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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작곡가 지성호 씨 "한국적 오페라, 판소리 고장 전주의 정체성 담아낼 것"

▲ 한국적 창작 오페라의 길을 내고 있는 오페라 작곡가 지성호씨가 완주군 구이면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봉주 기자

공연 무대에 뮤지컬 바람이 거세다.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뮤지컬은 다소 부침이 있긴 했으나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뮤지컬의 성장은 반갑지만 워낙 편식이 심한 우리의 문화 환경에서는 자칫 다른 장르의 침체를 불러오는 후유증을 예고하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우리 공연무대에서 시도되기 시작한 또 하나의 양식이 있다. 창작 오페라다. ‘한국적 오페라’를 내세운 창작 작업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지속되어왔지만 여전히 관객들에게는 낯설고 실험적인 양식이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오페라단이 창작오페라를 제작하고 올려왔으니 양적 성장으로 본다면 그 성과가 크지만 오늘의 무대에서 관객들과 잘 호흡하고 있는 창작오페라의 면면은 그리 탄탄하지 않다.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창작오페라의 부질없는 명멸은 안타깝다.

 

그럼에도 지난해 우리지역에서 만들어진 창작오페라가 2014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 선정됐다. 〈논개〉에 이어진 두 번째 결실이다. 게다가 이 두 작품 모두 지역적 소재를 끌어들인 토종 오페라다. 이 두 작품을 써낸 작곡가 지성호씨(62)를 만났다. 그는 한국적 오페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스스로는 한국적 오페라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한 그는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지역의 이야기에 판소리를 끌어들인 새로운 오페라 양식을 입혀내는 작곡가다. 판소리와 오페라가 만나는 무대. 그의 작업은 도창이 관현악단의 연주에 맞춰 판소리를 하고, 벨칸토 창법의 성악가들의 우리언어의 특징을 살려 노래 부르는, 이 순탄치 않은 노정으로 이루어진다. 대작만 5개 작품을 얻어낸 과정에서 그는 한국적 오페라 양식의 답을 얻었을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오페라의 역사를 보면 그 답은 더 확연해집니다. 나라마다 가진 언어의 독창성이 이태리 오페라를 프랑스 오페라로, 독일 오페라로 분화시킨 것이거든요. 한국적 오페라에 판소리를 주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음악적 양식에서 그 답을 찾고 싶습니다.”

 

완주군 구이면, 아름다운 그의 작업실 겸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는 즐거웠다. 작곡의 길에 들어선지 30여년, 창작오페라 작업만으로는 10여년. 한국적 창작오페라의 길을 내고 있는 그의 작업은 아직 외롭지만 의연했다.

 

-정원이 참 아름답군요.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곳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설펐는데 꽃도 나무도 제자리를 찾은 것이죠. 돌봐야하는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번거롭지 않습니다.”

 

-모든 작업을 이곳에서 다 하십니까.

 

“요즈음에는 컴퓨터로 모든 과정을 다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작업실은 서재 안에 아주 작은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제가 ‘곡감옥’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문만 닫으면 바깥과는 단절되는, 그래서 온전히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 ‘곡감옥’이란 이름이 재미있군요. 그만큼 고통의 시간을 거친다는 말씀이군요.

 

“오페라 작업이 시작되면 거의 1년 정도 다른 작업은 병행할 수 없게 됩니다. 감옥 생활과 다를 바 없죠. 저는 오페라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의도적으로 어떤 모임도 갖지 않거든요. 스스로 묶이는 것이죠.”

 

-이곳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시내 아파트에 살 때도 사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아파트가 들썩거리는 거예요.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 때문이었는데, 밖을 보니 아파트 전체가 온통 불을 켜놓고 축제분위기더라고요. 그때 나만 외로운 섬에 고립된 존재처럼 여겨졌어요. 아파트에 살면 안 되겠다 싶더군요. 그즈음 모악산을 다니다 이 마을을 만나게 되었어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집을 지어 이사를 했는데 처음에는 낯설어서 또 마음고생을 했어요.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죠.”

 

-이런 공간을 마련하니 곡이 절로 써지던가요.(웃음)

 

“천만에요. 이곳으로 들어온 뒤 5년 동안은 오히려 한곡도 못썼어요. 집짓느라 안게 된 경제적 부담이 컸거든요. 집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에 회의도 컸죠. 얼마 전에야 자유로워졌는데,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의지를 세우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의지를 세우느냐겠죠.”

 

-서양음악의 교육을 받고 작곡을 전공했는데, 판소리를 접목한 한국적 오페라 양식을 시도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이전에는 실적위주에 급급했어요. 계기가 있었죠. 우석대 심인택 교수님이 여러 번 국악 곡을 의뢰했어요. 국악은 공부하지 않은 분야여서 처음엔 거절했는데 지속적으로 권하시는 거예요. 함께 작업하면서 맞춰 가면 된다고 하시니 그 꾐에 넘어갔죠.(웃음) 한곡이 두곡이 되고, 소품이 대작이 되고…….경험이 축적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게 됐죠.”

