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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끈 노중국 추진위원장 "문화교류 핵심 역할한 '백제'…오늘 대한민국이 가야할 모습"

▲ 노중국 교수는 물 해결의 중심이었던 저수지에도 주목했다. 고대수리시설에 관한 그의 글쓰기는 많은 학자들이 저수지를 연구대상으로 삼게 하는 바탕이 됐다. 그는 자택 인근에 있는 대구 봉무공원 단선지(저수지) 제방을 자주 찾는다. 이 저수지는 일제 시대 것인데, 그는 이곳을 걸으면서 고도의 기술로 수리시설을 축조했던 백제인들을 생각한다. 안봉주 기자

백제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 권역에서 가장 빛나는 문화적 역량을 발휘했지만 700년 찬란한 역사를 끝으로 패망하고 난 뒤, 그 존재조차 미미해졌던 백제의 부활은 흥미롭다.

 

지난 7월, 공주와 부여, 익산을 잇는 8개의 백제역사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수년 동안 등재를 위해 나섰던 학계 연구자들과 관련기관, 자치단체의 협업이 가져온 결실이다. 이 작업을 주도했던 기구가 있다.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과 그 안에서 등재에 관련된 실질적인 일을 진행했던 ‘추진위원회’다.

 

지난 3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갖가지 준비 작업으로 백제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끌어낸 노중국 추진위원장(66·계명대 명예교수)을 만났다.

 

그는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힌다. 학문적으로도 척박하기만 했던 백제사 연구는 1970년대 그의 도전으로 생명을 얻고 꽃을 피웠다. 학문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일은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선행 연구 자료가 거의 없었던 환경에서, 그것도 지역적 연고로도 한계(?)가 분명한 그의 백제사 연구는 더 고달픈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에 대한 그의 기쁨은 컸다. 그는 기쁨의 무게를 ‘학문적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의미’로 선택했던 추진위원장의 역할에 두었다.

 

백제가 부상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주목하고 있는 그는 고대 동아시아의 공유문화권 관점에서 백제의 역할과 가치를 강조했다.

 

“백제는 중국에서 문화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자기화하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일본이나 가야 같은 이웃나라에게 전파했습니다. 문화교류의 핵심 역할을 했지요. 자연히 외교적으로도 특별한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오늘날 국제적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도 백제가 취했던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뷰는 대구 그의 자택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서 있었다. 정년퇴임 이후 개인적인 연구와 저술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노교수와의 인터뷰는 강의를 듣는 듯 특별했다. 한국고대사 연구자로 걸어온 그의 길이 더 촘촘해 보였다.

 

-지역적 연고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한계가 있는 백제사를 연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김철준 교수님 밑에서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고대사를 전공하려고하니 어느 시기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아보니 삼국 중에서도 유독 백제는 거의 없었어요. 신라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고구려였는데 백제는 아예 없더라고요. 그때 ‘다른 사람이 안한 시기를 한번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행 학문적 성과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연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힘들어서 포기할까 고민도 많았죠. 일단 자료가 너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1971년에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백제에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더군요. 기왕에 시작하려고 한 것이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령왕릉이 교수님 연구에 추동력이 되었군요. 일종의 계시가 아니었을까요. 포기하지 말라는.....(웃음)

 

“의지는 다졌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과정은 힘들었어요. 77년에 석사논문을 발표했는데 백제사로 쓴 석사학위 논문 1호가 됐어요. 86년에 발표한 박사학위도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백제사 연구자는 수적으로도 적었고, 연구 작업도 미미했어요.”

 

-고대 삼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도 백제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학문 영역에서도 그 정도가 심각했군요.

 

“다행히 90년대가 되니 백제사로 박사학위를 받는 연구자가 꽤 많아지더군요. 지역도 확산되면서 연구자들의 모임을 만들었어요. 문헌으로 공부한 연구자나 고고학 자료로 공부한 연구자들이 모여 교류하다보니 학문적 활동도 활발해지고 좋은 점이 많았습니다.”

 

-영남 지역 출신이어서 지역적 한계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요.

 

“지금도 영남 지역에서 백제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곧잘 받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면에서 좋은 점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다고 말합니다. 현장을 자주 가보지 못하는 한계는 불편한 점이자 어려운 점이지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역사 연구는 지역 정서가 반영되면 자칫 또 다른 왜곡이 될 수 있거든요.”

 

-등재 추진위 활동을 듣고 싶습니다. 과정이 지난했죠.

