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여름. 전시실 벽면 한쪽을 채운 수묵 채색화 ‘집으로 가는 길’이 거기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지고 걸어가는 거리의 풍경. 몇몇은 깃발을 들고, 몇몇은 바랑을 지고, 또 몇몇은 맨손으로 뒷짐 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서러웠다. 그들 뒤로 놓인 그림자가 키보다 몇 배나 더 길게 드리워진 시간, 떠있는 섬처럼 보였던 군중의 거리풍경 앞에 여러 명 관객들이 쉬이 지나치지 못하고 서있었다.
그 해, 화가 박홍규씨(57)의 그림은 그렇게 세상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언어였던 판화와 만화 대신 한국화로 관객들을 불렀다. 형식은 변했으나 농민들의 삶과 농촌 현장에 더 굳건히 발을 딛고 선 그의 그림은 강하고 깊었다.
엄혹했던 80년대, 그는 민중의 현장성과 대중성을 미술의 지향이라고 굳게 믿었던 골수(?) 운동권이었다. 그가 택한 현장은 농촌. 농민이 되고 싶었던 그는 80년대 중반, 세상과 결별하고 농사꾼이 되었지만 붓을 꺾진 못했다. 그는 예술적 그림을 그리는 대신 농민운동을 위한 포스터를 그리고 유인물을 제작했으며 구호를 쓰고 만화로 농민들의 우울한 삶을 형상화해냈다.
1999년 ‘들에서 여의도까지’로 개인전을 가진 이후 11년 만에 가진 전시회가 주목을 끌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80년대 농촌으로 들어간 진짜 농민운동가 박홍규는 진짜 화가로 돌아왔을까. 화답이라도 하듯 해마다 개인전을 이어오고 있는 그의 삶이 궁금했다.
그는 지난해 늦가을부터 다시 판화로 돌아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순회전시를 가졌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가진 그의 판화전은 잠시 비켜나있는 듯 한 예술의 사회적 복무(?)를 다시 상기시켰다.
지난 5월 중순 장흥 전시를 마무리 한 그를 완주군 이서면 허름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금 화가로 돌아와 있다. 목판위에 그림을 새기고 만화를 그리는 일로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어디에 서있어도 농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 동안 함께 일 해온 농민들과 땅이 그의 가슴과 머리에 그대로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와 예술은 그 시대의 반영입니다. 그러니 시대의 진실과 아픔을 외면하면 안 되죠. 제가 다시 붓을 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분출한다는 그의 열정 덕분에 우리는 한 시대를 건너는 농촌과 농민들의 자화상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운 일이다.
-장흥 전시가 동학 순회전 마지막이었던가요.
“올해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으니 연작은 더 이어지겠지만 120주년 기념 전시로는 그렇습니다.”
-전시회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기록화란 의미도 그렇지만, 역사적 사료와 작가적 상상력이 만나 역사를 읽게 하는 힘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저는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과 맞닥뜨리는 120년 전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했어요. ‘피노리 가는 길’을 그리면서는 혁명의 패배에 따른 도피길이 아니라 새로운 결전 새로운 준비를 위한, 어쩌면 필연적으로 가야할 숙명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재의 우리 삶과 운동을 돌아보니 갑오년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가 더 무거웠습니다.”
-여의도 국회에서 전시를 했던 것이 재작년이던가요. ‘빈집의 꿈’이란 주제가 뭉클했습니다. 그만큼 메시지도 강했을 것 같습니다.
“어찌하다보니 국회에서까지 전시회를 하게 되었어요. 그즈음 농촌의 현실 중에서도 빈집을 두고 떠난 사람들과 아직도 빈집을 이웃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었는데, 주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정해졌죠.”
-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셨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예술의 역할도 바뀌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그림으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하는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리는 그림에 대해 ‘아직도 이런 그림을 그리냐’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내 그림은 나만의 그림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부대껴온 농민들의 애환과 절망 희망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예술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 시대의 반영이어야 합니다.”
-20대에 작가의 길을 버리고 농촌으로 갔지만 다시 화가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박홍규란 이름은 그냥 화가가 아니라 ‘농민화가’로 훨씬 익숙합니다. 농사를 짓는 일은 이제 끝났습니까.
“사실 젊었을 때는 농사도 짓고 운동도 하면서 그림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오만했죠. 저는 온전히 농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현장에서 저를 다시 화가로 불렀어요. 걸개그림을 그리고 구호를 쓰고 깃발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농사일을 손에서 놓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4년 전인데, 지금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솟구칩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큰데 어떻게 묻어두고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물론 농민운동 현장에서 그리는 일은 계속해오셨으니 붓을 놓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무래도 형식과 내용이 달라졌으니 삶에 큰 변화가 왔을 것 같습니다.
