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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나누는 삶 실천하는 박남준 시인 "나에게 아직 나눌 것이 있다는 것…생각만해도 큰 행복이죠"

▲ 올해로 벌써 등단 30년을 맞은 박남준 시인. 그는“나에게 아직 나눌 것이 있다는 것, 나누는 삶을 아직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한“지역문화가 꽃피우려면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그 결과물들이 그 지역에서 무대에 올려지거나 출판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안봉주 기자

‘어쩌면 치미는 슬픔 같은 먼 봄날의 아지랑이/이렇게나마 겨우 늙었다 /강을 건너온 시간이 누군가의 언덕이 되기도 한다/ 두 귀가 순해질 차례다’( ‘마음의 북극성’ 중)

 

나이 한살 더해서일까. 새해 아침 시를 읽다가 유독 마음 둥글게 만드는 문장을 얻었다. 시인을 떠올렸다. 이 시가 실린 그의 일곱 번째 시집 이름은 〈중독자〉. 늘 따뜻함으로 풍요로운 그의 시와 산문을 생각했다. 거친 말도 온 힘을 다해 다독여 순한 말로 되살려내는 시인의 치열함을 품은 시집의 이름은 그래서 왠지 낯설었다.

 

모악산을 떠난 지 13년째.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마을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을 만나러 갔다.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자연 속에서 자연에 순응해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시인을 만나 나이를 더하고 이제 두 귀가 순해질 차례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겨울의 고비에서도 햇살은 마치 봄날 마냥 넓게 퍼진 날이었다.

 

동매마을 맨 윗자락에 자리 잡은 시인의 작은 집, 지붕 아래 곱게 깎아 말린 곶감이 예뻤다.

 

시인은 어느새 우리 나이로 예순이 되었다.

 

“나이 한살 더하는 일이 나는 참 기분 좋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이 먹는 것이 유난히 즐겁고 호기심이 생기거든요.”

 

들을 이야기가 참 많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예정시간을 넘기고도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그의 시력 30년을 돌아오는 동안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지도 다시 알게 됐다. 가슴 따뜻해지는 시인의 이야기를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이 그대로 전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유를 독자들도 알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올해 쉰아홉, 벌써 예순이 바로 앞이더군요.

 

“우리나이로 예순, 내년이 환갑이죠. 나는 60이 되는 나이를 정말 기다려왔어요. 내가 그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궁금했죠.”

 

-늙는다는 것을 기다렸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설레기도 하고. ‘아름다운 관계’란 시에 그 마음을 담기도 했어요.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라고.”

 

-나이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이 어떨까 싶었는데, 이렇게 반색을 하시니…….

 

“내가 마흔 살이 될 때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서른아홉이 끝나는 12월 31일 잠들기 전에 삽십대의 마지막 내 얼굴을 기억하려고 거울을 오랫동안 들여다봤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얼른 거울을 보았어요. 그랬더니 똑같더라고요.”(웃음)

 

-나이 이야기는 끝이 없겠군요. 주제를 바꾸어야겠습니다. 들어올 때보니 예고 없이 불쑥 불쑥 찾아오는 독자들을 향한 경고문이 없어졌던데요. 지금은 그런 무례한 손님들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너그러워지신 것인지.

 

“여전하죠. 그리 너그러워진 것은 아닌데 나이 들어가니 나이 값을 좀 하고 살아야겠다 싶더라고요.”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근경색이었다고 했던가요.

 

“3년 전에 ‘불안정성 급성 심근경색’으로 고생을 했지요. 지금도 자유롭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치료중입니다.”

 

-수술을 받지 않는다고 하셔서 지인들이 걱정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당초 한 번의 수술이 더 남아 있었는데 마음으로는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수술을 않겠다고 작정했거든요. 그런데 주위에서 하도 성화를 하니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어느 날 수경스님과 연관스님이 오셔서 수술비를 놓고 가셨어요. 적은 돈도 아니고. 그런데 수술을 안 할 생각이었으니 그 돈을 빨리 해체해야겠더라고요. 네팔에도 보내고 시민단체도 보내고 다 나누어 없애버렸죠.”

 

-괜찮으셨습니까. 수술비까지 그렇게 없애셨다면.

 

“그런데 작년에 일이 났어요. 시집이 나오고 여기저기 강연까지 다니면서 몸이 좀 안 좋아진 것이죠. 스님들이 화를 내시더라고요. 기껏 수술비 마련해주었더니 다 퍼주었다고요. 그래서 넉달동안 수술비를 채워 병원에 갔어요.”

 

-작년에 등단 30년을 맞아 펴낸 시집 〈중독자〉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역 출판사에서 펴낸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던데요.

 

“나는 보통 원고를 다 쓰고 퇴고도 다해놓고 출판사를 알아봅니다. 지금껏 그래왔죠. 이 시집도 출판을 앞두고 원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수정하고 퇴고하고 있던 때인데 시낭송 행사가 있어서 함양에 갔다가 진주 수목원의 납매(臘梅)가 피었다는 기사를 보고 지인들과 함께 진주를 가게 되었어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진주문고 사장을 만났지요. 진주문고는 오래전부터 좋은 일을 많이 해온 곳인데, 들어보니 출판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역 출판사는 더러 있지 않습니까.

