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뜻이 가장 큰 재산이고, 좋은 연주자를 키워내는 일과 클래식 음악을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뜻을 세우면 좌고우면 하지 않는 은교수의 성품을 아는 지인들까지도 ‘가능한 일일까’ 우려가 높았다. 척박하기만한 지역 문화계의 풍토를 잘 아는 사람들일 수록 ‘무리’라고 조언했다.
2009년 4월 18일, ‘클나무필하모닉오케스트라’란 이름의 민간 오케스트라가 클래식 팬들을 초대했다. 지휘는 클래식 대중화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금난새 감독. 테너 김남두와 메조소프라노 김정화, 바이올리니스트 전강호가 협연한 무대에 관객들은 환호했고, 지역 문화계는 격려를 보냈다. 은교수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월급 주는 민간오케스트라의 첫 걸음이었다. 그 후 6년, 그의 꿈과 희망은 채워지고 있을까.
전주대 은희천 교수(65)를 다시 만났다. 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은교수는 온통 은색인 머리카락이 무색할 정도로 열정과 도전 의지가 여전히 뜨거웠다. 어떤 힘이 이 은발의 연주자를 늘 새로운 도전으로 몰고 가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꿈꾸고 실천하며 살아가지 않나요. 사람마다 다를 뿐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닐 겁니다. 내게는 그 일이 클래식음악을 향한 일인 것이죠.”
내년 초 정년퇴임을 맞는 그는 올해 추스르고 실천해야 할 일이 많다. 가뜩이나 정해진 스케줄로 하루가 빠듯한 그는 덕분에 마음이 더 급해진다고 했다. 돌아보면 그동안 쏟았던 열정이 허허로울 정도로 보람보다 아쉬움이 크게 와 닿지만 지역 클래식 음악 발전에 작은 기반이라도 마련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그의 말처럼 희미하지 않다. 흔적은 뚜렷하고 오래된 시간의 결실은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벌써 은퇴하신다니 세월이 참 빠르군요. 늘 청년이신 것 같았는데요.
“시간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한 것이 75년부터이니 40년, 전임강사가 된 것이 83년이니 33년이나 되었어요.(웃음)”
-지역의 대표적 실내악단인 글로리아스트링오케스트라도 교수님이 만드셨죠.
“글로리아는 제 젊은 시절의 열정과 꿈이 고스란히 놓여있는 연주단입니다. 후배 제자들과 마음을 한데 모아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연주 활동을 했어요. 지금은 무대에 함께 서지 않지만 애정과 관심이 깊습니다.”
-글로리아는 30여년 역사로도 그렇고 활동으로도 지역 클래식 음악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한 일이죠. 전주라는 곳이 클래식 연주 활동을 의욕적으로 해나가기에는 열악한 환경인데 글로리아는 흔들리지 않고 한 길로 달려온 단체예요. 25주년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했었는데 지방 실내악단으로는 시도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죠. 그때 객석이 2000석이나 되었는데 거의 차서 모두들 놀라워했어요. 생각해보니 그런 시간들이 다 기쁨이고 보람이군요.”
-글로리아를 만들었을 때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글로리아를 81년에 창단했는데 그때 군산대 전북대 전주대에 출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공하는 아이들이 실내악을 공부할 기회가 없더라고요. 현악 앙상블을 공부시켜야겠다 싶어서 제자들 중심으로 연습을 시켰는데 그것이 토대가 되어 실내악단을 만들게 됐죠. 처음에는 우리 집 아파트에서 접이의자 놓고 연습을 했어요. 나중에 노송성당 교육관을 빌려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이름을 글로리아로 붙이게 됐습니다.”
-전주시향 악장으로 활동하시면서는 초창기 연주단체의 체계를 잡아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환경이 참 열악했죠.
“그때 광주시향에서 1년 동안 악장대행을 맡고 있었는데 전주시향에서 불렀어요. 와서 보니 연주활동만 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많더군요. 그래도 관립이니 서서히 체계를 잡을 수 있게 되었죠. 전주시향 악장으로 20여년 활동했는데 우여곡절과 부침이 많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살아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교수님 활동에는 어김없이 70년대부터 이어온 지역의 클래식 음악 운동이 앞세워집니다.
“70년대부터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어 운영했었거든요. 패기만만한 시절이었죠. 겁도 없고. 처음에는 전공자들이 거의 없어 음악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됐죠.”
-그때가 전주 클래식 음악 저변확대의 싹을 틔운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끌었지 않습니까.
