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남상일씨(36). 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팬 카페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그는 지난해 초 10년 동안 몸담았던 국립창극단을 나왔다. 국악대중화를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라고 했다. 프리랜서(?)가 된 후 그의 활동은 더 활발해져 종횡무진, 무대의 경계는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수많은 무대가 그를 찾고,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이 그를 앞세웠다. 그의 이름에 ‘만능’ ‘재주꾼’ ‘국악계의 싸이’ 등의 별칭이 붙었다. 대중들은 환호했으나 명창으로 성장을 기대했던 국악계에서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도제식 교육의 질서가 여전히 확고한 판소리 판에서 보자면 그는 여지없이 이단아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계와 우려에 마음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양한 무대에 화답하고, 다양한 장르와 결탁(?) 했으며 대중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몸을 낮추어 다가갔다.
소리꾼 남상일의 길은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인터뷰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은 분주했다. 11월에는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는 그를 12월 첫날 서울 예술의전당 커피숍에서 만났다. 서른 중반을 넘겼는데도 얼굴에 장난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이 남아 있다.
“이제 명창이 되려는 꿈은 접었느냐”고 물었더니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금세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자면 저는 명창이 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명창’의 기준이 오늘과 같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제가 소리를 하고 있는 한 시대와 소통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거든요. 그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명창이라면 제 자리는 아닌 것 같아요.”
그는 국악, 그중에서도 판소리의 대중화를 꿈꾼다. 그는 갈 길이 멀지만 자신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30대를 이 길 위에 온전히 놓은 이유다.
-하루도 쉴 날 없이 공연과 강연이 이어지면 소리공부할 시간이 없겠군요. 소리꾼으로서는 조바심이 생길 법 하겠는데요.
“공연도 그렇지만 요즈음엔 행사나 특강에 초대되는 일이 많아요. 지칠 정도로 일상이 바쁘긴 한데 그렇다고 소리공부를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연이나 특강 준비과정이 소리 공부거든요.”
-특강이 부쩍 많아졌다고 하시는데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판소리 이야기죠. 우리 소리에 관심이 많아진 것은 분명한데 여전히 판소리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인식을 깨고 싶어서 우리 소리를 재미있게 흥겹게 들려주고 이야기 하는 거죠.“
-관객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제가 어쨌든 방송에 자주 나오니까 일단은 친근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보다 소리도 잘하고 멋진 분들이 적지 않지만 제가 하는 이야기나 소리는 그 친근감 덕분에 훨씬 더 흡인력이 큰 것 같더라고요. 그럴 때는 방송 출연이 국악대중화를 위해서 의미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죠.”
-작년 초에 국립창극단을 그만두었는데, 활동은 기대했던 만큼 이루어지고 있나요.
“넘치고 있죠.(웃음) ‘물들어올 때 배 띄우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금이 제게는 그 때인 것 같아요. 30대 소리꾼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여유로워질 겨를이 없어져요.”
-국립창극단에서는 작품마다 주인공을 도맡을 정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만두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돌아보니 단원 생활이 어느새 10년이 되었더라고요. 창극단 활동도 좋지만 제가 추구하는 길을 함께 병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외부 일이 많아지면서 제 활동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개인활동에 대한 비판도 있어서 더 이상 직장에 누가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또 한쪽을 놓아야 그 한편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컸고요.”
-남 대표의 활동을 둘러보니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시사난타라는 방송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더군요. 방송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고등학교 때 방송 고정으로 처음 출연했는데 대학 시절 국악프로그램 진행과 공연 등으로 출연이 잦아졌어요. 그렇다보니 시사뉴스 프로그램과 인연이 닿았는데 개인적으로도 재미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판소리로 세태를 풍자하는 코너였는데, 시대 상황이 판소리 사설이 만들어진 세태와 어쩌면 그렇게 닮아있는지 저도 놀랐다니까요.”
-대본도 직접 썼나요.
“주제를 작가가 알려주면 판소리에서 맞는 대목을 제가 골라서 전해주는 방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딱딱 들어맞는 대목들이 있는지…. 치열하게 시대를 통찰해낸 판소리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였어요. 공부가 많이 됐죠.”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국악인 남상일에 대한 인지도가 더 높아졌는데 그럴수록 국악계의 우려는 더 높아지는 것 아닌가요. 좋은 재목 잃은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도 있던데요.
