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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자 김성호 서남대 교수 "자연과 눈 맞추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삶이 보입니다"

▲ 25년째 자연의 생명을 기록한 생명과학자 김성호 서남대 교수. 그는 자연에 깃든 생명을 지키는 일과 관찰을 통해 얻은 아름다운 생명 이야기를 나눈 일은 이제 삶의 목표가 되었다고 말했다.안봉주 기자

생태에세이 〈나의 생명수업〉이란 책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다. 저자는 7년 전,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펴내 주목을 받았던 생명과학자 김성호 서남대 교수(54)였다. ‘자연의 벗들에게 배우는 소박하고 진실한 삶의 진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의 네 번째 저서. 털어놓자면, ‘자연이야기를 엮어놓은 그만그만한 책’쯤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 근거 없는 추측은 서문을 읽으면서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벗하며 살아온 20여년 세월이 촘촘하게 놓인 이 책은 그저 그렇게 자연 이야기를 풀어놓은 보고서도, 기교 넘치는 글쓰기로 화려하게 치장한 자연예찬의 에세이도 아니었다.

 

‘눈을 맞추면 친구가 되는’ 자연에 다가서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배운 생명과학자가 진솔하게 써낸 자기고백서와도 같았다. 기교 없이도 따뜻하고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이게 하는 글의 힘이 곳곳에서 빛났다. 덕분에 생명을 향한 경이로운 그의 사랑이 일깨워주는 삶의 진리 또한 그윽하고 깊었다.

 

전공이 아닌데도 자연에 깃든 생명을 찾아다닌 지 25년째, 자연의 생명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평생을 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우연히 마주친 고목나무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큰오색딱따구리의 이야기를 50일 동안 움막에서 지내며 관찰하고 기록한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나 〈동고비와 함께 한 80일〉 〈까막딱따구리 숲〉과 같은 생태 에세이로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김 교수와의 인터뷰는 기대보다도 훨씬 즐거웠다.

 

오랜 세월, ‘내 발로 직접 다가서고, 눈높이를 맞추려 내 몸을 낮추고 오래도록 자세히 생각하면서 보기’를 실천하며 자연을 마주해온 그의 일상이 그만큼 생생하고 가깝게 다가온 덕분이었을 것이다.

 

-생태에세이를 여러 권 내셨던데요. 전공과는 다른 분야더군요.

 

“전공은 식물생리학이에요. 식물체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연구하는 것이니 좀 거리가 있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개인적인 일을 따로 하고 있는, 일종의 이중생활입니다.(웃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자연을 관찰하는 일은 때가 있으니 형편에 따라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요.

 

“몸이 좀 고달파서 그렇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제가 잠을 줄이는 연습을 오래전부터 해왔거든요. 그래서 하루를 길게 쓸 수 있었습니다. 관찰하는 동안 딱따구리가 번식에 들어서는 봄에는 하루 두세 시간 정도 자게 되는데 그런 생활을 10년 가깝게 했어요. 물론 강의도 성실하게 했죠. 그런데 이제는 좀 힘들어졌어요. 내 가슴에서 빛나는 것을 찾았는데 너무 늦게 찾아서 이제는 체력이 따라주지 못한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는 교수님을 생명과학자로 주목받게 한 책입니다. 이전에도 지리산 섬진강 일대의 자연과 생명 이야기를 관찰해오셨는데, 왜 딱따구리가 앞서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91년부터 들꽃이며 새, 나무, 식물 등 자연에 깃든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생명 하나하나에 다가서서 하루 종일 그것을 들여다보고 사진 찍고 마음에 고인이야기를 적는 일을 했지만 그런 생활을 17년쯤 하고 나니 지치더군요. 내용도 정보 차원에 그치고요.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얻고 싶었습니다. 그즈음 지리산 자락에서 죽은 고목나무에 둥지를 막 짓기 시작한 큰오색딱따구리를 만났어요.”

 

-그것이 계기였군요.

 

“하얗고 검은 무늬에 빨간색 오색딱따구리를 만났을 때 가슴이 떨렸습니다.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이 빠져들더군요. 그때부터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 떠나보낼 때까지 나무 옆에 움막을 짓고 50일 동안 지켰습니다.”

 

-일상을 지키면서 움막 생활이 가능했습니까.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관찰해야 하는 생활이었는데, 그 사이에 수업이 있으면 나갔다 왔어요. 필요하면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아예 움막에 들어와 지냈죠.”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봄에 시작해 여름을 맞는 때여서 지내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힘든 시간이 있었다면 물리적 고통이 아니라 어린 새를 떠나보낼 때였던 것 같습니다. 너무 섭섭하고 허전해서 울었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그때 배웠어요.“

 

-서남대는 언제부터 재직하셨습니까.