“74년으로 기억하는데 군대 제대하고 돌아와서 바로 고전음악회감상회를 만들었거든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주일에 한번 모임을 가졌죠. 가톨릭 센터 사무실을 빌려 썼는데 처음에는 회비를 받다가 나중에 대관료 없이 공짜로 사용하게 해주었어요. 성실함을 높이 샀죠.(웃음) 모임 횟수가 900회를 훨씬 넘었으니 역사가 꽤 깁니다.”
-지금은 활동 하지 않나요.
“감상회는 중단되었어요. 고전음악감상회가 아니어도 좋은 음악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오디오가 나오고 방송국의 FM음악 방송이 자리를 잡게 되니 회원들의 충성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추억이 많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회원들의 열정이 대단했어요. 그때만 해도 오디오가 귀한 시절이어서 매주 감상회가 있을 때면 회원이 집에 있는 오디오를 자전거에 싣고 와서 들었어요. 그러니 그 집에서는 좋아할 리가 없었겠죠. 나중에 별표 전축이 나왔을 때 오디오를 처음 마련했어요.”
-그런 열정이 있어 지역에 클래식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겁니다. 전주시향을 그만두고, 글로리아도 연주를 중단하셨는데 왜 다시 민간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 지역 출신 연주자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환경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어요. 그때 전주시향이 8년 동안 단원을 한명도 뽑지 않았을 때거든요. 해마다 예산이 증액되어야 현실적인 운영이 가능한데 예산이 움직이지 않으니 기존 단원들의 인건비를 그것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인것이죠. 젊은 연주자들은 갈 자리가 없으니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그런 악순환이 지속되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이러다 쓸 만한 연주자를 다 뺏기겠더라고요. 예술은 재능 있는 인력이 있어야 꽃을 피웁니다. 그래야 대학도 유지되고 교향악단의 수준도 향상될 수 있죠. 도시의 문화적 격도 따라서 높아지게 되고요.”
-주위에서는 어떤 반응이었나요.
“용기를 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안 될 일이라고 했죠. 아마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편에서는 개인적인 목적이 따로 있는 것으로 오해도 했어요. 그래도 하고 싶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 ‘월급 주는’ 오케스트라의 약속은 지켜졌습니까.
“클나무 전신이 전북아트필하모닉오케스트라인데 그때는 월급이 없었어요. 클나무로 이름을 붙여 창단하면서 기본 월급과 연주수당을 주었죠. 사회적 기업이 되고 자치단체의 일자리창출 지원을 받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어요. 올해 사회적기업의 지원이 끝나게 된다니 걱정이 크죠. 연주활동만으로 그 수준을 지키기 어렵거든요.”
-음악감독으로 여전히 활동하십니까.
“지난해 초에 그만두고 독립시켰습니다. 오케스트라 스스로 연주회를 기획하면서 운영해나가는 체제로 바꾸었죠. 걱정했는데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클나무 연습을 위해 건물도 새로 지었죠.
“제 오래된 꿈이었어요. 오케스트라 연습실과 공연장, 실내악 연주실, 음악에 관한 책과 음반 등을 파는 가게 등 한곳에서 음악에 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꼭 마련하고 싶었거든요. 아직은 능력이 없어서 역부족 이예요. 큰 부담을 안게 되긴 했지만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큰 꿈을 하나 이룬 셈이죠.”
-작년에 그만두셨어도 5년 동안 클나무를 운영해오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클나무 활동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내는 일도 어려운 일이고요. 객석을 채우는 일도 큰 숙제여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죠. ‘하나임오케스트라’인데 취미로 연주활동을 하면서 그들 스스로 관객도 되어주는 선순환의 환경을 위한 것이었어요. 내부적으로 크고 작은 부침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다섯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가졌고 지속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정기적인 음악 감상회도 운영하고 있고요.”
-클나무 창단 연주 지휘를 금난새 감독이 맡았었는데 인연이 있었습니까.
“창단연주를 앞두고 찾아가 처음 만났어요. ‘전주에 클나무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금선생이 지휘를 맡아주면 잘 풀려갈 것 같다’고 했죠. 금난새 선생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상징적인 존재여서 클나무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객석을 채우는데도 아주 효과적인 선택이었어요. 기대만큼 성과가 있었습니다.(웃음)”
-교류는 지속되고 있습니까. 클나무에 대한 기대는 어떤가요.
“높이 평가해주십니다. 작년에 오셨을 때는 ‘클나무 오케스트라는 이제 큰 나무 오케스트라다. 만약 이런 단체가 서울에 있었다면 훨씬 대단한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격려하셨어요. 저와 뜻을 모아 민간오케스트라 활성화를 위한 전국오케스트라협의회도 만들었죠. 각 지역의 민간 오케스트라 12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창립할 때는 문광부의 지원도 이끌어내면서 민간오케스트라 발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어가고 싶었는데 기대만큼 활동이 따라주지는 못합니다.”