“애정 있는 분들의 조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잘 새기고 있습니다. 더러는 좀 억울한 비난도 있지만 제가 소리꾼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소리꾼이 되기 위한 길이라고 믿고 선택한 것이니 우려나 비난까지도 감수해야겠다는 마음이에요.”
-애니메이션 더빙 작업에도 참여했던데요.
“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라는 작품인데 판소리는 이 작품에서 소설이 가진 해학을 재현해내죠. 도창과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었어요. 다른 장르를 통해 판소리를 알릴 수 있으니 그 역시 좋은 기회죠.”
-이야기를 듣다보니 지금 실천하는 작업의 중심이 온전히 판소리에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지금까지 완창회를 한 번도 안하셨다면서요.
“완창을 못해서는 아니고요. 반창은 여러 번 했는데….(웃음) 작년 제야에도 안숙선 선생님과 중앙대 한승석 선생님과 수궁가 완창을 나누어서 했어요. 이번 주말에도 내년에 프랑스 공연을 앞두고 안숙선 선생님 모시고 수궁가를 공연합니다.”
-판소리판의 질서로 보아서는 완창회의 비중이 크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저는 완창무대가 갖는 의미를 크게 두고 있지 않아요. 많은 선생님들이 완창이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이고 이 과정을 통해서 한 단계 성숙해진다고 말씀하시죠. 맞는 말씀인데 제가 생각할 때는 완창이 의미는 있지만 짧은 소리라도 대중들을 감동시키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예전에 조상현 선생님도 5분짜리 10분짜리 소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문화재 이수나 전수에도 관심이 없었겠군요.
“오래전부터 그런 부분에는 관심도 없고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능력도 그렇고요. 또 소리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제 나름의 상처도 안았고. 그래서 독립군처럼 소리 공부하는 방식을 혼자서 터득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제가 소리꾼으로서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도전하는 바탕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안숙선 명창과는 특별한 사제지간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면서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입시때 선생님이 면접을 보셨는데 제게 소리 말고 다른 것 뭘 할 줄 아느냐고 물으셨어요. 가야금도 하고 춤도 춘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춤을 추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음악도 없는데 어떻게 춥니까’했더니 ‘내가 장단 쳐주마’하셔서 춤을 췄죠. 입시인데도 정말 즐거웠어요. 운 좋게 선생님 제자가 되었죠. 적벽가와 수궁가를 선생님으로부터 2년씩에 걸쳐 받았습니다.”
-선생님을 각별히 존경하는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선생님은 다른 분들과 많이 다르시더라고요. 늘 창극에 대해 판소리에 대해 고민하시거든요. 당장 개인적인 사사로운 고민이 아니라 우리 음악의 큰길을 고민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런 부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남대표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조언을 해주십니까.
“걱정이 많으실겁니다. 주위에서 많은 소리를 들으실테니까요. 그래도 정작 제게는 말씀을 아끼시지요. 그래서 저는 제자를 믿고 ‘너 하는데 까지 해보라’는 가르침을 주시는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용기를 낼 수 있고요. 한 가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이어가는 이 작업이 판소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고, 이 길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겁니다.”
-요즈음 이루어지는 창작판소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딱히 창작 판소리를 즐겨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아닌데, 분명한 것은 창작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판소리 창작도 결국 정통판소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아예 음악적 고유한 틀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저도 가끔 작창을 의뢰를 받는데, 작업을 하다보면 정통판소리의 선율을 그대로 따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저는 창작판소리도 정통판소리의 선율을 잘 지키면서 시대적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통판소리가 가진 요소를 그 안에 다 녹여서 제대로 살려낼 수 있어야 좋은 창작판소리라고 할 수 있겠죠.”
-남대표가 만든 창작판소리 ‘노총각 거시기가’는 많이 알려져 있던데요.
“무대에서는 정통판소리를 주로 많이 하는데 제가 드물게 작업 한 것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창작판소리로는 유일하게 국악관현악곡으로 편곡 됐어요. 그 덕분에 전국의 많은 관현악단과 협연을 해봤습니다. 호응도 높고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중심에 두는 것은 역시 정통판소리예요.”
-즐겨 부르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적벽가를 제일 좋아하고 즐깁니다. 박봉술 바디를 안숙선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는데 제 소리와 잘 맞는 것 같아요.”
-남대표의 소리 특징이 있던데요. 다른 소리꾼에 비해 소리가 맑고 깨끗한데다 상청이 강하고…. 근데 소리꾼으로서는 거친 목이 더 환영받지 않나요.
