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매체의 인터뷰였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생명과 권리가 그것이다. 임상의학이 생명존중의 의학이라면 법의학은 권리존중의 의학이다.” 한국 법의학의 살아있는 역사 문국진 박사가 책에서 읽은 내용을 소개한 대목이다. 법의학의 개념을 그때 이해하게 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법의학의 영역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법의학자는 죽은 자들의 사인과 과정을 과학적으로 찾아내고 분석해 객관적 근거로 규명하는 일을 한다. 단순한 기준으로 보자면 사인을 밝혀내는 역할이지만, 법의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왜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의 과정을 규명하는데 더 큰 무게를 둔다. 대개의 경우, 법의학자들이 분석한 죽음의 과정은 우리가 약속해놓은 사회적 질서로부터 이탈한 국면들이다.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이호 교수(47)를 만났다. 이 교수는 전북에서 유일한 법의학자다. 그가 매체를 통해 우리와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대형 참사나 충격적인 사건사고로 죽은 자들의 사인을 규명하는 검안의이자 법의학자로서 그의 활동이 그만큼 두드러져있다는 증거다.
이 교수를 만나러가는 날은 햇빛이 좋았다. 다행이었다. 어둠을 끌어들이는 ‘죽음’을 품어 다시 세상에 내놓는 법의학자의 이야기를 밝은 기운으로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많은 시간을 죽은 자와의 만남으로 이어가는 이교수의 공간(연구실)은 의외로 소박(?)했다.
20년 가깝게 부검의 현장을 지켜온 이 교수가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는 날생선의 비늘처럼 조밀했다.
“법의학의 수준은 한 사회의 건강성을 평가합니다. 죽은 자를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게 되지요. 죽은 자의 사인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죽음을 맞았다면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예방을 할 수는 없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법의학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얻은 교훈을 사회가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인데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법의학자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고민해온 그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러 번 반복만 말이 있다. ‘모투이 비보스 도슨트(Mortui vivos docent), 망자가 산자를 가르친다.’
숱한 부검의 현장으로부터 그가 낚아 올린 이야기는 선명하면서도 무거웠다. 그만큼 사회를 향한 메시지의 울림이 컸다.
-주로 연구실에 계십니까.
“그렇죠. 대부분의 일상이 연구실과 법의학교실에서 이뤄지니까요. 오늘 오전에도 부검이 있었어요.”
-부검이 이곳에서 직접 이뤄진다니 놀랍습니다.
“부검은 통상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해야 하는데 국과수의 인력이 부족한데다 우리 지역에서 변사사건이 발생하면 광주까지 가야하거든요. 관계되는 인력까지 함께 가야하니 시간적 물리적 소모가 크죠. 그래서 국과수와 전북대가 MOU를 했습니다. 웬만한 사건은 전북대에서 할 수 있게 되었죠.”
-그 과정이 꽤 복잡하겠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는 오전 9시에 부검이 끝나고 나면 의뢰해온 검사를 거쳐 감정서를 씁니다. 밀린 감정서도 서야 하고, 제가 부검한 사건이 법정에서 다툼이 있는 경우는 사실관계 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쓰거나 제가 하지 않은 경우에 대한 법의학 자문도 해야 해서 물리적인 일이 많은 편입니다.”
-대중들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나게 되는 법의학자를 상상하게 되는데, 상당히 차이가 있겠는데요.
“현실은 드라마와 많이 다르죠.”(웃음)
-최근 대형 참사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법의학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낯선 영역입니다. 우리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도 인식이 부족한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법의학은 한 사회의 건강성을 평가하는 지표가 됩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의 사인을 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죽음을 사회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었는지를 분석합니다. 만약 사회적 시스템이 잘못되어 한 사람이 죽음을 맞았다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책무를 안게 되겠지요. 법의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법의학의 기능을 통해 발견된 잘못된 시스템을 바로 잡을 자세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인데, 한국사회는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법의학은 권리존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권리를 지키는 일의 가치를 추구하는 법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보존에 있습니다. 사회 안에서 내가 죽음을 원치 않았는데도 죽음이 발생했다면 그 사회는 법에 의해 철저한 규명과 그 원인행위를 한 범법행위자를 처벌해야 하죠. 그것이 개인이 사회와 맺은 약속이니까요.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신체에 대한 질병을 진단하고 병의 경과를 막아주거나 지연시키거나 치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의 생사에 관한 것이죠. 그러나 법의학을 하는 의사는 죽은 자들의 사인과 과정을 과학적으로 찾아내고 분석해 객관적 근거로 규명하는 일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권리침해를 당했는지의 여부, 사회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놓쳤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규명해내는 역할을 하지요.”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사건이 반복되는 사회에서 법의학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에서는 왜 그런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일까요.
