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경기도 파주의 한편, 황량한 땅위에 ‘출판도시’ 깃발을 든 출판인들이 모였다. 민주화의 열망이 솟구쳤던 시대. 말과 글이 곧 책이 되던 ‘책의 시대’였다. 첫 삽을 뜬지 27년. 황량했던 도시는 이제 책이란 옷을 입고 주목을 받는 출판도시가 됐다. 모든 가치는 공유할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시. 그 고난의 여정 중심에 출판인 이기웅 열화당 대표(75)가 있다. 올해로 27년. 30년 가까운 세월을 고군분투하면서 결국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를 만들어낸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출판도시의 역사가 됐다.
그를 만났다. 출판의 역사가 깊은 전주의 미래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었다. 조선시대 융성했던 전주의 출판문화 뿌리를 오늘에 되살릴 방법은 없을까. 기대는 빗겨갔다. 그는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 하는 대신 말과 글과 책의 참다운 가치를 이야기했다. 세상에 분별없이 넘쳐나는 말에 대한 비판은 단호하고 엄격했다. 도시를 만드는 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인터뷰는 파주 출판도시 열화당 그의 사무실에서 있었다.
-중국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심천의 ‘북시티’ 조성과 관계된 강연이 있었어요. 심천은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성장한 도시인데 중국의 4대도시로 꼽힐 정도로 성장했죠. 지금은 시진핑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심천 전해지구에 새로운 문화지구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북시티는 그 중심에 있는 프로젝트인데, 파주 출판단지가 매우 중요한 선례가 되거든요. 이번에 가서 보니 그들의 파워풀함이 놀랍더군요.”
-확실히 파주출판도시 조성 과정이 많은 도시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군요. ‘북시티’의 확산이 흥미롭습니다.
“바람직한 일이죠. 특히 심천에 조성하려고 하는 ‘북시티’는 가능성이 있어 보였어요. 지역에 문화인들도 많고 그 준비 작업이 아주 탄탄하게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파주에도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다녀갔는데 이런 교류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조언을 해주셨습니까.
“사실 전해지구에 출판 분야만 들어오는 것은 아녜요. 금융을 비롯해 각 분야가 다 들어오죠. 그 중 하나가 출판입니다. 규모로 따지자면 결코 대단하다고 볼 수 없지만 출판이 갖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출판은 각 분야에 스며있는 바탕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싶었습니다. 모든 분야가 스스로 정리하고 기록하고 프로모션도 해야 하고, 미디어를 통해서 모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시민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두 차례 강연했는데, 매우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이론으로는 배울 수 없는 실전의 귀중한 경험을 전수해주셨군요.
“주제가 ‘출판도시 27년의 역사를 말한다’였는데 그분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되었을 겁니다. 이번에 다녀오면서 국가 간 교류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한중우호나 교류를 많이 경험했지만 우리가 우위에 있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경우는 우리가 확실히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입장이었어요. 현장의 경험으로부터 증거들이 확실하니까요. 그래서인지 받아들이는 태도가 매우 숙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우도 극진했고요.(웃음)”
-파주에 출판도시 조성 작업을 시작한 것이 88년이었으니 30년이 되어가는군요.
“맞습니다. 그 이듬해인 89년에 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까요. 뜻을 함께 하는 출판인들이 모여서 추진했는데, 돌아보니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참 많습니다.”
-출판도시는 책의 시대를 상징하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얼마 전 그 과정을 기록한 세 번째 책을 펴내셨던데요. ‘출판도시를 향한 우리의 여정’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속력의 힘으로 질주하는 시대에 27년은 사실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압축성장의 가치에만 눈을 돌려온 시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속도전에 익숙한 현실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가치와 원칙을 지키면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뜻을 함께 하는 출판인들이 모여 이 일을 처음 도모할 때 세워놓은 가치와 그 가치를 지켜갈 원칙이 있었거든요.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원칙은 끊임없이 위협 받았죠. 그야말로 위기였는데 그럴 때 흔들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어떻게 그런 위기를 이겨내셨습니까.
“편한 길보다는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고민과 갈등이 깊어질 때면 어린 시절 어르신들이 주신 가르침과 책으로 배운 질서를 생각해냈어요. 어렸을 때부터 체득한 공동체 정신과 가치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대부 가옥으로 이름이 알려진 강릉의 선교장에서 나고 성장하셨습니다. 특별한 환경이었죠.
