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시문
〈제시문 가〉
동양과 유럽의 관계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유럽이 지배자의 지위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언제나 강자의 지위를 차지했다고 하는 점이다. 이것을 완곡하게 표현할 방법은 없다. 밸푸어(A.J.Balfour)가 동양 여러 문명의 ‘위대함’을 인정한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위장하거나 완화하여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정치적, 문화적 차원에서, 나아가 종교적 차원에서조차 양자의 본질적 관계가 어디까지나 대립하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었다. 밸푸어와 크로머(E.B.Cromer)가 그런 용어들을 사용한 전형적인 예다. 예컨대 동양인은 비합리적이고, 저열하고, 유치하고, ‘이상하다’. 그리고 유럽인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하고, ‘정상적’이다. 동양은 이질적이긴 하나 명확하게 조직된 그 자신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세계는 독자적인 민족적, 문화적, 인식론적 경계를 가지고 있고, 또 내적 정합성의 원리들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도처에서 강조함으로써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생명을 얻고 유지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제시문 나〉
현대 사회에서는 세계화로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발전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문화적 정체성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문화에 대해 갖는 일체감을 말하며, 오랫동안 공유한 역사적 경험과 운명 공동체 의식 등을 토대로 형성된다. 따라서 문화적 정체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자원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아 정체감이나 소속감 형성에도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만약 세계화를 명목으로 전통문화의 가치를 폄하하고, 서구 문화를 무분별하게 추종한다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은 상실되고, 사회적 유대가 약화할 것이다. 〈사회문화 교과서〉, 금성출판사, 2014.
〈제시문 다-1〉
“우리가 유럽인에 뒤떨어진 현대 학문은…”
어느 날 저녁, 익원이 말을 꺼냈다.
“철학적인 사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자연 지식에서 생겨난 거야. 그것은 자연 과학에 있어서도 그렇고, 의학에 있어서도 그래. 우리의 선조들이 항상 인간의 육체를 고전 철학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과는 달리, 서양 연구가들은 그것을 해부하여 내부 기관을 직접 눈으로 관찰했지. 그들은 골똘히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어디에 심장이 있고 어디에 위가 있으며, 어디에서 혈관과 신경선이 달리고 있는가를 직접 보았던 거야. 그들의 그러한 대담한 용기 덕분에 우리는 결국 옛날 것보다 몇 백 배나 더 위대한 현대 의학을 얻게 된 거지.”
우리 옛 전통적인 한방 의학에 관해서는 익원이나 나나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한의학이 비록 우리의 연구 분야에 속해 있었지만, 우리는 이제까지 오랜 전통은 모두 낡고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고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우리는 옛 한의원들이 어떻게 공부하였고, 한의학을 학문적으로 어떻게 구분하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한의원이 되기 위해서 적어도 십 년은 공부해야 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밑머리가 세지 않은 한의사는 한 명도 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제시문 다-2〉
낡은 견해를 오래 전부터 벗어 버린 우리들 자체도 어느 날 오후 처음으로 떨어져 있는 잿빛 해부실에 인도되었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다른 여섯 명 학생과 함께 익원과 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의 시체에 천천히 접근하였다. 얼마쯤 떨어져 서서 우리들은 창백한 사자(死者)를 보았다. 그는 깊은 대지의 그늘 속에서 쉬는 대신 여기 연판 위에 누워 옷도 입지 않은 채 알몸을 여름 햇빛에 쪼이고 있어야만 했다. 익원은 슬프게 나를 바라본 다음 내 손을 잡았다. (중략)
나는 오늘 오후 움직이지 않고 누워만 있던 그 시체에 대한 무서운 광경을 잊어버리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익원은 책상 앞에 앉아서 의미 없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더니 집어던져 버렸다.
“무서운 짓.” / “야만적!” / “언어도단.”
익원은 이러한 말들을 내뱉었다. 마지막에는 그의 흥분을 진정시킬 만한 책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쉬지 않고 읽었다. 나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면서 그가 밤새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계속해서 의학을 공부할 것이냐?”