-클나무 연주무대는 늘 새롭고 활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대중과 만나려는 기획이 신선하더군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죠. 국악은 물론이고 대중가수들과 함께 하는 무대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공과가 다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민간오케스트라의 존속을 위해서는 기업의 후원이 필요한데 상황이 어떻습니까.
“지역 환경도 척박한데다 클래식음악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낮아서 기업 참여는 거의 기대하지 못합니다. 기업 메세나는 우리에게 멀기만 한 이야기죠. 사실 기업의 참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거든요. 작게라도 기업은 협찬하고, 오케스트라는 예술 활동을 제공하는 그런 관계가 확산되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꾸려오셨으니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년 은퇴 이후 다시 새롭게 준비하시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좋은 연주자를 찾아낼 수 있는 일을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클래식음악 대중화도 함께 이뤄갈 수 있는 일이죠. 스즈키 메소드 교육인데 바이올린을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하게 하는 문화를 확산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통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학원 같은 형식으로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통념으로는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음악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굳이 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예술의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클래식 음악은 인간의 감성을 깨워줍니다. 수백 년전의 작곡가가 만든 음악을 지금 이 시대에 들으면서 감동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장르라는 것이 증명되죠. 클래식 음악은 감정의 모든 표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쁨을 얻는데에만 주목하는 것 같아요. 기쁨 뿐 아니라 슬픔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아이들은 커서도 좋은 인격을 갖게 됩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려주면 감성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죠.”
은 교수의 대화는 직설적이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화법으로 때로는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순수함이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해진다. 그만의 미덕이기도 하다.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어 클래식 음악을 일상 속에 확산시키고, 실내악단을 창단해 연주자들의 역량을 키우고, 전주시향을 일구고, 민간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지역 클래식 음악의 텃밭을 일구어온 그의 음악 인생은 그가 쏟아온 열정 만큼 화려하진 않으나 살아 숨 쉬는 생생함과 예술적 품격으로 빛이 난다. 무엇보다도 지역 음악 현장에서 스스로 도전하고 부딪쳤던 40여년, 한결같았던 세월의 힘이 안겨준 결과다.
● 은희천 교수는 한번 뜻 세우면 실행하는 '클래식 전도사'
은희천 교수는 광주가 고향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직장을 전주로 옮기면서 전주 사람이 됐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일찍 클래식 음악을 만날 수 있었다. 클래식과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광주연주회를 갔을 때였는데 그 음악이 마음에 아주 깊게 남았다. 중학교 때부터 브라스밴드 활동을 하면서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아버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전주고 입시에 떨어지고 신흥고에 들어가면서 길이 바뀌었다. 아버지도 연주자가 되겠다는 뜻을 꺾진 않았지만 기대를 못 따라 주는 아들에게 실망해 대학 입시원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었다. 연세대에 다니던 시절에는 동료들과 토론하는 공부모임을 만들어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전주에 내려와 보니 전공자도 거의 없는데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노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74년쯤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었다. ‘가리방’ 등사기로 해설집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이 모임은 7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전주에 클래식 음악을 확산시키는 통로가 됐다. 이듬해부터 지역의 각 대학 음악과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교육자가 되니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 보였다. 글로리아스트링오케스트라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번 뜻을 세우면 실행하고야마는 품성으로 그는 늘 음악 현장의 중심에서 날선(?) 활동을 이어왔다. 전주대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 83년. 그는 학교에서는 좋은 교육자가 되고 싶었고, 연주자로서는 좋은 무대를 많이 열어 클래식 대중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클래식 음악 전도사’라는 별칭이 붙는다. 광주시향 악장 대행을 거쳐 전주시향 악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스스로의 단련을 위해 개인 연주회를 활발하게 열어왔다. 2009년에는 민간오케스트라 클나무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월급 주는 오케스트라’를 표방한 이 오케스트라는 5년 동안 그의 열정을 바탕으로 무리 없이 운영되어 왔으며 지난해 그로부터 독립한 후로도 고군분투, 지역의 척박한 문화 환경을 딛고 패기 있게 항해하고 있다. 내년 봄,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스즈키 메소드 바이올린 교육 현장에 나서는 일이다. 사회적 통념으로는 자존심과 권위를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좋은 연주자을 발견할 수 있고 클래식 음악 확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으로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좋은 연주자로 키워내는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을 제안하고 이끌어온 그는 어릴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어린이 교육에 마음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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