“세월호를 비롯해 우리가 경험한 대형 참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그 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월호의 경우만 봐도 한사람의 문제로만 부각시키지 않습니까. 유병언이란 개인만 없었으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건강한 사회라면 유병언 같은 사람이 100명쯤 있다해도 이런 사고는 나지 않아야 합니다.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죠. 그만큼 사회적 안전망이 약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또한 외국의 법의학과 한국의 법의학 차이이기도 합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법의학이 안착된 나라에서는 사망에 접근할 때 누가 죽였는가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방이 가능했는가를 먼저 찾습니다. 이 죽음을 우리가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호주 멜버른 사건의 예가 있습니다. 클럽에서 시비가 붙어 사망한 사건인데 우리나라 같으면 신고한 사람과 목격자가 있고, 증거도 있으니 부검에서 장기파열의 소견이 나오면 끝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거든요. 이 사람의 사인이 복부파열인데, 왜 6시간 만에 사망했는가. 그것을 추적합니다. 이 사람이 병원에 실려 왔을 때 머리 쪽 CT를 찍었어요. 넘어뜨렸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의 복부를 먼저 점검 했으면 살릴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죠. 사람을 사망하게 한 개체의 폭력과는 별개로 응급시스템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겁니다. 이 사건으로 멜버른에 있는 구급대원과 상황실 직원들은 모두 보수교육을 받았고, 의회를 움직여 상황실에 간호사 출신을 배치하게 만들었습니다. 법의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기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월호 사고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아쉬움이 큰데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가 불러온 결과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죠. 왜 배가 침몰했는지를 주목하고 추적하는 대신, 처벌할 사람 처벌했고 보상했으니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세월호를 끄집어내면 뭐하냐는 식으로 덮어버리면 언젠가 배는 또 뒤집어지는 상황을 맞게 될 수밖에 없겠죠. 대구 지하철 참사도 보세요. 기관사가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와 혼자만 나가면서 승객들에게는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거든요.”
-화제를 좀 돌려보죠. 우리나라의 경우 법의학연구소는 얼마나 있습니까.
“국과수 말고는 없죠. 대학에는 물론 없고요.”
-법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법의학연구소 같은 기구의 확산이 매우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예요. 제가 저희대학 산학협력단에 기구를 설치하려고 시도했었는데, 여러 가지 행정적 절차에 의해 포기하고 말았어요.”
-국내의 법의학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50명도 채 안됩니다. 법의학자의 수가 적은 것은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은 권리에 대한 시민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사회의 1프로 미만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엘리트 집단이 선봉에 서줘야 법의학이 사회적으로 안착할 수 있습니다. 법의학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시민정신과 시민의식, 제도가 탄탄한 인프라로 구축되었을 때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법의학의 발전 가능성은 없습니까.
“방법이 없진 않겠지요. 그러나 민주국가라고 하는 기본 전제는 입법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 손으로 뽑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법자로 뽑힌 사람들은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해줘야하고요. 그런데 우리 정치판은 그런 건강성을 찾기 어렵거든요.”
-죽음 앞에서는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한 사회의 시스템은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죽음 앞에서 얻어내는 교훈을 잘 구현해내야 하지요.”
-법의학자의 길은 어떻게 들어서게 되셨습니까.
“운명 같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학생운동을 하게 됐죠. 1989년에 충남대에서 전대협 집회가 있었는데, 그때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조선대 이철규씨의 시신이 발견되었어요. 충남대 집회에 그의 시신이 도착했는데, 온몸은 파랗고 눈은 뜨고 있고, 코에서는 피가 나오고, 정말 처참했습니다. 실종 된 후 보름이 지나 발견되었죠. 고문치사. 그런데 부검의는 사인을 익사라고 발표했습니다. 법의학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은 그때 결심했습니다.”
-당시 국과수의 결과 발표는 공분을 일으켰었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어요. 그때 이런 학문이 있다면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법의학만을 생각하고 왔지요.”