“제 소리의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합니다. 웅장함과 힘이 부족하죠. 소리꾼에게는 몸이 악기인데 몸집이 작으니 그런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다행히 요즈음은 음향이 좋아서 제 소리도 살 수 있게 됐죠.(웃음)”
-소리를 해오면서 위기는 없었나요.
“이상하게 변성기도 겪지 않았어요. 저는 소리할 때가 제일 편하고, 딱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거든요. 부모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죠.”
-이야기를 듣다보니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시련도 없었습니까.
“있었겠지만 지나고 나면 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제게 가장 큰 시련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충격이에요. 아버님은 양복점을 운영하시면서 제가 소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죠. 2006년에 갑자기 암이 발명했는데, 이미 늦었더라고요. 1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1주일 전까지 제가 하는 공연에 늘 동행하셨어요. 아버님 항암제는 저였거든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그런 질문이 제일 난감한데, 언제부터인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 철학이 되었어요. 아마도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만 세상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얻은 생각일겁니다. 그래도 굳이 갖고 있는 뜻이 있다면 나이가 들면 좋은 창극을 만들 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국악스타를 만들어내는 일에도 앞장서고 싶어요. 지금 제가 하는 이 다양한 일이 바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남상일씨는 전주 출생, 국악 신동서 '국악계 싸이'로
남상일씨는 올해 서른여섯 살, 젊은 국악인이다.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예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본격적인 소리 공부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시작했지만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장난감보다 TV에서 나오는 우리소리 우리가락을 더 좋아해 ‘열광(?)하는 특별한 아이였다.
까닭 없이 울다가도 우리 소리가 나오면 울음을 그치고 따라하는 아들을 눈여겨 본 아버지는 아이의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와 편지를 방송에 나오는 조상현 명창에게 보냈다. 뜻밖에도 명창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무릎장단에 맞춘 ‘사랑가’와 ‘이별가’를 녹음한 테이프와 ‘이대로 부르게 하라’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 테이프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소리를 익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전주의 조소녀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웠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소리 공부가 재미있었다.
타고난 소리에 기질이 다분한 남상일은 어느 사이에 국악계가 주목하는 국악신동이 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그에게 첫 시련이 닥쳤다. 국악경연대회 참여를 둘러싸고 뜻밖의 오해와 소문에 휩싸이면서 혼자 소리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지만 꿋꿋이 버텨냈다. 그때부터 독립군처럼 소리 공부를 했다. 전주예고에 들어가서는 학교의 자랑이 됐다. 동아콩쿨 1등 입상을 비롯해 각 대회를 휩쓸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존경하는 스승’ 안숙선 명창을 만났다. 국악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주목한 국악 방송 프로듀서들이 그를 불렀다. ‘시사난타’를 비롯해 시대의 언어를 판소리로 담아내는 시사방송 프로그램까지 가세해 그를 끌어들였다. 빼어난 판소리 실력에 입담 좋고 청중을 끌어들이는 흡인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는 길지 않은 동안에 국악스타로 섰다. 2003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10년 동안 단원으로 지내면서도 작품마다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기쁨을 안았다. 그러나 국악 대중화를 위한 활동에 마음을 두고 있던 그는 창극단원으로서의 활동과 외부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10년 만에 사표를 냈다. 다양한 형식의 공연과 강연, 축제와 행사의 초청 등이 이어지면서 그의 실험은 날개를 달았다. 가는 곳마다 환호를 받았으며 ‘국악계의 싸이’라는 별칭이 주어질 정도로 많은 대중들을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창 재목’의 외도(?)에 염려와 비판이 쏟아졌다. 그래도 꿋꿋이 버티며 ‘남상일 100분쇼’로 최고가 국악콘서트를 열어 화제를 모으고 다양한 장르의 무대와의 협업으로 국악 대중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판소리 마니아를 위한 완창회보다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재밌는 국악콘서트를 많이 열고 싶다는 그는 30대에 즐길 수 있는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생각이다. 민속악연주단체인 ‘수리’대표와 젊은 소리꾼들이 주축이 된 ‘우리창극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전국에서 그를 찾는 무대가 많아 휴일 없는 강행군을 하고 있지만 내년 2월에는 ‘남상일 100분쇼’를 다시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KBS국악대상(2012)과 한국방송대상 문화예술인상(2012)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해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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