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1〉
흔히 내러티브란 하나 또는 일련의 사건을 글이나 말의 형태로 전달하는 것, 또는 그러한 글이나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러티브는 전달대상과 전달방식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사건은 이야기(story), 전달방식은 담론(discourse)을 가리킨다. 이야기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사건·인물·환경 등을 포함하며, 담론은 이야기를 말하고 표현하거나 제시하고 나래이션 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내러티브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견해는 이 두 부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원래 내러티브란 학문적 전통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구조, 지식,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내러티브의 기본요건은 내용보다 그것을 전달하는 담론이나 언어였다. 이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의사전달의 수단으로서 언어가 가지는 본질적인 성격 때문에 생겨난다.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담론과 동일한 형식적 구조를 가지게 마련이다. 시작과 끝, 등장인물의 성격묘사, 사실 가능성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어야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러티브의 성격은 이러한 형식적 구조를 전개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 내러티브도 기본적으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맥락보다는 구성 형식에 의해 결정된다. 화이트(Hyden White)는 이런 점에서 역사도 문학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면서, 역사서술의 내러티브에서 이야기와 플롯(plot)을 구분한다. 플롯이란 전승된 형태의 이야기를 확인함으로써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플롯의 구성은 곧 일련의 사건을 특수한 형태의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 구성 형식이 내러티브의 구조가 된다. -중략-
많은 역사학자들은 내러티브가 역사적 사실과 역사학의 성격에 비추어 가장 기본적인 역사인식의 도구이며, 역사 서술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내러티브식 역사가 강조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밍크(Louis Mink)는 내러티브를 과학의 이론이나 문학의 비유와 비견할만한 역사의 기본적인 인지도구라고 주장한다. 내러티브가 역사의 기본적인 인지 도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경험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그 속에 담겨 있는 어떤 일련의 사건이나 현상의 연속적인 상호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형식이다. 우리는 내러티브를 통해 무수히 많은 내적관계를 맺고 있는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로 인식하는데, 이것이 역사인식의 기본적 성격이다. -중략-
내러티브의 내용 자체가 역사인식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내러티브에 들어있는 이야기나 사건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지식을 공유하는 사회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지식이 없다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공동체에 충분히 참여할 수 없다. 더구나 그 이야기와 관련되거나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더욱 광범한 포괄적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지 못하면 임진왜란 주제의 대화에서 소외되기 쉽고, 전쟁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김한종 〈역사수업 도구로서 내러티브의 구성형식과 원리〉
〈제시문2〉
지난 2월 9일 공개된 정조의 어찰첩을 놓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한 사안은 ‘정조 독살설’이었다. 정조 때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독살설의 진위를 파악할 만한 내용이 있는가였다. 어찰첩에는 정조가 자신의 병세를 상세히 밝힌 편지가 여러 통 들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심환지 혹은 노론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선 ‘독살설은 원래 근거가 약한 주장이었다’라는 반응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독살설은 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팩션(faction: fact+fiction)이 있다. 독살설을 제기한 〈영원한 제국〉, 〈조선 왕 독살 사건〉 같은 팩션 소설이 널리 읽히면서 정설처럼 퍼진 것이다. 팩션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와는 달리 정조는 정국 장악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스트’의 면모를 지녔고 심환지는 정조의 심복이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결국 팩션이 만들어 놓은 정조와 심환지의 이미지는 상당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번 어찰첩 발굴로 인해 팩션의 창작 범위에 대해 다시 고민해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해엔 조선 화가 신윤복을 여자로 묘사한 드라마와 영화가 잇달아 나오면서 역사 왜곡 논란이 크게 일었다. 한 정조 연구 권위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런 점에서 새겨들을 만하다. “역사 소설은 일종의 교재 역할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팩트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팩트를 왜곡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는 많습니다.” 학교에서 역사 교육의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역사 드라마가 특히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2010 인하대학교 수시2차 기출-
〈제시문3〉
종래의 역사학은 역사의 과거에 대한 ‘유사성’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유사성’이란 과거라는 원본과 역사라는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를 지칭한다. 이러한 ‘유사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양미술사를 지배해 온 모방(mimesis)이론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역사가 과거의 모방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가는 현재라는 인식론적 시점과 주관성이라는 인식론적 관점에 입각해서 과거를 구성하기 때문에 과거를 모방하기보다는 해석하는 작업으로 역사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역사연구와 서술은 과거와 역사의 모사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역사가에 의해 쓰여진 역사와 자기가 새로 쓰고자 하는 역사 사이의 차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푸코는 모사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를 추구하는 ‘상사성’을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말했다. ‘유사성’은 원본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그것의 재현에 충실한 것을 목표로 하지만, ‘상사성’은 굳이 원본의 존재에 얽매이지 않고 ‘복제와 복제 사이의 닮음과 차이’에 주목한다. -중략-
과거라는 원본에 얽매이지 않고 그 이미지들을 역사로 보여주는 사극은 ‘유사성’이 아니라 ‘상사성’을 추구하며 바로 이 점이 대중으로 하여금 사극에서 재미를 추구하고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계속 갖게 하는 요인이다. 예를 들어 허준과 장희빈, 그리고 대원군과 명성왕후에 대한 사극은 여러번 만들어져서 그 때마다 안방극장에서 상당한 인기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사극이 이렇게 여러 개의 버전으로 리메이크될 수 있는 본질적인 요인은 ‘유사성’이 아니라 ‘상사성’이다. 이처럼 버전이 다른 사극들 사이의 관계가 ‘유사성’이 아니라 ‘상사성’의 코드로 읽혀질 때 사극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또한 하나의 역사로서 인식될 수 있다. -김기봉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 논제의 포인트 및 평가기준
■ 논술문을 6단 논법으로 재구성하기
■ 쟁점논제
1. 논술논제
〈제시문2·3〉에 드러난 팩션(faction)에 대한 관점을 분석하고 제시문(1)을 토대로 팩션이 역사인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하시오. (900자 내외)
2.면접논제
최근 한국영화에서 팩션 영화들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팩션 영화의 대중적 몰입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시오.