 

-결정적인 계기라는 것이 대서사음악극 ‘혼불’인가요.

 

“맞습니다. 월드컵이 있던 2002년 1월이었는데, 그해 월드컵 문화공연을 전주시립예술단체가 연대해서 ‘혼불’을 공연하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작품 전체 중 한 부분인줄 알았는데 전체를 다 써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단호하게 거절했죠. 결국은 다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책임감과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포기의 유혹이 커지고 ‘내가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겹쳐지면서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하루 3시간씩 쪽잠 자면서 겨우 완성을 했죠.”

 

-그 무대가 200명이 함께 섰던 공연이었잖아요. 성공적인 공연이었고 평가도 좋았죠.

 

“감사한 일이죠. 관객이 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공연장 계단까지 관객들이 찼을 정도로 관심이 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내 작품을 200여명의 전문가들이 땀흘려가면서 현실화시켜가는 과정도 그렇지만 무대에서 내 생각이 구체화 될 때의 그 희열은 정말 벅찬 감동이었어요. 곡을 통해 내 존재감이 무대 위에 구현될 때 의지가 더 단단해지더군요. 이를테면 강한 중독성 같은 것인데, 그것이 결국 다음 작품을 다시 쓰게 되는 바탕이 되게 했어요.”

 

-그 작품은 음악극이긴 하지만 오페라 양식은 아니었죠. 한국적 오페라로 판소리를 도입해 만든 첫 작품은 어땠습니까.

 

“정읍사를 주제로 한 ‘달하 노피곰 도다샤’였어요. 첫 작품이어서 대단한 열정을 쏟았는데 잘 살아나지 못했어요.”

 

-판소리를 끌어들인 오페라 양식으로서는 처음이었는데 그런 형식의 시도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연행 방식이 전무하기도 했지만 판소리를 하는 분들은 구전심수로 악보 없이 소리를 익혀왔잖아요. 게다가 국악에서 기보법은 최소한의 기호일 뿐 전부는 아니거든요. 양악에서는 전부지만 시김새나 농현 등으로 구현해내는 국악은 연주자의 몫으로 이뤄지는 것들이 많죠. 그런데 오케스트라의 속성은 그런 여지를 두지 않고 기계처럼 일정한 시간 속에서 정확하게 약속을 한 내용으로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형식도 그렇지만 국악과 양악은 기본적으로 철학이 다르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이념이 다르죠. 그래서 접목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저도 의심했어요. 그러나 기왕에 의뢰를 받은 마당이고 저는 작곡가니까 위촉자의 의도를 또 존중하지 않을 수 없죠. 그래서 모험을 한 겁니다.”

 

-그 작품으로 가능성을 얻었습니까.

 

“그 곡을 통해서 무엇을 실험하고, 찾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판소리 연행방식이 오페라와 연행 방식과 공통분모가 있다 해도 각자의 소리가 추구하는 본질자체가 달라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는데 그 작품을 통해서 많은 방식을 깨우쳤죠.”

 

-며칠 전에 지인의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선생님의 댓글을 읽었습니다. 짧지만 명료한 분석이 국악과 양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더군요.

 

“늘 갖고 있던 생각이었어요. 전주에서 활동하는 덕분에 국악 양악을 넘나들게 되었고 그렇다보니 제 나름의 견해가 생겼거든요. 국악의 기보는 최소한의 영역이지 모두는 아니라는 것, 시김새나 농현과 같이 연주자의 해석의 몫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작곡자는 언제나 이 여지의 공간을 비어둘 줄 알아야 합니다. 서양악기는 발현되는 소리가 한번 울려 퍼지면 큰 변화가 없지만 국악기는 그 소리를 생성과 소멸까지 내면화해서 끌어올리고 끌어내리고 흔들고 꺾으면서 아주 변화무쌍한 세계를 만들어내거든요.”

 

-그런데 그 특성 때문에 판소리와 접목한 창작오페라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판소리를 끌어들인 한국적오페라가 갈 길이 멀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하게 됩니다.

 

“오페라사를 보면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오페라가 자연스럽게 분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인데 그것의 중심축이 언어거든요. 언어의 독창적인 구조 속에서 오페라 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저는 주목합니다.”

 

-문화 예술에 있어서 언어는 중요한 영역이죠.

 

“노암 촘스키도 모든 문화는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잖아요. 우리나라에 오페라가 들어온 지 70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한국적 오페라를 정립하지 못한 바탕에는 바로 언어의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곡가들의 화두는 아마도 정체성일 텐데, 오늘의 문화환경에서 보면 모순된 점이 많거든요. 우리문화 저변에 여전히 식민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고요. 그렇다면 우리다움, 독창성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지 않겠어요. 한국적 오페라를 구현하는 일도 마찬가지죠. 저는 그 답을 우리 모국어에 충실하자는데서 찾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내가 살고 있는 전주라는 지역성과 판소리의 고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이 작업에 대한 음악전문가들의 관점이 궁금하군요.

