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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복지병원 안득수 의무원장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 이해하면 삶은 더 소중해져"

▲ 호스피스 활동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내과전문의 안득수 박사는“죽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면 삶이 훨씬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친 안 원장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바오로복지병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을 봤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환자와 가족들에게 닥친 임종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영화촬영을 허락한 임종환자들은 ‘남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내어주었단다. 그들이 남겨준 선물로 가슴 먹먹해진 시간은 길게 갔다.

 

생각하는 일조차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왜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불편해하는지 궁금했다.

 

호스피스 활동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내과전문의 안득수 박사(76, 성바오로복지병원 의무원장)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안 원장은 인터뷰를 꺼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시간을 내주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눈이 내렸다. 며칠 전부터 하루건너 눈이 내린 참이었다. 완주군 소양면 성바오로복지병원으로 가는 길, 눈을 뒤집어 쓴 하얀 산들이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동안 20분 남짓한 거리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아스팔트길이 얼어붙은 탓이었다.

 

안원장이 일주일에 이틀 나가 근무하는 성바오로복지병원은 요양병원이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많다. 그는 이곳에서 환자들의 진료와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호스피스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5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임종을 맞았다.

 

인터뷰 역시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환자들의 죽음을 지켰던 시간이 쉬웠을 리 없지만 안 원장은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축복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애써 피하려고 하죠. 입 밖으로 꺼내는 일조차 꺼립니다. 왠지 불운해질 것 같은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데, 삶의 그 끝에 죽음이 있어요. ‘죽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삶이 더 소중해집니다. 가치 있는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어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죽음’을 우리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다. 이런 마음을 읽었을까. 안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죽음을 알면 행복해집니다.’

 

-이곳은 환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

 

“많지 않아요. 한 50명 쯤 될 겁니다.”

 

-요양병원이지만 아무래도 임종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 많겠군요.

 

“치료와 요양을 위해 들어온 분들도 있지만 임종을 맞는 분들이 많습니다.”

 

-치료를 받아 완쾌되기를 바라는 환자들과 어쩔 수 없이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 사이에서 원장님 역할이 특별할 것 같습니다.

 

“환자들의 대부분은 임종을 맞게 된 사람들이어서 역할이 특별히 다를 것은 없습니다. 물리적 고통을 덜어주면서 조금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죠.”

 

-임종을 편안하게 맞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특별한 과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원장님이 생각하시는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죠.”

 

-환자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에요. 그래서 호스피스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이 병원에 온 것이 2009년인데, 그동안 120명 쯤 임종을 본 것 같아요. 그 분들 중 절반 정도는 제가 손을 잡고 임종의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대부분이 편안하게 가셨어요.”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런 환자들은 어떻게 돌보십니까.

 

“이곳에 들어온 분들은 대부분이 더 이상 치료 받는 일이 의미 없게 된 환자들입니다. 처음 환자와 마주할 때는 환자가 느끼는 물리적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우선이죠. 그런데 이런 환자들은 물리적 고통 못지 않게 불면증이나 괴로움을 안게 됩니다. 물리적 고통도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그 정도가 더 심해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는 특히 그렇죠.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신뢰를 심리학적 용어로 라포르(Rapport)라고 하는데, 그것이 형성되지 않으면 호스피스도 의미 없게 되어버려요.”

 

-단순히 의사로서 치료해주는 것만으로도 라포르가 형성될까요.

 

“그렇진 않죠. 환자가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는구나’라는 마음을 가져야 가능하겠죠.”

 

-원장님께서는 어떻게 환자들의 마음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우선은 내 마음을 온전히 환자에게 가게 해야 해요. 이를테면 노인 환자들은 대변을 못 보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내 손가락으로 파내기도 합니다. 환자들이 그런 과정을 갖고 나면 자연스럽게 라포르가 형성되더라고요.”

 

-의사로서의 치료 뿐 아니라 간병일 까지 나누시는군요.

 

“간호사들이나 간병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필요하면 해야죠.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니 별 거부감 없이 하게 되더라고요.”

