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라는 게 미리 경험할 수도 없는 거잖아. 인생의 반을 훌쩍 넘은 시점에 다들 처음으로 정년이라는 것을 맞는 셈이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류가 최근에 내놓은 〈55세부터 헬로라이프〉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은 중견가구점의 잘 나가는 세일즈맨이었다. 하지만 나이 들어 한직으로 밀려나자 58세에 조기퇴직을 신청한다. 어렵지 않게 재취업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웬걸,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직장생활 동안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거래처에 취직을 부탁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직함’이 없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한탄한다. 작가가 후기에서 말하듯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맞딱뜨리는 ‘불안한 초상’이다.
노후 준비 제대로 못하고 퇴직
고령화문제에서 일본을 뒤따르는 우리의 현주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년퇴직은 오랜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휴식의 월계관이 아니다.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지위 하락이라는 형벌로 다가오는 것이다.
요즘 내 주변에는 정년을 맞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어찌어찌 이모작에 성공한 사람도 있으나 대개는 백수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며 농담을 던지기도 하지만 어쩐지 공허하다. 아직도 부모봉양이나 자녀교육·취업·결혼 등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러니 자신의 노후준비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
저승사자만큼 꺼리는 정년이 꼭 필요할까. 정년제도는 독일 비스마르크 재상이 1889년 공무원의 정년을 65세로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청년들을 동원했다. 전쟁이 끝나고 징집된 젊은이의 처리가 문제였다. 자그만치 100만 명이 넘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일자리를 주어야 했다. 그래서 도입된 게 나이든 사람을 내보내는 정년제도였다. 이후 영국이 1908년 이를 도입했다. 미국은 1929년 경제대공황을 맞아 실업에 허덕이던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도입했다. 우리나라는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되면서 정년제도가 공식 도입되었다. 그러다 1970∼80년대 산업화와 IMF 외환위기를 넘기며 정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정년연장이나 폐지는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세계적 추세가 되었다. 미국은 1967년, 영국은 2011년 정년을 폐지했다. 일본은 2013년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했다. 우리나라도 2013년 4월 국회에서 ‘60세 정년법’이 통과돼 시행을 앞두고 있다. 나아가 정부는 공무원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방안(제3차 장년고용촉진기본계획)을 2017년부터 시범실시한 뒤, 2023년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년연장은 반발도 만만치 않다. 경제계와 청년세대들이 그러하다. 경제계는 장기불황에 짓눌린 기업들의 체력이 임금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볼멘소리다. 청년들 역시 일자리를 50∼60대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밥그릇을 둘러싼 세대갈등이다. 몇 년전 프랑스정부가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늦추려다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원상태로 돌린 것이 좋은 예다. 우리나라도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연애와 결혼, 출산 등을 미루는 ‘5포 세대’가 즐비하다. 하지만 정년연장과 청년 일자리는 관계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업종에 따라 다르긴 해도 청년실업은 경제상황과 IT 발달에 따른 고용없는 성장이 주원인이라는 것이다. 또 30∼40년 뒤에는 청년들도 정년연장의 혜택을 보게 된다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나이 기준 정년제도 또 다른 차별
우리나라도 장기적으로 정년폐지를 검토해야 한다. 그 전단계로 임금피크제 등 임금체계 개편과 최소 정년제도(65세)를 도입해야 한다. 나이를 기준으로 정년을 가르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