 

“91년 개교와 함께 이 학교로 왔습니다. 임용되자마자 돌을 갓 지난 첫아이를 데리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원에 내려왔지요. 선생은 학교 옆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생물학과가 개설된 학교에서 연구하는 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잘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와서 보니 기본적인 실험조차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암담했습니다.”

 

-지리산과 섬진강 답사를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겠군요.

 

“맞습니다. 사실 대학교수는 연구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직업이죠. 그런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겁니다. 연구를 선택한다면 학교를 떠나야 하고, 학생을 선택한다면 전공을 내려놓아야 했어요.”

 

-자연의 생명 이야기를 찾아 나선 이유겠습니다.

 

“내 몸이 장비가 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았어요. 다행히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슴도 있다는 것이 새삼 소중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지리산 섬진강이라는 자연을 보게 되었는데 지리산 품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행운이었어요. 카메라 하나 들고 땅과 자연에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91년이었어요.”

 

-대상은 어떤 것이었나요.

 

“들꽃부터 온갖 자연에 깃든 생명은 모두 관찰 대상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다가서서 눈높이를 맞추고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더니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기더군요. 글이 늘어나면서 내 몸 속에 고여 있는 생각들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았어요.”

 

-새에 대해서는 지식이 있었습니까.

 

“어느 정도 상식은 갖고 있었지만 깊이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을 택한 겁니다. 큰오색딱따구리를 관찰했던 50일 동안은 새벽 3시에 일어났어요. 사실 그 시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남의 사생활 엿보는데 예의는 지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어둠이 숲을 덮고 나서야 조용히 움막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어요.”

 

- ‘생명에 대한 예의’가 각별하셨군요.

 

“덕분에 숲에서 배운 것이 있어요. 새벽은 빛으로만 열리지 않더라고요. 소리가 먼저 깨어나서 일어나기 시작하죠. 잠들었던 소리들이 깨어나는데 눈으로 볼 수 없으니 귀로 듣고 가슴으로 듣게 되죠. 보이고 들리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있는 일상이 시작된 겁니다. 몸은 고달팠지만 그 작은 변화들이 신비로우니 내일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죠. 1초 앞이 궁금해지고 내일이 궁금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 50일이 되었어요.”

 

-딱따구리가 교수님께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내 가슴에서 빛나는 것이 뭔지를 그때 찾았으니까요. 아무도 없는 숲에서 하루 종일 나무 하나 지켜보고 있는 일을 몇 달 동안이라도 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거죠. 그 다음부터는 그냥 앞을 보고 간 겁니다. 딱따구리가 내 운명을 바꾸어놓은 셈이죠.”

 

-딱따구리에 빠진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딱따구리를 보면서 60년을 목수로 살아오신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저희 집은 늘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가난 속에서도 저희를 사랑으로 키우셨죠.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사실 50일 동안 움막생활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평생을 목수로 살아오신 아버지께 기록으로라도 딱따구리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딱따구리가 새끼를 키워내는 과정이 우리들의 자식사랑과 똑같더군요. 자꾸 나를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책을 읽다보면 쉽고 편안한 글쓰기의 미덕이 돋보입니다. 글 연습을 따로 하셨습니까.

 

“워낙 글쓰기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만 독자들에게 잘 전달된 부분이 있다면 제가 오래 깊이 들여다본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글쓰기가 조금이라도 단련되었다면 글 연습을 본의 아니게 해야 했던 시간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시간이 있었습니까.

 

“글을 많이 쓰는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좀 오지랖이 넓은 편이거든요.(웃음) 이 학교에 오자마자 정년시기를 생각해보니 35년을 근무하게 되더라고요. 정년이 되면 내 삶을 담아냈던 학교를 떠나는 것인데, 그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어요. 일기를 써서 35년의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습니다. 3650통의 편지가 만들어졌죠. 그런데 10년이 되면서 학교가 더 어려워지고 불안해지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자연히 날마다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더군요. 암울하고 아픈 이야기뿐이었어요. 희망도 보이지 않았을 때 일기쓰기를 멈추었습니다. 그 파일은 모두 삭제했죠. 가슴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기록하는 일만 했습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죠. 큰오색딱따구리 이후 연이어 동고비, 까막딱따구리 책을 내셨더군요. 시간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온전히 관찰에만 시간을 쏟을 수도 없고, 마음이 거기에 있으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한해 쉬고 한해 복직하는 식으로 3년을 쉬면서 관찰 작업을 했습니다.”

 

-지리산 일대에서는 볼 수 없는 까막딱따구리를 그래서 관찰할 수 있었군요.

 

“그 새는 강원도와 경기도 인근에서만 만날 수 있어서 학교를 휴직하고 강원도에서 1년 동안 지냈어요. 강원도 화천에 있는 숲인데, 우리나라 딱따구리가 이 숲 안에 모두 살고 있죠. 정말 좋은 숲입니다.”