 

“처음에는 자치단체들이 각각 등재를 추진했어요. 맨 처음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던 것은 무령왕릉입니다. 공주시와 충남이 94년쯤 잠정목록으로 추진했죠. 세계유산이 되려면 두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하나는 잠정목록에 등재되어야 하고 그 중 한해 하나씩 신청을 할 수 있어요. 일단은 우선 등재가 되어야 신청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당시 무령왕릉은 한계가 많았어요. 그래서 충남도에서 2010년에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를 우선 등재 추진대상으로 다시 신청했어요. 그런데 같은 해에 익산에서도 익산 백제유적지구를 우선 등재 대상으로 신청한 겁니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죠. 결론은 따로 가서는 안 된다.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통합해 추진하게 된 것이군요.

 

“2011년 1월에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이 발족되었죠. 그 밑에 추진위원위가 만들어지면서 제가 위원장을 2012년 5월부터 맡게 됐습니다.”

 

-다섯 개 자치단체가 협업으로 추진한 것이 등재에 상당한 동력이 되었겠군요. 추진위원장으로서도 힘이 분산되지 않으니 다행이었겠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은 결과적으로 등재 되었으니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온갖 우려와 걱정이 많았거든요. 다만 학문하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는 자기연구 열심히 하면서 학생들 잘 가르치는 것이 기본이고, 학문적으로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백제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는 일은 학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백제사를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사명감도 있었죠.”

 

-등재는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와 진정성, 완전성을 동시에 갖춰야 합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등재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죠.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은 4년여 동안 준비해왔는데 그 과정의 핵심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어떻게 증명해내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려면 6개 기준 중 1개 이상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중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류’ ‘문화전통 또는 문명의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축적·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를 주목했어요. 마지막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를 빼고 두 가지로만 증명했죠.”

 

-어려움이 있었겠군요.

 

“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서로 모순된 의미잖아요. 그럼에도 그 가치를 찾아내야 했어요. 분석해보니 그 증거들이 충분하더라고요. 아시아 3국에 불교는 다 있습니다. 공통이죠. 이것은 보편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익산 미륵사의 경우 3탑 3금당이라는 아주 특별한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것은 탁월한 덕목이었죠. 건축기술이나 사후세계를 보여주는 무덤의 구조의 특징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적 전통이나 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적용했고, 이것을 다시 일본에 전해주었죠. 교류와 교류를 잘 보여주는 사례예요.”

 

-진정성이나 완전성은 어땠습니까.

 

“완전성은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어요. 세계문화유산은 기본적으로 건조물이 많거든요. 유물이 아니라 건축물 위주죠. 그래서 지나치게 파괴되고 없어졌다면 완전성을 인정받기 어렵게 됩니다. 결국 그 유산이 얼마나 본래모습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인데 사실 백제역사유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이 취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겁니다. 건조물 중심의 사고는 유럽식 사고죠. 유럽은 석조건축물이 중심이어서 시간이 흘러도 별로 문제가 안됩니다. 그에 비해 동양은 목조건축이 중심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비록 지상부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도 땅속에는 원래의 구조가 잘 남아 있다는 것이에요. 이 점을 유네스코가 인정한 겁니다. 진정성은 손을 댄다 해도 유적의 재질이나 색깔에 원형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느냐의 기준인데 이점에서 가장 우려되었던 미륵사 동탑과 서탑의 경우도 진정성을 규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준을 다 거치고 세계유산이 된 백제 문화의 의미가 더 새롭게 다가옵니다. 당시 백제의 역사적 위상은 어땠습니까.

 

“백제는 천도를 두 번이나 한 나라입니다. 고구려 역시 두 번 천도를 했지만 자발적인 천도였죠. 백제는 한번은 쫓겨 내려와 세운 것이고, 한번은 자발적인 것인데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공주로 내려오면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중국 문화의 확산입니다. 백제는 자연조건으로도 강과 바다를 안고 있어서 수운 해운 교통이 발달했죠. 개방적인 특성을 갖게 된 배경입니다. 선진문화를 받아들여서 자기화 하고 더 발전시켜 주변국에 다시 전달하는 교류 문화는 백제의 가장 큰 덕목이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역사적 위상이 탄탄했다는 이야기도 되죠.”

 

-고대 동아시아의 공유문화권에서의 백제 역할을 주목하시던데요.

