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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물고기 연구 어류학자 김익수 전북대 명예교수 "자연은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공동 운명체"

▲ ‘물고기 박사’김익수 전북대 명예교수가 인터뷰를 마치고 전주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물고기종을 발견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학명을 붙인 최초의 한국인 어류학자다. 안봉주 기자

대한민국이 메르스 공포에 휩싸여있던 때, ‘식인물고기’ 가 뉴스에 등장했다. 지난 7월 초였다. 강원도 횡성 한 저수지에서 발견되었다는 ‘피라니아’가 주범이었다. 아마존에 사는 식인물고기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 외래어종의 무분별한 유입이 가져올 생태계 파괴의 공포가 확산될 조짐이 일었다. 저수지의 물을 다 퍼내고도 더 이상의 식인물고기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었다.

 

사실 외래어종의 환경생태계 파괴는 이미 오래전에 제기됐던 문제다. 우리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던 ‘황소개구리’가 대표적인 예다. 환경문제에 무지했던 우리에게 황소개구리의 등장은 충격이고 공포였다. 외래어종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토종어종은 위기에 처하고 생태계는 불안해졌다.

 

그러나 돌아보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된 절박한 현실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다. 외래어종의 유입이 아니어도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따른 환경오염의 정도는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 아닌가.

 

‘물고기 박사’ 김익수 교수(73, 전북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40년 넘는 학문의 길을 물고기 연구에만 온전히 쏟아온 그는 90년대 황소개구리를 발견해 외래어종의 생태계 파괴 문제를 우리사회에 확산시킨 어류학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새로운 물고기종을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딴 학명을 붙인 그는 학문적 업적으로도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전주, 이 도시를 끼고 흐르는 전주천의 생태계 역사가 그의 연구 노정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그의 전주천 조사 연구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올해로 40년, 연구의 족적은 한 도시의 생명줄처럼 흐르는 전주천의 오늘과 맞닿아 있다.

 

그는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전주천 살리기 작업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도 수많은 자치단체들이 주목했던 공원형 하천으로의 인공적 복원이 아니라, 스스로 흐르면서 수많은 생명들을 들여와 공존하게 하는 자연형 하천으로의 복원을 갈망했다. 오늘에 이르러 전주천이 국내 많은 도시들의 벤치마킹 사례가 된 것은 그의 고집(?)이 주효한 덕분이다.

 

여러해 전에 대학 강의를 접고 연구와 신앙 봉사 활동으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김교수는 인터뷰를 꺼렸다. 몇 번의 권유 끝, 7월 초 가장 더운 여름 한낮에 한옥마을에서 만난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고기 이야기를 참으로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자연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공동 운명체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는 듯 하면 어김없이 튀어나왔던 말이다.

 

-건강해보이십니다. 요 며칠 식인물고기 등장으로 외래어종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다행인데 매체들이 너무 과도한 추측과 해석으로 여론을 주도하지 않았나싶기도 합니다.

 

“경계할 일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과민했던 것 같아요. 드러난 개체수도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고, 확산된 형태도 아니었죠. 조사를 제대로 하고 발표를 했더라면 이렇게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았겠죠.”

 

- ‘피라니아’ 사건을 보면서 ‘황소개구리’ 생각이 났습니다. 교수님 연구팀이 제기했었죠.

 

“그때 저희 연구팀이 여러 해 동안 전국의 강을 조사하고 다녔는데 어느 해인가 여러 곳에서 황소개구리가 많이 발견됐어요. 조사해보니 처음에는 식용으로 황소개구리를 들여왔는데, 양식 하기 쉽지 않게 되니 방치하게 되고 개구리들이 그 틈에 밖으로 튀어나가 산야를 거쳐 강이나 저수지에 들어가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이더라고요.”

 

-그즈음에 전주천 살리기가 시작되었습니까.

 

“그 뒤가 아닌가 싶은데요. 1992년 리우환경회의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중요성이 대대적으로 제기되었어요. ‘의제 21’이 발의됐죠. 2000년엔가 전주도 ‘의제 21’이 만들어졌는데 제가 운영위원장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전주천 살리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당시 많은 도시들이 비슷한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었는데요.

 

“도시가 개발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되기 시작했죠. 특히 도시를 끼고 흐르는 하천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오염된 하천을 공원화하는 사업을 들고 나왔어요. 전주도 그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주의제21과 시민단체들이 공원화 사업 대신 자연형 하천으로의 복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죠.”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이미 설계까지 끝난 상황에서 복원 방향을 돌리는 일이 쉬웠을 리 없죠. 그때 김완주 시장님을 찾아가 설명하고 공무원들을 설득했어요. 공원화 사업은 펌핑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형식이 중심인데, 그것은 인위적인데다가 하천이 자생력을 갖기 어려운 형식이거든요. 시간이 좀 걸려도 스스로 생명력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빨리 결과를 내야하는 자치단체로서는 선택하기 쉽지 않았을겁니다. 그래도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설득했는데, 다행히 우리 뜻이 받아들여졌어요. 자치단체장의 철학과 의지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형 하천으로 만드는 일이 바람직하긴 하지만 그 과정도 그렇고 확인된 사례가 있었나요.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한 사례는 없었지만 공원으로 추진해 실패한 사례가 있었거든요. 대구나 광주가 그 예인데, 제가 현장에 가서보니 흐르는 물이 오염된 물 그대로더라고요. 펌핑으로 물을 끌어올리느라 한 달에 들어가는 예산이 1억이라는데, 흐르는 물의 양은 많지만 그 물이 오염된 그 자체인데…….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면 전주천이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습니까.