 

“출판사를 만들려는 뜻이 특별했어요. 진주문고가 30년 되어 가는데 지역의 문화환경을 돌아보니 인문학 전문 출판사가 없더랍니다. 이런 환경을 가진 도시를 문화도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싶었대요. 30년 동안 진주 시민들의 힘으로 서점을 키웠으니 이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도둑 제 발 저린다고 그동안 지역문화가 꽃피우려면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그 결과물들이 그 지역에서 무대에 올려지거나 출판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다니면서도 정작 시집 출판은 이름 알려진 서울의 출판사에서 해야 한다고 여겨왔었거든요. 위선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얼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요. 출판사의 첫 작품이 됐죠.”

 

-이 시집에 실린 ‘마음의 북극성’이 유독 마음에 와 닿던데요.

 

“재작년 세월호 사고가 4월 16일에 났는데 20일이 곡우여서 찻잎을 땄어요. 차를 비벼 항아리에 넣고 그날 저녁 발효되는 향기를 맡으며 차가 되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데, 문득 차를 마셔서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작태로 돌아가는데 나 혼자 향기로운 차를 만들고 마시는 일이 갑자기 의미 없어지는 거죠. 자괴감으로 가슴이 미어져왔어요. 지금 나이를 어떻게 먹고 있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었어요. 향기로운 차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이 향기로운 차가 향기로운 말이 되고 향기로운 소문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그래서 세상의 귀가 순해지는 이야기가 들려지고 떠돌게 되면 좋겠다는. 아 그래! 그럼 이 차 이름을 이순(耳順)이라 짓자 생각했어요. 그날 쓴 시가 ‘마음의 북극성’ 입니다. 그래서 이순이란 부제가 달렸죠.”

 

-각별한 의미가 담겨 있군요.

 

“ ‘강을 건너온 시간이 누군가의 언덕이 되기도 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예순 살 쯤 되면 누군가의 등을 기댈 언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자락이 되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쓴 시죠. 사실은 시집 이름을 ‘마음의 북극성’으로 할까 고민했는데, ‘중독자’에 밀렸어요. 그래서 시낭송을 가면 제목이 되지 못한 이 시를 낭송합니다.”

 

-최근 강연을 자주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좀 뜻밖이었습니다.

 

“강연은 제게 새로운 환경이죠. 지난 대선 끝나고 사실 패닉 상태에 빠져 지냈어요.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어서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를 이틀 만에 도끼질을 해서 다 팼어요. 눈뜨면 나가서 허기질 때까지 도끼질을 했죠. 그 즈음 한 고등학교 아이들이 집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듣는 일정이 있었어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도 해줘야 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찾아 왔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어요. 주체 할 수 없이 터져 나온 울음에 아이들이 조용하더라고요. 그 적막감에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숙연했어요.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선생님 저희들이 2년 후면 투표권이 생깁니다. 저희들 위해서 강의를 계속해주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또 울어버렸어요. 희망이 없던 나라의 희망을 본 것이죠. 그래서 힘들어도 열심히 강연을 다니게 됐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인가. 행복이란 뭘까. 다양한 곳 다양한 직업을 이야기합니다.”

 

- ‘동네밴드’는 잘되고 있나요. 밴드를 만든 배경도 궁금합니다.

 

“2008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을 공약으로 내세웠죠. 그때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시인으로서 자괴감이 생기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폭력 앞에 방패가 되어주거나 창이 되어주지 못하는 시인. 이렇게 나약한 것이 시고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이었죠. 다시 걷기 시작해 104일 동안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만든 것이 ‘동네 밴드’예요. 그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했을 때인데, 몇사람이 찾아와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만드는데 가수를 초청하고 싶다는 거예요. 예산을 물었더니 200만원, 조금 무리하면 300만원까지 마련할 수 있다는 거예요. 황당한 상황이었죠.”

 

-우선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겠군요.

 

“물론이죠. 그래서 왜 가수를 굳이 초청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재미있게 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밴드를 만들어보라고 권했죠. 사실 그냥 별 기대 없이 한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전화가 온 겁니다. 밴드 연습하는데 놀러 안 오냐고.”

 

-시작이 흥미롭군요.

 

“집에 있던 기타를 둘러매고 갔는데 연습실 앞에서 들어보니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거예요. 기타를 숨겨놓고 맨몸으로 들어갔죠. 밴드에 참여하고 싶어서 보컬은 안뽑냐고 했더니 오디션을 보래요. 3곡을 불렀는데 안 되겠다고 해서 돌아왔지요.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자꾸 섭섭해지더라고요. 갑자기 제가 갖고 있던 하모니카가 생각났어요. 앞에서 연습을 좀하다가 전화를 했죠. 마침 두 곡 정도에 하모니카가 간주로 들어간다고 해서 다시 갔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모니카 신동’이라며 동네밴드에 겨우 끼었죠. 첫해 무대에서는 겨우 두곡하고 내려와야 했어요. 안내려오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온갖 잡다한 악기를 스스로 구해 어떻게든 끼어들었죠.”

