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입, 햇빛은 눈부셨으나 바람은 찼다. 겨울 한기가 바람에 얹혀 거리를 부유하고 있는 탓인지 한낮인데도 서울 혜화동 대학로 거리는 스산해보였다.
80년대, 연극으로 기반을 닦아 성장한 대학로 풍경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예전만 못하다. 연극과 음악과 춤과 온갖 예술장르가 맞서거나 함께 호흡하고 환호하며 관객을 만났던 공간들이 힘을 잃은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로는 여전히 예술인들에게 고향과도 같은 공간이다.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 2000년에 이르는 질풍노도의 시절을 몸으로 체험한 연극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원로극작가 노경식씨(78)를 이 거리에서 만났다. 등단 50년, 한국연극의 한 축을 이어온 그의 희곡들은 시대와 시대를 건너는 주제와 사실주의 양식을 기반으로 우리 연극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갖게 했다.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철새’로 당선한 이후 발표한 작품은 40편. 그의 작품은 서너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대를 만나 생명을 얻었다. 그래서일까 공연되지 못한 채 작품집에 갇힌 서너 편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컸다. 2007년 국립극장이 의뢰해 썼던 ‘두 영웅’도 그중 하나였다.
‘두 영웅’은 같은 시대를 살다간 조선의 사명대사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퇴고한 그 해에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묻혀있던 작품을 깨운 것은 지난해다. 문화관광부의 연극인 지원 프로젝트로 만나게 된 무대는 그에게 더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더구나 이 무대는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원로와 중견배우들이 한자리에 서는 의미 있는 자리다.
“초연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동료 배우들이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참으로 반갑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어른스러운 무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크죠. 열연하는 원로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극단 스튜디오 반, 극단 동양레퍼토리가 공동제작하고, 문화관광부와 동양대학교가 후원하는 창작 초연작 ‘두 영웅’ 은 서울 대학로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2월19일부터 2월29일까지 11회 공연된다. 그의 말마따나 모처럼 진중한 연극 한편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인터뷰는 공연장인 아르코 대극장과 연습장으로 쓰이는 대학로예술극장을 오가며 이어졌다.
등단 50년, 시대와 시대를 넘나들고 굽이치면서 관객들을 깨우고 감동시켰던 그의 작품들이 그의 삶이 되어 움직였다. 한 길로만 걸어온 삶이 빛났다.
-건강해보이십니다. 작품 집필도 여전하신지 궁금합니다.
“그렇진 않아요. 집필에 대한 의욕도 좀 떨어지고 해서 오랫동안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마음에 두고 있던 작품 하나를 탈고 했어요. 요즈음은 ‘두 영웅’ 공연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괜히 들떠 있습니다.”
- ‘두 영웅’은 오랫동안 묻혀있던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이 초연이죠.
“2007년에 쓴 작품이니까요. 국립극장에서 위촉한 작품인데, 그해에 올리지 못했어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여서 그냥 묻히겠구나 싶었는데 기회가 오네요. 사실은 작년이 한일수교 50주년이어서 내심으로는 이 작품을 올릴 수 있는 좋은 때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지나고 말아 아쉬웠거든요.”
-위안부 문제로 한일외교 협상 결과가 큰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두 영웅’도 들여다보면 한일외교의 면면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겠던데요.
“시대만 다를 뿐 상황은 거의 비슷하죠.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협상을 다룬 작품이니까요. 무대는 일본인데, 1604년 조선에서 탐적사로 파견된 사명당이 그곳에서 활약하는 작품을 담았어요. 사명대사의 역할은 말 그대로 적국 일본을 정탐하는 역할과 두 차례의 왜란으로 잡혀간 선량한 조선인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협상의 사명을 띤, 길고도 긴 여정이었죠.”
-이 두 사람을 ‘영웅’으로 내세운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이 이야기는 4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지요. 8년 전에 써놓은 이 작품을 꺼내들면서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것이 없을까 놀라웠습니다. 최근 위안부에 대한 합의 내용을 보면서는 더더욱 그랬지요. 그러나 400여 년 전, 이 두 사람의 외교를 보세요. 화해를 성공시켰잖아요. 양국의 전쟁을 마무리하며 강화를 했습니다. 수교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지요. 결국은 두 사람 사이에 구축된 신뢰로 이어낸 결과예요. 저는 서로에게 신뢰를 갖게 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나라를 살리고 시대를 살리죠.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그런 영웅을 만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불행한 일이죠.”