 

“그런 확신은 있었죠. 제가 1975년에 전주에 왔는데 그때부터 전주천 상류를 조사하기 시작했거든요. 상류에 쉬리가 살고 있었어요. 하류로 내려가면 한벽루 부근부터는 이미 오염되어 쉬리 같은 물고기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상류는 잘 유지되고 있었죠. 자연형 하천을 만들면 쉬리가 자연스럽게 하류 쪽으로 내려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확신은 주효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쉬리는 여울에만 사는데 하천을 직선으로 조성하면 여울이 만들어지지 않죠. 에스자형으로 하천을 조성해나가면서 ‘여울’과 ‘소’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놓으니 쉬리가 하류 쪽으로 내려왔어요. 그래서 ‘쉬리가 사는 전주천’이란 이름도 얻게 되었죠. 물고기는 서식처를 다양하게 만들어주어야 다양한 종이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때마침 ‘쉬리’가 영화로도 나왔었잖아요. 깨끗한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죠.

 

“ ‘쉬리가 사는 전주천’도 효과를 톡톡히 봤어요.(웃음) 실제로 쉬리는 색동옷처럼 예쁜 색색이 줄무늬를 갖고 있는 물고기예요. 깨끗한 물에서만 살 뿐 아니라 매우 민첩하죠. 저는 쉬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유어종이라고 내세웁니다.”

 

-오늘에 이르러 전주천은 전주라는 도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자치단체들이 벤치마킹을 했었죠.

 

“성공적으로 하천을 복원한 모범 사례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자연형 하천 복원은 우리보다 환경에 먼저 눈을 뜬 일본에서 운동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저희도 전주천에 적용을 했는데, 그 성과가 적중한 셈이지요.”

 

-70년대부터 전주천을 들여다보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저는 75년에 전북대 교수가 되면서 전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프로젝트와 관계없이도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하천 생태계를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완주 쪽과 전주천 상류 쪽으로 돌아보니 물고기 환경이 아주 좋더라고요. 제게는 천혜의 연구실이었습니다.”

 

-전주천의 생태사가 교수님의 연구 노정에 놓여있는 셈이군요.

 

“너무 과한 평가고요. 전주천에 대한 연구는 전북대 공대 김환기 교수와 함께 진행했어요. 김교수님은 수질 전공이어서 조사 연구한 내용을 ‘전주천 수질 오탁과 어류 군집’이란 주제로 묶어 함께 발표하기도 했죠. 그것이 아마 본격적인 전주천 연구의 시작이랄 수 있을 겁니다.”

 

-일찍부터 학문의 융합이 이루어졌군요. 교수님의 학문적 성과 또한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명이 교수님 이름으로 붙여져 발표되었죠.

 

“참종개가 그것인데, 기름종개과(혹은 미꾸리과)에 속한 열여섯 종류 중 한종입니다. 제가 발견한 신종이어서 제 이름이 학명으로 붙여졌어요.”

 

-학술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하던데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종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제 경우는 한국인이 우리나라 물고기를 처음 발표하는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다보니 우리나라 어류연구의 학문적 성과가 궁금하군요.

 

“한국은 해방 이후 어류 연구가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1세대 연구자들은 일본 유학파가 대부분이어서 대표적인 연구자들도 자기 연구보다는 일본인들의 연구성과를 소개하는 역할을 주로 했지요. 그렇다보니 독립적인 연구작업도 그렇고 제자들을 키워내는데도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연구를 진전시키는 데는 큰 걸림돌이 되었죠.”

 

-어류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 기초학문에 대한 연구기반 자체가 너무 허술한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기초학문의 기반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죠. 꾸준한 연구과정 속에서 학문적 성과가 축적되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다시 학문연구의 진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금세 효과를 내거나 응용을 하는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잖아요. 저는 오늘날 대학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취업률과 발표논문의 수치 등 외형적인 성과에만 집착하고 있거든요. 대학은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어서 기초학문에 꾸준히 투자를 해야 해요. 현실은 그 반대로 가고 있죠.”

 

-도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죠. 대도시 대열에 들어선 도시들의 경우 환경문제로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좋은 도시로 꼽히는 예를 보면 대부분 도심에 강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군요.