 

(웃음)

 

- ‘동네밴드’하시면서 무엇을 얻습니까.

 

“첫째는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이죠. 농촌은 어떻든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문화를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스스로 연주하고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힐링도 되고 자긍심이 생기는 것 그것이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삶이 우선되는 시대에 돈을 쓰지 않고 벌지 않는 삶을 택하셨는데 지금도 전 재산은 통장에 들어있는 관 값 200만원이 전부인가요.

 

“물가가 올라서 통장 잔고도 300만원으로 올렸어요. 지금도 그 이상으로 돈이 생기면 빨리 나누어 없애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렇게 나누는 삶을 지켜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텐데요.

 

“어렵지도 않은 일입니다. 서로 살아가는 방식 가치가 서로 다를 뿐이죠.”

 

-그런 나눔이 행복하십니까.

 

“물론이죠. 저는 가끔 스스로에게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묻습니다. 명색이 시인이니 한편의 시, 마음에 어느 정도 흡족한 시를 썼을 때가 세상 어느 기쁨보다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라고 답하죠. 또 한 가지는 내가 가진 삶,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나누었을 때 그때 가장 행복하다고 답합니다. 내가 아직 나눌 것이 있다는 것, 나누는 삶을 아직 살아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의 이야기는 내내 즐거웠고 감동스러웠고, 가슴 먹먹해지게 했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시인의 존재는 어떤 것이어야 하냐고 물었다.

 

“혁명가가 되어야 해요. 시대를 제대로 읽어 내는 올곧은 시정신을 가진 혁명가를 늘 꿈꿉니다.”

 

이런 막막한 시대에서도 혁명을 꿈꾸는 시인, 우리 옆에 그런 시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박남준 시인은] 마을공동체 운동·대운하 반대…욕심 없는'지리산 시인'

▲ 모악산을 떠난 지 13년째.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마을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이 인터뷰를 마친 뒤 마당을 거닐고 있다. 안봉주 기자

박남준 시인은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큰누나가 살던 전주로 대학을 오면서 전주 사람이 됐다. 전주대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생활에 대한 기억은 별반 없다. 우리 역사와 현실에 눈뜨게 된 청년 시절의 일상이 온전히 민주화 현장과 길 위에 가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시인〉지를 통해 등단하면서 시인이 됐다. 20대에서 30대로 건너는 길, 그는 가난했으나, 가난할수록 세상을 보는 눈은 뜨거워졌다. 아무리 사소한 것에도 부정 부당한 것을 용납지 않는 성정은 단호한 결기를 더 단단하게 다졌다.

 

80년대 말, 아주 짧게 방송작가 생활을 했다. 궁핍한 삶(?)의 끝에서 선택한 길이었으나 시가 아닌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은 궁핍함 보다 더 큰 고뇌를 안겼다. 다시 전주로 돌아와 문화공간 운영을 맡았으나 1년 만에 전업시인으로 돌아갔다. 모악산 기슭에 거처를 마련한 즈음이었다. ‘산중에서 살면 돈을 쓰지 않는 삶이 가능하겠구나. 그렇다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겠다.’는 깨달음을 그때 얻었다. 최소한의 양식과 음악과 책과 자연으로 온전히 가벼워진 삶을 얻은 모악산 생활은 시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원고청탁이 밀려들어 정신 차릴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경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통장에 내 몸을 누일 관하나 값만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은 그래서 얻은 답이다. 얼마 전 물가 인상을 고려해 300만원으로 올리기까지 오랫동안 그의 전 재산은 통장에 든 200만원이 전부였다.

 

모악산 시인이 된지 12년 만에 지인들의 권유로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마을로 이사하면서 지리산 시인이 됐지만 정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벼워진 삶에 마을공동체 운동이 더해져 뜻 맞는 친구들과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함께 나누며 살 수 있게 됐다.

 

2004년 도법 수경스님과 생명탁발순례를 떠나 제주도까지 꼬박 1년을 걸었다.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면서 걸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2008년 대운하 정책이 발표되자 잠 못 들던 시인은 다시 길 위에 섰다.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 금강을 그리고 다시 거슬러 한강까지 104일을 걸었다.

 

그해 겨울, 마을 ‘늙은 청년들’과 작당해 ‘동네밴드’를 만들었다. 지금은 꽤나 이름을 얻어 여기저기서 부름을 받는 동네밴드에서 그는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무대를 지킬 수 있는 하모니카나 잡다한(?) 악기를 도맡고 있다.

 

1990년 첫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를 낸 이후 5년을 주기로 〈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그 아저씨네 간이휴게실 아래〉, 〈중독자〉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냈으며 산문집 역시 〈쓸쓸한 날의 여행〉를 시작으로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별의 안부를 묻는다〉 등을 5년 주기로 펴냈다.

 

이제는 ‘악양에 뼈를 묻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전주를 오간다.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불러들이는 친구들의 성화도 있지만, 시인에게는 전주가 늘 그리움의 대상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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