“농사일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는 있죠. 그러나 제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농민운동의 연상에 있거든요. 저는 저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농민들을 이 땅의 주인으로, 주체로 그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들이 있어야 박홍규도 그림도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한때 만화를 많이 그렸죠. 만화를 계속 그렸으면 지금쯤 잘나가는 만화가로 이름을 알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웃음)
“맞아요. 만화란 매체가 개인적 취향으로도 잘 맞았어요. 메시지를 바로 바로 전할 수 있는 형식이었으니까요. 농민운동의 연상에 있어서도 잘 맞는 틀이었죠. 되돌아보면 만화란 매체가 제가 목표했던 농민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어요. 저 스스로도 만화 작업을 하면서 성격도 변하고 사회성도 넓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리긴 합니다. 삽화도 그리고.”
-농사 빚이 쌓여 야반도주까지 생각하셨을 때 만화나 삽화를 그렸으면 해결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생각했어요.(웃음) 출판사 섭외까지 했죠. 전북대와 전주대 앞에 있는 만화방을 뒤지고 다니며 잘나가는 만화를 다 분석했어요. 그때는 만화주간이 있을 정도로 만화가 잘나갔던 때거든요. 궁핍과 이 절망적인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판단이 있었으니까요. 필명으로 연재할 만화를 기획 했는데 실행은 못했어요.”
-농민운동 안에서도 선생님 만화가 기여했던 부분이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
“그렇죠. 전농의 역사가 박홍규 그림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전농을 만들기 전부터 지금까지 판화, 만화, 포스터, 걸개그림, 유인물 등 거의 모든 농민운동의 매체가 제 손을 거쳤거든요. 그때 제 별명이 ‘야 뺑끼’였어요. ‘뺑끼통’을 들고 다니니 붙여진 것이지요.“
-함께 하는 동료들이 없었습니까.
“농민운동 바닥에서는 없었어요. 80년대만 해도 치열한 논쟁이 있었잖아요. 이후 현장으로부터 민중문화를 일구어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면서 문화예술인들이 현장으로 많이 들어갔죠. 외곽지원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현장에서 함께 노동자들과 호흡하면서 그 사람들의 감성 심성 현장성 투쟁성을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표현하는 작업이어야만 진정한 민중문화운동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농민운동 안에서는 그런 경우가 드물었어요. 우선 수적 적었으니까요.”
-의지와는 관계없이 농민운동 현장에서 붓을 놓지 못했던 이유겠군요.
“되돌아보면 그림 그리는 일은 제 선택이 아니라 떠밀려서 하게 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맞아요. 농사를 지려고 내려갔지만 그림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만화와 판화로 농민들의 생활, 투쟁, 설움, 절망을 담아내기 시작했고, 결국은 여러 매체들에 그 그림을 담기 시작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인지 모든 작품이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삶을 딛고 서있는데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주제가 너무 한정적이지 않은가요.
“한정적이라해도 제가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 자체가 농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들의 언어를 대신 표현해주는데 있다는 것이에요. 저는 제 그림이 농민들의 언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치열하게 현장성을 담아야하는 이유가 거기 있지요.”
-농촌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왜 그리 빚더미에 앉았는지도 궁금하고요.
“가장 큰 원인은 제가 지켜온 방식에 문제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농촌의 현실은 저 개인 뿐 아니라도 여전히 궁핍하고 어렵습니다. 농사를 짓는 대부분이 빚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지요. 농민회 안에서도 현상 유지라도 하면서 농사를 짓는 분들은 몇 명 되지 않아요. 성공한 예도 있겠지만, 농촌의 현실은 투자를 많이 할수록 빚이 늘어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전업농이었지만 규모를 늘릴수록 빚을 많이 지게 되더라고요. 구조가 그렇습니다. 규모화된 농사를 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데 결과를 보면 빚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농민회 활동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힘을 많이 잃었죠. 우리나라는 FTA를 많이 한 나라잖아요. 그 때문에 농민들이 타격을 직접적으로 받았지만, 농민 내부를 보면 계층이 엄청나게 분화되었거든요. 예전에는 대농 중농 소농 정도로 구분하면 됐지만, 지금은 계층이 분화되면서 매우 복잡하게 되었어요. 전업농 정책이 20년 동안 실시되면서 돈을 번 ‘귀족농민층’도 생겨났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 특히 땅을 지키고 살아온 노인들은 소농과 빈농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이런 환경 속에서 농민운동은 자연히 힘을 잃을 수밖에요. 농민운동의 대중적 역량이 힘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은 농업의 규모화와 인구의 노령화에 있습니다.“
-농민운동 30년 동안 현장을 지켜왔는데 현실이 그처럼 암울하다면 회의는 없습니까.
“농민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더 힘들어진 것이 맞습니다. 당연히 회의가 들죠. 그러나 현장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죠. 농민들 처지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궁핍하고 고된 생활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나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절망적이죠.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땅과 농민들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진리와 정직함을 알기 때문이에요.”
-이런 농촌의 현실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으로서는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방농정이 더 심화되고 있고 농민들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잘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없고.”
-암울하군요.
“그래서 저희가 주장하는 것이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인데 이를테면 쌀이나 보리, 밀 같은 작목을 국가에서 최저가제를 보장해주고 수매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기본적으로 식량자급도 되고 식량안보적 기능도 하고 최소한 농민들이 기초농산물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죠. 도시 소비자들도 일정 가격에 그것을 살 수 있으니 좋고요.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기초농산물 수매 조례 제정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요즈음 로컬푸드가 대세이다 보니 농촌의 현실이 좀 나아졌을 것이란 생각을 했는데…….