 

-동고비는 딱따구리와는 다른데 관찰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동고비도 딱따구리 둥지에 붙여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새이니 상관없는 새는 아닙니다. 몸이 작은데 진흙으로 제 몸만 빠듯이 들어갈 수 있게 집을 짓죠. 딱따구리 둥지는 입구가 넓습니다. 거기 붙여서 집을 짓는 것인데, 도감에도 ‘동고비는 딱따구리의 옛 둥지에 진흙을 발라 번식을 하는 새’라고 딱 한줄 나옵니다. 너무 흔한 새여서 눈길을 받지 못하죠. 그래서 지켜봤습니다. 딱따구리 둥지 하나가 허투루 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딱따구리가 살고, 동고비가 살고, 하늘 다람쥐가 살고……. 자연에는 허투루 버려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우리나라 딱따구리는 몇 종이나 됩니까.

 

“쇠딱따구리, 아물쇠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그리고 가장 큰 까막딱따구리까지 6종이예요. 번식일정까지 관찰은 다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할일도 우리나라의 딱따구리를 정리하는 것인데 95% 정도는 되어 있지만 5%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봄부터 여름까지는 딱따구리를 보고 다니죠. 여름에는 팔색조, 긴꼬리 딱새 등을 보고, 10월 11월에는 물수리를 따라 다니는데 계절마다 그들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렙니다.”

 

-25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같은 일을 해오시면서 고비는 없었습니까.

 

“답답한 시기가 있었죠. 이정도면 무엇인가 쥐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자연 속에 있으면 그런 마음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주위에서는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쓰기 전 17년을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큰오색딱따구리〉에 제가 그동안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시간이 다 들어와 있는 셈이거든요. 자연이 제게 가르쳐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은 분들에게 전해드릴 수 있는 것도 그 시간으로 쌓여진 힘 덕분이고요.”

 

김 교수는 생태에세이 뿐 아니라 강연으로도 이름이 높다. 요즈음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꼭 강연이 있게 되는데, 그가 강연과 관련해 정해놓은 우선순위와 원칙이 흥미롭다. 같은 여건이면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 교사, 학부모 순이고, 가까운 거리보다는 먼 거리를 선택한다. 왕복거리에 강연까지 14시간이 족히 걸리는 강원도를 가장 많이 다니게 된 이유다. 강연료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데, 대학 교수로 있는 한 강연료는 받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워 책을 다시 구입해 되돌려준다.

 

그에게 강연은 어떤 의미일까.

 

“때로는 버겁기도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사람들이 고맙습니다. 내 이야기를 통해서 뭔가 삶의 작은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죠. 가장 즐거운 강연이 초등학생들을 만날 때인데,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보면 제 영혼도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큰 행복이죠.”

 

그가 좋아하는 강연 주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번잡한 일상, 손쉬운 것들에 마음 빼앗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그가 자연과 눈 맞추며 지내온 시간을 들여다보니 그의 강연에 객석이 뜨거워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 [김성호 교수는] 지리산·섬진강 일대 자연관찰 기록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펴내

김성호 교수는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목수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3남매를 사랑으로 키웠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60년을 목수로만 살아온 아버지를 그는 가장 존경한다. 부모님은 공부보다는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들에게 단 한번도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덕분에(?) 성적은 늘 꼴찌 근처에 있었다. 휘문고 2학년 때 어머니가 중병을 얻었다. 속 썩인 일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기쁨을 드린 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밤을 새우며 교과서를 외웠다. 겨우 몇 십 등 올라간 성적표에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셨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친김에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싶었다. 어려운 형편에 재수까지 하며 연세대 생물학과에 들어갔다. 석·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스스로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벌었다.

 

1991년 서남대 교수로 임용됐다. 안정된 길이 있었으나 새로 문을 여는 대학이 더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기본적인 실험 장비도 갖추지 못한 환경에서 학자로서의 연구 작업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개인적인 출구가 필요했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그 일대를 누비고 다니며 자연과 눈 맞추고 살아온 그는 2008년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펴냈다. 50일 동안 딱따구리의 둥지가 있는 나무 옆에 움막을 짓고 관찰해온 결실이었다. 2년 후에는 다시 〈동고비와 함께 한 80일〉을, 그 이듬해에는 〈까막딱따구리의 숨〉을 펴냈다. 주목받게 된 이 책들을 통해 생명과학자로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자연에 깃든 생명을 지키는 일과 관찰을 통해 얻은 아름다운 생명 이야기를 나눈 일은 이제 삶의 목표가 되었다. 생태에세이 〈나의 생명수업〉과 〈관찰한다는 것〉을 이어 펴냈다. 서남대 기초의학과 교수. 자연의 진리를 나누는 외부 강연도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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