다음 날 아침 그는 나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 논제의 포인트 및 평가기준
■ 논술문을 6단 논법으로 재구성하기
■ 쟁점 논제
1. 논술 논제
제시문 가)와 나)의 내용에 근거해서 제시문 다-1)에 등장하는 인물의 태도를 비판하시오. 그리고 나)와 다-2)를 참고해서 이질적인 문화에서 비롯된 가치관의 충돌 속에서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1,000자 내외)
2. 면접 논제
1) 자문화 중심주의란 무엇이고, 그것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말해 보라. 그리고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말해 보라.
2)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여 민족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면접은 주변 학생들과 직접 해보기 바랍니다.)
■ 쟁점 기출문제
이화여대 2007 정시 논술
아래 제시문들은 보편문명에 대한 여러 입장을 담고 있다. 제시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편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논술하시오.
■ 쟁점 관련 도서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2006, 김상률·오길영, 책세상
〈문명의 충돌〉1997, 새뮤얼 헌팅턴, 김영사
■ 쟁점 관련 영화
‘라스트 모히칸’1992,미국,마이클만
‘부시맨’1980, 남아프리카공화국, 보츠와나
■ 학생 글과 교사 총평
1. 학생 논술문
(다)-1에 등장하는 익원은 서양의 의학은 대담한 용기라 칭찬하면서 “이제까지 전통은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고 말한다. 그는 한의학의 장점은 모두 배제한 채 서양의학의 해부에만 초점을 두는 문화사대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대주의가 무조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앞선 문화를 동경하고 쫓고 싶은 마음과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주체성이 결여된 무분별한 문화사대주의는 우리의 강점마저 사장시키는 폐단을 낳게 된다. 사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의학이 한의학이다. 서양에서도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고 배우려는 의사들이 많다. 익원은 자신이 배우고 있는 한의학의 우수성을 간과한 채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서양의학만 동경하고 추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익원은 동양의학의 강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우수한 서양의학의 강점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익원과 같이 서구문명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은 전통 문화의 장점은 모두 잊은 채 문화 사대주의적 가치관만 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다)-2에서 익원은 문화 사대주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된 시체를 보고 분노하며 비록 죽은 시체더라도 인간의 신체를 소중히 다루는 동양적인 문화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외국 문화가 유입되어도 전통적인 우리의 가치관이 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는 무조건 추종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비판적인 자세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학문과 문화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우리 것만을 고집하는 국수주의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무분별한 추종 역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자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먼저 깊이 있게 인식한 후에야 다른 문화의 가치도 존중하는 다원적 가치관을 함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는 성숙한 세계시민으로서의 면모를 지닐 수 있다.
곽연주 (임실고 1학년)
2. 교사 총평
이번 논술문의 주제는 ‘서양 문명을 보편 문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이다. 과학 기술과 이성 중시의 합리적 사고로 상징되는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논제이다.
- 독해력
제시문 가)는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나타난 불균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제시문 나)는 문화적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서구 문화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이 아닌 분명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제시문 다-1)과 2)에서는 익원이라는 서구 문화를 추종하지만 한국의 전통적 사고 방식를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학생의 글은 가)를 참고해 다-1)과 2)에 나타난 익원의 가치관을 분석하고 나)를 통해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바람직한 방법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 논리력
이번 논제에 대한 글을 작성할 때는 먼저 제시문 다-1)에 나타난 익원의 가치관을 통해 서구 문화를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모습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다-2)에 드러난 익원의 모습에서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서구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모습을 파악해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도출해내야 한다.
곽연주 학생의 논지는 이러한 논제의 요구에 매우 잘 부합한다. 다만 문단과 문단을 연결할 때나 제시문의 내용을 정리하고 인용할 때 글이 부자연스러워지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또한제시문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자신만의 말로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의 통일성이 유지될 수 있다.
- 표현력
전반적으로 논제의 방향에 맞게 논술했으며, 맞춤법을 준수하고 주술 호응에 있어서도 무난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논술은 자아의 객관화를 유지해야 하기에 ‘~고 생각한다’와 같은 표현은 생략해도 무방하다. 또한 사례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좋으나 그에 앞서 제시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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