“선교장이라 이름 붙여진 공간 안에서 많은 친인척들이 함께 살았어요. 20가구가 넘었을 겁니다. 선교장에서는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곧 법이었어요. 옛날부터 내려오던 집안의 질서, 책의 질서, 말씀의 질서가 집안을 단속했습니다. 부잣집이었지만 개인은 돈이 없었어요. 학교 앞에 있는 사탕가게에서 사탕하나 제대로 사먹지 못할 정도였지요. 먹을 것 입을 것 다 갖추어 주는데 왜 다른 용도로 돈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불만이 많았어요. 그 덕분에 절제를 배웠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죠. 선교장의 공동체 생활로 공동의 가치,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예의와 본분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공동체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웃음)”
-선교장 안에 열화당이 있었죠. 그 시점으로부터 치자면 올해 열화당이 200주년을 맞는다고 들었습니다. 열화당의 역사가 흥미로운데요. ‘열화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책도 펴내셨죠.
“열화당은 선교장안의 책방이었어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책더미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었는지를 어른이 될 때까지 잘 몰랐어요. 책에 대한 깊은 사유가 부족해서였을 겁니다. 사실 우리 민족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지성인들이 나라를 통치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인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책의 가치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환경도 같은 연상에 있습니다. 우리 환경을 보세요. 빠르고 편리함만을 추구하면서 시간으로부터 시간을 죽여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잃는지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는 열화당’이란 화두는 제가 책을 만들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태생적 환경과 맞닿아 있습니다.”
-출판도시를 이끌어온 여정에도 사장님의 그런 신념과 철학이 스며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맞습니다. 출판도시 일을 해오면서 고독한 시간들이 많았어요. 초창기에는 출판단지안의 첫 건축물인 인포름에서 숙식을 하면서 일했습니다. 당시 이 건물은 허허 벌판에 외로운 배 같은 존재였어요. 그때 내 체온을 이 땅에 스미게 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밀림을 헤치는 사냥꾼처럼 일을 했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숙연한 생각을 많이 갖게 되었는데, 특히 우리 역사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인포름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면서 분단된 나라의 아픔을 절감했어요. 역사성에 천착하게 되면서 역사적 인물도 다시 보게 되었죠.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대마다 인물들이 많은데도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것을 잃어야했는가 궁금했습니다. 결국은 구슬이 꿰어지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 출판도시가 이런 저열한 부분을 극복하는 기지가 될 수 있기를 소망했어요. 단순히 ‘내 출판사나 잘 운영해보자’는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공유해야했습니다. 출판도시는 이미 집단화된 틀이었으니까요. 거대한 집단이 모였는데 공동성, 공동의 가치라는 깃발을 세우지 않고 개별의 깃발을 치켜들면 안 되는 일이었죠. ‘함께 치켜올리는 깃발’을 늘 생각했습니다.”
-출판도시 1단계에 이어 추진한 2단계도 마무리 단계라고 들었습니다. 2단계 주제인 ‘책과 영화’의 결합은 어떻게 추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영화를 2단계에 도입해야겠다고 했을 때 이견이 많았어요. 지금은 당연시하고 환영하는 일이 되었지만 상상력의 빈곤이랄까 책과 영화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당연시 하지 않는 당연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당연한 것을 배제하고 사는 졸렬한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죠.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고 식민지치하를 거치고,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상상력이 설자리가 없어진 것 같아요. 어쨌든 반대도 있었지만 2005년에 ‘책에서 피어난 꽃 영화’란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그때 기대 이상의 큰 호응이 있었어요. 사유의 폭을 넓히는 책의 세계는 다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많은 분들이 인식한 것 같습니다.”
-융합의 시대에 선견지명이 있었군요.(웃음)
“출판도시를 조성할 때도 출판사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분화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요. 분화가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제대로 된 분화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종합’을 염두에 두고 분화해야 하는데, 갈라서기만 한겁니다. 그러니 다 따로 놀게 되었지요. 2단계 조성하면서 영화를 합쳐놓으니 ‘융복합’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새로운 현상처럼.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새로운 결합이 아니라 원래 제자리 찾아가는 것이라고요.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이 분화되고 갈라서서 인간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질 않아요. 반드시 회복해야할 가치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출판도시의 존재감은 참으로 큽니다. 많은 것을 뿌리고 거두고 있는 것 같아요.
“보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만큼 걱정도 많습니다.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란 것이 있나요. 꽃이 필 때는 오래갈 것 같지만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고 어떤 것은 말라죽기도 하고. 그래서 절대성을 확보할 수 없는 현물과 현상들에 대해 내가 온 힘을 다해 소진하면서 뛰어온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가치 있는 일인가 가끔 의심을 갖게 됩니다.”