“그런 경우는 아주 일부입니다. 지금은 친환경 농산물도 힘들어요. 친환경농산물은 기본적으로 보장을 해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거든요. 계약제 형태로 가거나. 그런 환경이 안 갖추어지는데다 오히려 환경이 열악해지니 친환경 농산물도 쇠퇴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로컬푸드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전체 농가 중에 불과 몇 프로에 불과할겁니다.”
-친환경 농산물이 쇠퇴하고 있다는 현실은 의외군요.
“친환경 쌀을 비롯해서 작목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판로가 보장되지 못하니까 농민들이 농사짓는 일을 꺼리거든요.”
-소비자들은 친환경 농산물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수요가 많아졌을 것 같은데요.
“사실은 수요도 그렇게 많아지지 않았습니다. 일부계층의 이야기죠. 친환경 농산물은 학교급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맞아요. 급식비가 지원되었을 때는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지원까지 더해져서 어느 정도 보장이 되었는데 지금은 지원을 끊은 자치단체가 많잖아요. 중앙정부도 마찬가지고. 친환경 농사가 쇠퇴하는 이유는 학교급식 문제가 영향이 제일 큽니다.”
-말씀을 듣다보니 농민운동의 현장을 못 떠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 현장을 지켜오면서 가장 큰 안타까움은 어떤 것인가요.
“고생만하시다가 돌아가시는 농민들을 보는 것이 가장 서럽습니다. 농번기 때는 논밭에 나가서 일하시느라 새까맣게 타면서도 막걸리 한잔에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서럽고, 농민회라도 나오면 뒷방 늙은이 되지 않아도 된다며 고마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면 농민회 하나도 예전처럼 꾸리지 못하는 것이 죄스럽기도 하지요. 그런 기억을 되살리면 제가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하는 이유와 힘을 얻게 됩니다.”
● [부안출신 박홍규 화가는] 농민운동 '반평생'…민중미술 대표 화가
화가 박홍규씨는 1959년생이다. 부안 주산면에서 태어났지만 전주로 고등학교를 오면서 고향을 떠났다. 고창고보를 나와 교사와 공무원을 지냈던 그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컸다. 중학교 시절 공부 잘하는 아들을 어머니는 전주로 유학 보내고 학기마다 시외버스에 쌀을 싣고 와 학비와 하숙비를 댔다. 그는 대학만은 꼭 서울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예비고사 성적이 꿈을 꺾어 놓았다. 대학 입시를 두 달 남겨두고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의 대학을 가겠다는 일념이었다. 코피 쏟으며 노력한 덕분에 후기였던 홍익대 조소과에 합격했다. 국문과나 문창과에 들어가 글을 쓰고 싶었던 꿈은 그때 버렸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과 공부보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눈을 돌렸다. 1980년, 대학 3학년 때 광주항쟁이 났다.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운동권 학생들의 ‘언더서클’과 ‘탈춤반’에서 활동했던 그는 군대 시절에도 농민들의 눈물겨운 소작쟁의를 다룬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시대라고 생각했다. 군대를 제대한 후 그의 활동은 더 치열해졌다. 농민운동을 삶의 목표로 세웠다. 농사꾼이 되고자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85년 즈음, 가족과도 인연을 끊고 연고도 없는 부여로 갔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성실하게 농사일을 배웠다. 노지딸기 농사를 하는 주인집에서 1년 일하고 나니 땅을 얻을 수 있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첫해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서천으로 내려와 역시 농민운동을 위해 남의집살이를 하던 활동가였다.
87년 충남권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비 피해로 논밭과 가축을 잃은 농민들이 속출했다. 생계가 막막해진 농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 중심에서 농민들의 조직적인 활동을 이끌다 89년 부여군 농민회를 만들었다. 작가로서의 꿈을 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그는 다시 작가가 됐다. 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발족되면서 1기 문화국장을 맡게 된 그는 1년 동안 서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 전주로 내려왔다. 몸을 추스릴만 하자 완주군 고산면에 터를 잡았다. 농사꾼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5-6년 하우스 농사를 짓다가 화산으로 이사해 1200평 정도의 땅을 얻어 규모를 늘렸다. 열심히 일했지만 5년이 지나고나니 그 앞에는 빚 2억이 놓여있었다.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빚에 시달리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야반도주’까지 계획했지만 이서농민회 회원들이 집과 농사지을 땅까지 빌려두고 그를 붙잡았다. 4년 전부터 농사짓던 생활을 벗어나 그림 그리는 일을 전업으로 삼고 있다. 1999년 첫 전시회 이후 2011년에 두 번째 전시를 가졌으며 이후 해마다 전시를 열고 있다. 농민운동 현장에서 깃발로, 구호로, 걸개그림으로 이름을 알렸던 그는 이제 화가로만 대중들을 만나고 있다.
두렁창립전, 힘전을 비롯해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해온 그는 판화와 만화 한국화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농민들의 삶과 농촌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동학농민혁명을 형상화한 판화로 순회전시회를 가져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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