 

“어쩌면 그런 조건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연을 없애고 인위적으로 삶의 공간을 변화시켜왔죠. 시간이 흐를수록 그로 인해 우리가 받게 되는 대가가 너무 커집니다. 이제와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많죠. 한 도시에서 강의 존재는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사업이면서도 우리 지역의 오랜 과제가 된 새만금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새만금 반대했던 입장입니다. 지금도 안타까움이 크죠. 새만금을 삶으로 본다면 먼 후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미 방조제는 막아졌죠. 그러나 지금이라도 해수유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태계 문제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수유통은 말을 꺼내놓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다시피 했는데 최근 환경단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연구자들은 새만금 수질 오염을 우려하고 있던데요.

 

“4대강의 녹조현상을 보세요. 녹조는 물을 가두어놓은 환경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새만금은 범위가 더 커서 녹조 문제가 아직은 심각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남의 일이 아니거든요. 시화호가 큰 교훈이죠. 막았다가 결국 텄지 않습니까. 시화호는 규모가 작아서 빨리 일어났을 뿐 새만금도 서서히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전라북도는 동식물의 다양성 측면, 특히 어류의 경우 환경이 어떻습니까.

 

“전북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매우 다양한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4개의 국립공원을 안고 있고 동진강 만경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이 흐르죠. 낙동강은 남원 운봉 쪽으로 그 상류가 지나갑니다. 이런 조건을 가진 지역이 또 있을까요. 자연여건으로 본다면 천혜의 조건이예요. 지금은 도시 발전 정도로 볼 때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삶의 환경이 중요해지는 흐름으로 본다면 아주 소중한 자원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자연환경이 미래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가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에 한 TV프로그램에서 물고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더군요. 조기나 대구, 명태처럼 우리와 친근하고 좋아하는 물고기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유엔에서 예고한 우리의 미래가 있어요. 2040년이 되면 물고기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인데, 상상해보면 정말 무서운 일이거든요. 환경생태학자들은 심지어 2100년쯤에는 지구가 끝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상황을 예측하면서 지금부터라도 환경 생태계를 보호하자는 이야기겠죠. 이미 선진국들은 이런 문제를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반영해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개발에 목매고 있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갈수록 환경부가 멸종 위기종을 늘려가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멸종위기종이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되는 문제거든요.”

 

김교수와의 인터뷰는 전주천에서 끝이 났다.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된 전주천을 갖게 된 전주는 살기 좋은 도시가 됐다. 쉬리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고 수달이 돌아온 전주천은 여름 한낮 더 맑은 물로 흘렀다. 김교수가 오래전에 펴낸 책 〈춤추는 물고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맑은 물이 있어야 물고기가 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양한 물고기가 물을 맑게 한다.’ 전주천의 존재가 더 새로워졌다.

 

● [김익수 교수는] 신종 물고기 학명에 자신 이름 붙인 한국인 최초 학자

김익수 교수는 새로운 물고기종을 발견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학명을 붙인 최초의 한국인 어류학자다. 정작 그 자신은 그리 내세울 것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어류학의 영역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빛난다.

 

그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일곱 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대학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졌다. 어렸을 적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선택의 여지없이 서울대 사범대로 진로를 정했다. 정말 대학생활을 잘하고 싶었으나 입학하던 해에 4.19 혁명이, 이듬해에는 5.16쿠데타가 났다. 현실이 불안한 만큼 마음을 붙잡아 줄 동력이 필요했다. 대학 1학년 때 성경을 접하며 신앙인이 되었고, 함석헌 선생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해에 서울대에 교육대학원이 생기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목포의 중고등학교에 자리가 나자 휴학을 하고 교사 생활을 했지만 부모님의 강권으로 대학원을 마쳤다. 늦게 군대를 갔다. 공군장교로 4년 4개월 근무하고 제대하니 서른이 넘어버린 나이, 취직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은사를 찾아갔다. 때마침 연구 프로젝트를 잡아 연구원을 찾고 있던 스승은 그를 연구원으로 앉혔다. 물고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조교로 있으면서 결혼을 하고 보니 안정된 직장이 절실했다. 때마침 전북대 교수 공채가 났다. 전공 분야가 딱 맞았다. 필기시험을 거쳐 교수를 채용했던 시절, 연고 없는 전주로 내려와 일주일동안 시험공부를 했다.

 

75년 전북대 교수가 됐다. 전주천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류연구로 치자면 2세대 연구자였던 그는 물고기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우리나라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물고기종인 참종개를 발견했다. 학명은 그의 이름을 딴 ‘익수키미아 코리시엔스(IKSOOKIMIA KOREENSIS)’.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학명을 등록한 최초의 한국인 생물학자가 됐다. 이후에도 그는 열여덟 종의 새로운 민물고기를 발견했으며 〈한국 미꾸리과 어류의 분류학적 연구〉를 비롯한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2000년부터 전주천을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는 일을 주도하면서 성공적으로 전주천을 일구어낸 그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이다. 한국어류학회 한국동물분류학회 회장,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위원, 전주생태하천협의회 상임의장을 역임했다. 좋은 연구자를 키워내는데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던 덕분에 한국의 어류관련 연구 활동의 중심에는 유난히 전북대 출신 연구자들이 많다. 대중들을 위한 책으로 감동적인 민물고기 이야기를 담은 〈춤추는 물고기〉와 〈내가 사랑한 우리 물고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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