 

-의료기술로 해결 되지 않는 고통을 계속 호소할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자신의 고통이 덜어지지 않으면 라포르가 형성되기 어렵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고통을 제대로 덜어주지 못하면 어렵겠죠. 치료를 하는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몸에 생기는 물리적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적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예요. 이 두 가지가 잘 해결되어야 진정한 라포르가 형성되죠.”

 

-정신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중요하겠군요.

 

“라포르가 이루어지면 환자는 자신의 고민을 다 털어놓게 됩니다. 고백하는 것이죠.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고백을 듣기도 합니다. 가족 사이의 미움과 갈등은 물론이고,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감춰놓았던 1급 비밀까지 듣게 되요.(웃음) 환자들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인데, 저는 제 신앙으로 얻은 답을 전해줍니다. 내 의견이지만, 환자 대부분이 그 답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죠. 그런 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게 되더군요.”

 

-끝까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끝까지 간직하고 가려는 사람도 있어요. 이생에 대한 집착을 끝내 털어내지 못하고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은 아예 안하려는 분들이죠.”

 

-임종 순간을 지킨 환자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환자들의 순간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가능하면 제가 치료한 환자들의 임종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환자의 최후 숨(last breath)을 내가 지킬 수 있기를 늘 기도하지요. 인간의 삶을 마무리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제가 병원에 없으면 연락이 오는데, 그럴때는 어느 시간이든 달려옵니다. 그래서 제 운전 실력이 좋아졌습니다.”

 

-원장님은 천주교 신자지만 임종 환자들이 모두 신앙을 갖고 있진 않죠.

 

“이곳에 오시는 분들 중 60%정도는 천주교 신자인데,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이라도 저는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과 화해하고 편안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진심을 담는 기도에 많은 분들이 감응해주십니다.”

 

-편안하게 임종을 맞지 못한 분들을 보낼 때는 안타깝겠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일찌감치 부터 희망을 포기하고 불안해하다 임종을 맞습니다. 죽으면 내가 어떻게 될까하는 두려움으로 불가항력적인 삶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거든요.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죠.”

 

-결국 편안한 죽음이란 ‘세상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세상과 화해하면 모든 것이 풀어지죠. 결국 사랑의 문제인데 살아오면서 쌓았던 갈등 미움, 욕심을 털고 나면 기쁨과 사랑으로 임종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특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임종 환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분들이 마음에 남아있지만 몇몇 분은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폐암으로 임종을 맞는 분이 있었는데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혼자 지내다가 병을 얻었는데, 늘 지갑에 20만 원 정도의 현금을 갖고 있었어요. 함께 식사도 하는 친한 사이였는데, 하루는 자기가 호주머니에 항상 칼을 넣고 다닌다고 털어놓는거예요. 통증이 오면 ‘내가 이러다가 비참하게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언제라도 그런 때가 오면 조용하게 산으로 가서 마감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대화하면서 편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죠. 결국 칼을 돌려 받았죠. 6개월 정도 투병하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임종을 지켰습니다. 가족들과 화해하고 편하게 가셨는데, 그 후에 가족들이 제게 적지 않은 돈을 가져왔어요. 그 분 유언이었답니다. 병원 후원금으로 쓰였죠.”

 

-어린 환자들의 임종은 더 가슴 아프시겠어요.

 

“열여덟 살 소녀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습니다. 한번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원장님께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결국 약속을 못 지켰는데 그나마 임종은 편안하게 맞아 외로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다해도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다보면 심적 고통이 클 것 같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어떤 것인가요.

 

“드문 경우이긴한데 끝까지 죽는 것을 대비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치유를 계속 희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다는 것을 인정 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바람이 워낙 크다보니 임종의 순간까지 편안함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죠.”

 

- ‘죽음의 질’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죽음 알림 주간’이 있고, 데쓰 카페(Death Cafe)가 운영된다고 하던데요.

 

“죽음의 질(생애 말기 치료) 1위 국가가 영국입니다. 어느 자료를 보니 한국은 32위더군요. 영국에서는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활발합니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준비를 정책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장님께서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까.