 

“인색하죠. 처음에는 판소리 형식을 도창이라는 역할로 끌어들였는데, 아니리만으로 연결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평론가들은 무반주로 그 부분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작품성 운운하면서 지나치게 가볍게 처리한다고 의심했죠. 저는 판소리의 본래 특성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그래서 할 수 없이 오케스트라 반주로 도창이 소리하는 형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어렵죠. 소리꾼 한명이 들어옴으로써 오페라의 전체 색깔이 달라지는데, 서양의 벨칸토 창법을 훈련받은 성악가들이 판소리적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 과정이 쉽지 않거든요. 그래도 제 작품을 할 때는 노력해달라고 주문합니다. 소리의 공명에 매달리지 말라고요.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일종의 테크닉이거든요. 우리 언어는 첫음절에 악센트가 있잖아요. 게다가 모음과 자음을 잘살려야 가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으니 자음을 소홀히 취급하면 안 되죠.”

 

-선생님 오페라에서 실상 판소리가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던데요.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판소리의 분량이 적긴 하지만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죠. 제 오페라의 판소리들은 정통적인 판소리가 아니라 우리 언어를 노래화하는 것과 판소리가 갖고 있는 목소리의 색깔을 끌어들이는 것에 무게를 둡니다. 우리 독자성을 갖는 오페라를 만들어내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지역성을 갖고 있는 작곡가로서 판소리를 오페라로 끌고 오되 오페라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인 도입을 통해 한국적 오페라의 색깔을 내는데 중요한 모멘텀으로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는 애초의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오페라를 창작해내는 과정의 지난함만큼이나 쌓아온 시간 속 이야기가 많았다. 지역에서 작곡가로 사는 이면을 듣고 싶었지만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학연과 지연이 우선되는 서열 중심의 풍토에서 회의를 단 한 번도 갖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되돌아보면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깨달음이 삶의 큰 힘이에요.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작곡가로서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여건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지성호씨는] 지역 이야기에 판소리 접목…불편한 옷 입고 쪽잠 자며 곡 써

지성호씨는 부여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전주로 온 이후 줄곧 전주에서 살았다. 그의 유년시절은 음악으로 차고 넘쳤다. 교회 풍금 반주자였던 고모는 늘 어린 조카를 옆에 끼고 노래 부르며 음악을 들려주었다. 돌아보면 그의 음악적 자질은 그때부터 싹을 틔운 셈이다. 공무원에서 사업가가 된 아버지는 음악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덕분에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피아노를 쳤다. 그가 인문계 고등학교(전주고)를 다니면서도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고 나섰을 때 아버지는 기꺼이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주저앉으면서 그가 그렸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동가숙 서가숙’하던 시절, 울산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친구 누나를 찾아가 일을 도왔다. 누나의 권유로 계명대 음대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적응하기 어려웠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하지 않고 때마침 신설된 전북대 사대 음악과를 다시 들어갔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과 작곡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진안의 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교육자로서의 길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교사생활 6개월 만에 대책 없이 사표를 냈다. 대학 2학년 때 초등학교 동기와 결혼했던 그는 가장이었다. 1990년대 후반, 우석대 국악과 심인택 교수와 인연이 되어 국악관현악단의 연주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식과 철학이 서로 다른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을 악보로 만나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우리음악’의 아름다움에 그때 눈을 떴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전주 시립예술단체가 함께 서는 무대의 작품을 의뢰받았다. ‘대서사음악극-혼불’이었다. 대본이 완성된 것이 2월, 그에게는 고작 3개월 남짓한 시간이 주어졌다.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맡은 대가는 컸다. ‘혼불’ 작가 최명희 선생 유족은 원작에 누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경고성(?) 요청을 두 번씩이나 그에게 안겼다. 부담은 배가 됐다. 깊은 잠에 들까봐 일부러 불편한 옷을 입고 하루 세 시간 쪽잠을 자면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면도할 시간도 아까워 방치했던 수염은 그때 얻은 격전의 전리품이다.

 

산고 끝에 만들어진 ‘혼불’은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창작오페라 작곡 의뢰를 받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판소리를 접목한 한국적 오페라 작곡이 시작됐다. 첫 작품은 ‘달하 노피곰 도다샤’. 이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논개〉 〈흥부와 놀부〉 〈루갈다〉 등 10여 년 동안 대작만도 5개가 창작되어 관객들을 만났다. 오페라에 판소리를 접합시킨 독특한 양식은 한국적오페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지난해 전주의 호남오페라단 공연으로 전주와 서울에서 발표된 ‘루갈다’는 지성호식 창작오페라의 정점으로 평가 받았다. 창작 기간만 2년이 넘게 걸린 〈루갈다〉는 〈논개〉에 이어 2014년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 선정되는 기쁨을 안기도 했다.

 

음악미학을 담은 책을 내고, 오페라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보다 더 아름다운 한국적 창작오페라를 만들어내는 일이 남은 과제. 22년 전, 작곡에만 온전히 몰두하기 위해 직접 짓고 이사한 완주군 구이면 작업실을 겸한 자택에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행복한 작곡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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