-법의학 분야에서도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영역이 궁금합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분야는 예방법의학입니다. 임상법의학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호주 멜버른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하고 왔어요. 이후 임상법의학을 포함해 예방법의학을 주목하기 시작했지요. 개인적으로는 일련의 과정이 사회학 관점으로 바라보는 학문으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의 안전망 구축에 관한 부분도 제가 추구하는 모토가 되었어요.”
-예방법의학이란 사회적 안정망 구축과 직접 적인 관계가 있겠습니다. 이런 일은 입법기관에서 치열하게 고민해 입법 활동으로 이어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는데요.
“다시 강조하지만 입법 활동은 우리가 투표를 통해서 선택한 사람들이 활동의 중심에 섭니다. 그러니 그들은 시민의 안녕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이런 부문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할 의무를 갖고 시작해야 합니다. 시의원이나 도의원이라면 조례를, 국회의원이라면 법률에 문제 해결을 위한 내용을 담아내줘야 할 시대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곧 후손들을 위한 의무이기도 하고요.”
-혹시 지역 단위에서도 이런 시스템 구축이 가능할까요.
“행정적 절차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지역의회 의원들이 관심을 갖고 자치단체장의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재정자립도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하는 도시가 된다는 것,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죠.”
이 교수에게는 얼마 전에 법의학자로 들어선 제자이자 후배가 생겼다. 덕분에 전북에서 유일한 법의학자란 별칭 대신 전북 1호 법의학자가 되었다. 법의학자로서 가는 길에 더 큰 희망이 생겼다는 그는 인터뷰 말미, 이제 동료교수가 되는 후배가 본질적인 법의학, 우리가 이야기 하는 범죄와 연관된 사법부검을 중심으로 연구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길을 가려고 하는가.
“사회적 안전을 중심으로 한 예방법의학을 연구하고 싶어요. 임상법의학도 그렇고요. 제가 강조하는 사회적 안전 시스템 구축은 뛰어난 한사람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시작해서도 안 되고…….”
법의학자로서 사회적 기여를 삶의 목표로 삼은 이 교수의 존재가 미덥다.
● [이호 교수는] 전북 1호 법의학자…대검찰청 자문위원 활동
이호 교수는 1968년 임실에서 났다. 네 살 때 전주로 이사를 왔지만 교육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도시로 전학을 다녔다. 이과를 선택했던 고등학교 때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공부했고 덕분에 성적이 좋았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전북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사회적 현실에 눈을 뜬 그는 곧바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책읽기를 즐겼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우연히 찾게 된 사회과학서점에서 현실을 바로 보게 하는 책들을 만나면서 사회의식을 다졌다. 대선을 앞두고는 공정선거감시단에서 활동하면서 현장을 지켰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것은 전남대 이철규 열사의 시신을 접하고 나서였다. 사회에 기여하는 의사, 그것도 법의학자가 되겠다는 꿈은 그때 다졌다. 예비의료인으로서 의료인운동도 열심히 했다. 건강한 의료운동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의료인 내부로부터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련과정을 마치고 병리전문의 과정을 거쳐 국과수로 들어갔다. 98년이었다. 1년에 400건이 넘는 시신을 부검하는 생활이었다. 2004년 모교인 전북대 의대 법의학교실에서 그를 교수로 불렀다.
그는 당시 호남에서 유일한 법의 학자였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법의학교수가 자리 잡으면서 전북 유일의 법의학자가 되었지만 최근, 제자이자 후배인 노상재 박사가 교수로 임용되면서 도내 1호 법의학자로 자리를 바꾸었다.
2007년에는 예방법의학 공부를 위해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법의학연구소에서 1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왔다. 이후 예방법의학과 임상법의학은 그가 앞으로 해나갈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돌아보면 법의학을 공부하고 연구해온 길은 외로웠다. 전국 12만 명 의사 중 법의학자는 여전히 50명도 채 안 되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 모르고 법의학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법의학이란 분야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바닥을 칠만큼 척박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죽음으로 부터 배우는 학문’인 법의학의 길에 들어선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사회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시스템 구축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은 그는 시민정신과 시민의식이 사회의 건강한 시스템을 이끌어낸다고 믿는다. 병원의 고객지원실장을 맡아 의료사고나 민원 해결에 앞장서는 일을 미루지 않는 것도 같은 연상에 있다.
방송대학에 들어가 법학석사를 마칠 만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대한법의학회 학술이사이면서 대검찰청 법의학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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