■ 쟁점 기출문제
2010학년도 가톨릭대 수시 기출문제
논제1. 역사왜곡에 대한 지문 (가)와 (나)의 관점 차이에 대하여 논하라 (띄어쓰기포함 350~400자)
논제2. 지문 (다)를 활용하여 지문 (나)에서 지적하는 역사왜곡의 문제점에 대하여 논하라
2010학년도 상명대 수시 기출문제
논제2. 제시문을 참고하여 오늘날 문학을 비롯한 예술작품이나 대중매체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 인물의 영웅화 현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800±50자. 띄어쓰기포함).
2013학년도 고려대 모의 기출문제
논제1. (1)의 내용을 바탕으로 (2)와 (3)에 나타난 ‘사실’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900±50자)
쟁점 관련 도서·영화
〈역사들이 속삭인다〉,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광해〉,〈역린〉
■ 학생 글과 교사총평
1. 학생 논술문
〈제시문2·3〉은 팩션(faction)과 역사인식의 관계에 있어서 상반되는 관점이다. 〈제시문2〉에서는 팩션의 허구성으로 인한 역사왜곡이 대중들의 역사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팩션은 대중들에게 허구적인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게 하는 위험성이 있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적 사실과 특정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팩션의 창작범위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며 팩션에서의 상상력은 팩트(fact)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제시문3〉은 대중들의 역사인식에 있어서 팩션의 긍정적인 부분에 주목한다. 이른바 전통적인 역사도 100퍼센트 팩트(fact)라 할 수 없으며 당시 관점과 주관에 따른 역사가의 해석에 의해 쓰여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팩션의 허구성은 ‘과거’라는 원본과의 ‘유사성’에 얽매이지 않고 ‘상사성’을 추구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으며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를 재구성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로서 인식될 수 있다.
〈제시문1〉의 내러티브는 이야기형식을 통해 사건이나 현상의 상호관계를 전달하는 역사서술 방식으로 팩션(faction)도 내러티브의 한 장르라 볼 수 있다. 팩션은 역사적 사실에 플롯(plot)를 더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인물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해준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역사적 사건의 흐름과 연속적인 상호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사를 지루한 학문이 아닌 즐기는 문화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실제의 사건들을 소재로 삼았다는 측면에서 감동과 현실감,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역사적 인물의 갈등상황 및 심리상태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 인식에 도움이 된다.
팩션은 사실을 통한 허구를 공공연하게 내세운다는 측면에서 역사인식에 왜곡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 자체에 몰입하면 내용에 대한 비판적 해석보다는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맹목적으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여 본다면 팩션 속에 표현된 구체적 사실들은 역사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에 역사 인식에 도움이 된다. 또한 현재의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역사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려는 대중들의 비판적 의식과 함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사전검토와 고증작업이 다양한 사료를 토대로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면 팩션은 역사왜곡 문제에서 벗어나 역사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다. 정영은(군산상고 1학년)
2. 교사총평
이번 논제는 ‘팩션(faction), 역사의 대중화인가 역사인식의 왜곡인가’ 로 〈제시문2,3〉의 관점을 분석하고, 〈제시문1〉을 토대로 팩션이 역사인식에 미치는 긍정적 기능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독해력-
〈제시문1〉은 역사 내러티브의 개념과 특징, 〈제시문2〉는 팩션의 허구성이 지니는 문제점, 〈제시문3〉은 현재적 관점에서 본 팩션의 가능성이다.
정영은 학생은 〈제시문1〉를 토대로 팩션을 내러티브의 한 장르로서 파악하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으며 〈제시문2〉는 팩션(faction)의 허구성으로 인한 역사왜곡 문제, 〈제시문3〉은 현재시점에서의 역사의 재구성으로 요약하며 상반되는 두 관점을 잘 분석하였다.
-논리력-
정영은 학생은 팩션이 내러티브와 같은 유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며 팩션의 허구성으로 인한 문제는 대중들의 비판적 해석과 사료를 토대로 한 검증작업을 통해 보완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번 논제의 핵심은 〈제시문2〉를 통해 팩션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제시문1〉에서 차용할 수 있는 팩션의 유용성을 찾아 〈제시문3〉의 관점에서 논지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영은 학생은 제시문의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잘 제시하였다.
-표현력-
정영은 학생은 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두 가지를 요구사항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구체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문단에서는 팩션의 보완방법으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비판적 의식 외에도 사료를 통한 철저한 검증방안을 추가로 제시하며 설득력을 높였다. 다소 아쉬운 부분은 〈제시문1〉의 내용을 토대로 팩션이 어떻게 내러티브의 한 장르라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팩션과 내러티브의 공통요소를 제시하며 논지를 전개했다면 더 논리적이 글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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