-이번에 펴내신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에서 ‘염(殮)의 진리’를 매우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염이란 망자를 목욕해드리는 것인데 매우 심오한 뜻이 있죠. 이승에서 잘못된 부분을 씻어내고 반듯하게 정리해 저세상으로 보내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자기 스스로 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봐요. 책을 만드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출판도시를 만드는 일도 그와 같은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발족한 무형유산창조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으셨던데요. 이 위원회가 전주에 문을 연 무형유산원과 인연이 있어 더 기대가 큽니다.
“그 자리에 앉긴 했는데, 부끄럽게도 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위원회를 발족하긴 했는데, 거의 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 직분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열화당은 문화유산을 주목해온 출판사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문화유산에 대한 사장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문화유산, 특히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정책도 그렇지만 기능보유자나 전수자들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 문화가 전승된다면 그것은 결국 문화재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손끝이 뭡니까. 마음의 끝입니다. 마음이 손끝에 전달되어 구현되는 것이 유산이죠. 더구나 무형유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보유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 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형유산원이 해야 할 일도 그런 바탕위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지원하고 힘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개원한지 수개월 지났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기대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전주는 출판의 역사가 매우 깊습니다. 책과의 인연도 마찬가지지요. 잘 아시겠지만 감영에서 제작했던 목판본인 ‘완판본’의 존재가 아직도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출판도시로 성장한 파주의 오늘과 미래에 더 큰 관심이 갑니다.
“전주는 갖고 있는 유산이 참으로 많습니다. 문화적 전통이 탄탄하고 풍요롭지요. 다른 도시들에게는 부러운 대상입니다. 그것을 잘 살리는 일이 중요한데, 전주의 문화역사적 위상을 좀 더 품위 있게 구현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인근의 작은 도시들을 품어 함께 가는 방식을 권하고 싶습니다. 문화는 스며드는 것이어야 해요. 행정 단위로는 갈라져있지만 문화성으로는 서로 의지하고 함께 갈 수 있는 도시로 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도시들은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미흡하지만 전주는 다르거든요. 출판 정신을 살려 역사 깊은 출판문화도시의 정체성을 살려가는 것도 매우 좋은 길이라고 봅니다.”
이기웅 대표와의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하나의 화두는 또 하나의 화두로 이어져 질문과 대답의 경계는 없어져버렸다. 열정적인 강연을 듣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출판인으로 살아온 그의 오랜 삶으로부터 축적된 지식은 그만큼 깊고 깊었다.
그는 백범일지 복간을 준비 중이다. ‘기록하는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그의 철학을 온전히 담는 작업이다. 우리에게는 정신을 세우게 하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 [이기웅 대표는] 건강한 책문화 이끈 출판문화계 든든한 거목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사대부 가옥으로 이름난 강릉의 선교장이 그의 집이다. 어린 시절 집안의 친인척들과 선교장 한울타리에서 자란 그는 대대로 이어져온 엄격한 가풍 속에서 어른들로부터 절제되고 검소한 삶의 지혜를 배웠다. 대가족의 공동체 삶은 그에게 삶의 품격과 규범의 가치를 안겼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1960년대 일지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1년 출판사 열화당을 열었다. 열화당은 1815년, 5대조인 오은 이후(李厚)가 선교장 안에 지은 일종의 도서관 이름이다. 그때로부터 치자면 열화당은 200년이란 시간을 안고 있는 셈이다. 초창기 미술전문 출판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열화당은 우리문화의 뿌리를 잇는 기획물로 대중들의 관심을 모았다. 1988년 몇몇 출판인들과 뜻을 모아 파주출판도시 계획을 입안하면서 그 중심에 선 그는 출판도시를 일구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위기는 원칙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갈밭과 같은 출판도시의 여정을 지켜온 그는 출판 관련 분야를 모아냈던 1단계 도시에 이어 책과 영화가 만나는 2단계 도시를 추진, 내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은 3단계 도시로 농사의 개념을 도입해 쌀농사와 책농사를 조화시키는 인간 중심의 새로운 도시 ‘북 팜시티’를 기획해 추진하고 있다.
1980년대 창간한 ‘출판저널’ 편집인,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 한국출판유통주식회사 설립운영위원장,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2014 세계문자심포지아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파주출판도시 명예이사장과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이사장, 무형유산창조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출판도시를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을 비롯해 사진집 ‘세상의 어린이들’과 ‘내 친구 강운구’를 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파주출판도시를 절제 있는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열화당을 ‘절제’와 ‘균형’ 이 돋보이는 건축물로 건립, 출판도시 안의 아름다운 출판사 건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옥으로 만들었다.
2009년 증축하면서 도서관과 책방의 성격을 조화시킨 ‘도서관+책방’을 갖추었던 열화당 중심 공간은 지난 2013년 박물관으로 등록해 ‘열화당 책박물관’이란 새 이름으로 관객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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