 

“의사에는 네 가지 종류의 의사가 있습니다. 종기 고치는 의사, 병 고치는 의사, 의료기술이 좋은 의사 그리고 마음을 고치는 의사예요. 의료기술이 빼어난 의사를 우리는 명의(名醫)라고 하죠. 마음까지 고치는 의사는 심의(心醫)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심의는 명의보다 더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는 않죠. 누구나 명의와 심의가 되기를 원할 겁니다. 저 또한 바람은 컸지만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

 

-지금 하시는 일에 만족하십니까.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요. 통념으로 보자면 나는 이제 인생의 절정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지요. 의료인으로서도 그렇고. 의사의 길에 들어서면서 인턴으로 출발했다가 지금 다시 인턴의사가 된 것 같아요. 육체적 고통이 가장 절정에 이르는 임종 시간이 대략 3시간인데, 그 시간을 함께 하고 나면 눈에 핏줄이 터지기도 하고, 탈진해서 걸을 기력도 없는 때가 많아요. 그래도 되돌아보면 그 순간이 참으로 축복받은 시간이었다는 알게 되는데 그렇게 임종을 잘하고 나면 보람과 기쁨이 또 새로운 힘이 됩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인터뷰는 조심스러웠다. 무겁고 진지한 시간을 예상했던 것도 주제의 버거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볍진 않았으나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다. 안원장의 편안하고 따뜻한 웃음과 친밀한 화법 덕분이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면 삶이 훨씬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죽음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생각하며 살다보면 성찰의 시간이 많아지거든요.”

 

어수선한 연말, 한해를 보내며 ‘죽음’의 한편을 알게 됐다. 귀한 선물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안득수 원장은 임종 맞은 환자들과 마음 교류하는 '호스피스 의사'

안득수 원장은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농촌 살림으로는 어려움 없이 보냈지만 아버지가 수리조합장에 출마하면서 가산이 줄어 금세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됐다. 부모님은 장남인 그가 중학생이 되었을 즈음 의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별한(?) 고민 없이 전남대 의과대학에 들어가 내과전문의가 됐다. 고학으로 학비를 벌어야했던 대학시절, 고단한 생활과 마음의 고통을 의지할 곳 없을 때 천주교를 만나 신자가 되었다. 부모님 뜻에 따라 의사가 되었지만 평생 안고 살았던 위장병을 치료하고 ‘아들 덕분에 병이 나았다’며 기뻐하는 어머니를 보며 ‘의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의사 생활을 전주에서 시작하면서 전주사람이 됐다. 성모병원과 전북도립병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전북대 의과대학 교수와 전북대 병원장을 지내고 2004년 은퇴했다. 2007년부터 2년 남짓 개인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경제적인 자유로움을 가족들에게 안길 수 있었지만 어느 날 마음속에 갖고 있던 일을 늦기 전에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젊은 시절, 후배의 갑작스런 죽음을 마주하며 죽기 전에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고 사표를 내고 성바오로복지병원으로 왔다. 2009년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선택을 반대했던 아내도 뜻을 함께 해주었다. 학위를 끝내고 개업할 기회가 왔을 때도 학교에 남기를 권했던 아내 덕분에 지금껏 경제적인 여건에 마음 쓰지 않고 의사로서 행복한 삶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인 호스피스 활동이 시작됐다. 임종환자를 만났던 초기, 마음을 열지 않는 환자들을 보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의사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답을 찾았다. 성바오로복지병원에서 일한지 5년, 100명이 넘는 임종환자들이 그를 찾아 보살핌을 받았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말하는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알게 되면 삶을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잘사는 것(well-being) 못지 않게 잘 죽는 것(well-dying)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1986년 천주교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 회장으로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후 평신도 협의회 총회장·전동성당 사목회장을 역임했으며 지금도 새벽 다섯 시 반, 전동성당 첫 번째 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1990년대 초, 고즈넉해서 좋았던 전주 한옥마을에 집을 지어 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한옥마을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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