 

“고대동아시아 공유문화권을 만들어내는데 핵심역할을 한 나라가 백제입니다. 공유문화권의 기본요소는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한자,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 종교로서의 불교, 사회를 유지하는 법질서로서의 율령, 곧 법이죠. 중국 일본 한국이 공통적으로 다 갖고 있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 율령을 일본에 전해준 것이 백제거든요. 가야에 불교를 전해준 것도 백제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직접 받았지만 백제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2차로 확산시켰죠. 문화교류의 핵심역할을 한 곳이 백제예요. 저는 바로 이 모습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야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한류 열풍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일본에서는 백제 문화의 열풍이 대단했습니다. 백제 이름이 붙은 지역도 많고, 건축과 음악 등 예술 각 분야에 백제문화가 파급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한류의 시작은 백제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제역사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쁨이 크지만 앞으로 과제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은 보존관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근본 목적이 보존이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관광수입을 올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보존할 것인가가 목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메시지예요. 잘 보존하고 관리하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 각 지역마다 특성을 살리면서도 세계문화유산 도시를 어떻게 조성해나가느냐 하는 문제는 시급한 과제입니다.”

 

-익산 미륵사나 왕궁리유적은 다른 도시에 비해 여건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시내권에서 떨어져 있다는 면에서 특징적인 환경을 잘 살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왕궁리는 정말 귀한 유적이죠. 발굴을 통해 드러난 전조후원형 궁궐구조는 유일할 겁니다. 미륵사도 마찬가지예요. 서탑 해체는 아쉽지만 갖고 있는 공간의 의미와 가치,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특별합니다. 이런 요소를 잘 살리면 좋은 공간으로 지켜질 수 있습니다.”

 

-교수님 말씀 들으면서 복원과 상상으로 지켜질 수 있는 유적의 가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령 유럽의 역사유적이 보이는 것의 가치라고 설명한다면 우리 역사유적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방문객들에게 보여줄 구체적 유적이 부족하다고해서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섣부른 복원은 해선 안 됩니다. 사실 백제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7월 4일 이전이나 이후나 그 역사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이 유적들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죠. 첨단 기술과 예술이 결합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노교수는 초등학교 때 읽었던 삼국지를 자신이 역사를 공부하게 된 끈으로 여기고 있다.

 

“삼국지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들은 어려운 시기, 이른바 난세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상황을 극복해갈 것인가를 보여주죠. 별 볼일 없는 사람도 난세를 통해 두각을 드러내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물도 만들어집니다. 큰 교훈이 거기 있더군요. 역사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의 중심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역사는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한시대의 역사를 우리가 반추하며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지 않을까. 백제가 지금 우리 곁에 성큼 와있다.

 

● [노중국 추진위원장은] 지역·학문적 한계 극복한 '백제사 연구 개척자'

노중국 교수는 1949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만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소를 키우며 지내면서 시내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같은 또래 친구들의 등하교길이 마냥 부러웠다. 누군가가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독학으로 공부해 검정고시를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목 과락에 걸려 재수를 하고서야 합격했다. 때마침 계명대 사학과에 전액 장학금 제도가 있었다. 돈을 들이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지도교수의 권유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기왕에 나선 연구자의 길, 고대사 부문의 권위자였던 김철준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 싶어 서울대 대학원을 택했다. 대학원 입학을 하고 공군장교로 군대를 가 4년 5개월 동안이나 군 생활을 했다.

 

백제사를 연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행 연구가 적은 탓에 연구를 진전시켜줄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포기의 유혹’으로 갈등하기도 했지만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백제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의욕이 생겼다. 무령왕릉 발굴은 노교수가 백제사 연구의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한 동력이 되었다.

 

그는 백제사 연구의 개척자다.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이 모두 백제사연구 첫 논문이 됐다.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모교인 계명대 교수로 고향에 돌아왔다. 지역적인 여건으로나 학문적 환경으로나 백제사 연구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백제사 연구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백제사 연구자 모임을 만들어 함께 답사를 다니고 토론하면서 학문교류를 확장시켜갔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백제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공주와 부여, 익산이 각각 따로 추진하던 것을 통합해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을 발족시켰다. 2012년 5월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됐다.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서다. 백제역사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고된 노정이 시작됐다. 2015년 7월, 공주 부여 익산을 잇는 8개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지역적, 학문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제사 연구에 열정을 쏟아온 노교수의 열정이 그 과정에 놓여 있다.

 

문화재위원회 위원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을 거쳐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백제정치사연구〉 〈백제부흥운동사〉를 비롯해 네 권의 백제사 관련 단행본을 펴냈다.

 

36년 동안 몸담았던 계명대를 퇴직한 이후에는 대학 강의를 접고 최종 목표로 삼은 ‘백제생활문화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저술활동과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고 열어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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