈없이 투박한 홑가락에 비해 꾸밈음처럼 겹가락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를 느꼈습니다.”

 

그는 “홑가락만 1년을 치니 소리가 풍성해졌고 대박이 정확히 잡혀 빈 공간이 흔들리지 않아 아무리 빨라져도 여유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채 대신 흙을 잡다

 

한창 놀 때 굿은 그에게 신앙이며, 삶의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으로 먹거리를 잡으면 흐려질 것 같다는 판단으로 프로같은 아마추어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특히 스승인 양순용 명인이 타계한 뒤에는 공식적으로 채를 잡지 않았다.

 

그는 육군본부 군악대(국악대)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의 병원에서 근무하다 아버지의 암 판정으로 귀향했다. 아버지를 따라 10여년간 중장비 기사를 하면서 시간 날 때에는 천연염색도 했다. 녹차가 좋아 몇 년간 차도 재배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잡은 일이 흙집이다.

 

“한옥을 뜯을 일을 계기로 관심이 깊어졌는데 왜 아무도 흙집은 만들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 길로 왔습니다.”

 

그는 풍물을 배웠던 ‘막무가내 정신’으로 흙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국립목포대 건축학과에서 다시 공부를 했고 현재 (주)흙건축연구소 살림 대표, 전환기술 사회적 협동조합 이사, (사)10년후 순창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과 농민에게 자기주도적인 집짓기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낮일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 즐거움에 취한 어느 술판에서는 아직도 능글능글한 웃음을 짓고 있는 ‘굿쟁이’ 목수를 볼 수 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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