-이번 작품은 제작 배경도 그렇고 의미가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문화관광부에서 원로 연극인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무대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영수 남일우 권성덕 이인철 이호성씨 등 원로 중견배우들이 모두 출연해요. 우리들끼리 만나면 ‘오랜만에 어른스러운 연극한번 하자’고 말합니다. 가볍지 않은 무대를 보여주고 싶어요.”
-70대 이상 원로배우들이 한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뜻이 있겠습니다.
“사실 국립극단이 해체되고 재단법인이 된 이후 이런 무대 제작은 어렵게 되었죠.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국립극단 단원으로 수십 년 지내왔던 배우들은 지금 모두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어요. 소속이 거의 없죠. 원로나 중견들은 그래도 이쪽 연극판에서 활동하다가 국립극단 소속이 되었으니 돌아갈 곳이라도 있지만 젊은 단원들은 갈 곳이 없어요. 오도 가도 못하는 ‘낙백’이죠. 제 아들도 그들 중 하나예요.(웃음) 보기 안타까워서 극단을 하나 만들어보라고 조언도 하지만 현실이 녹록치 않죠.”
-국립극단 뿐 아니라 무용단도 그렇고 합창단도 그렇고 모두 재단법인화되면서 소속 상근단원제가 아니라 시즌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더군요. 장단점이 있을 텐데요.
“저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립극단도 기존 단원을 해체하고 법인으로 출범하면서 시즌단원제라 해서 오디션으로 작품별 출연진을 모집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배우를 성장시키는 틀을 갖고 있는 국립극단의 해체는 아쉽습니다. 연극은 극적인 앙상블이 중요하거든요. 오랫동안 서로 다지고 호흡해야만 이뤄지는 가치예요. 국립단체 해체는 나라의 문화정책이 그만큼 뿌리 없이 흔들린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 ‘두 영웅’이야기를 좀 더 해보죠. 작품의 소재는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서 담판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대단했던 분 같아요.
“물론입니다.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쟁을 그만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진짜인지 화해할 뜻이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러 간 비공식 사절입니다. 탐적사라고 했지요. 그가 그 역할을 위해 일본에 들어간 것이 1604년이거든요. 1607년 5월에 돌아왔죠. 그 긴 여정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자기 목적을 이뤄낸 겁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신뢰가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그들의 외교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죠. 1607년에 조선에서 일본에 정식 사절을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통신사 제도 아닙니까. 그 기초를 이 두 사람이 만든 셈이죠. ‘두 영웅’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명대사를 다시 보게 되는군요.
“우리에게는 고난의 위기마다 나라를 구하고 시대를 구한 영웅들이 많습니다. 사명도 그중의 한 사람이죠. 그가 비공식 사절로 가게 된 것도 사실은 조정의 내로라하는 관료들 중에서는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사료를 보면 사명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임진록’에는 그와 관련된 믿기 어려운 전설이 많아요.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선생님 작품을 보면 시대의 폭이나 다루는 소재의 폭이 넓습니다. 주로 국난을 겪는 시대상이나 위기가 고조되었던 시대가 배경이죠. 특별히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연극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그릇과 같습니다. 나는 어려운 시대에서도 고난을 극복하고 나라와 자신들의 삶을 지켜온 민초들의 힘을 높이 평가합니다. 역사와 인물을 다루거나 분단문제를 다루거나, 대도시 사람들의 이야기거나 농촌의 토속성을 다루거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똑같습니다. 제 작품을 통해 불행한 역사를 온전히 드러내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지요.”
-작가로서 현실참여도 앞장서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7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도 참여하셨었죠. 예술인들의 사회적 발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적 발언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작품은 작가의 철학과 사상을 반영하는 그릇이에요. 사회적 발언이 필요한 국면이라면 당연히 나서야지요.”
-화제를 좀 돌려보죠. 연극의 길로 들어선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다만 어린 시절 남원에서 하나밖에 없는 극장 뒤에 살았어요. 악극단 공연이 가끔 있었는데, 그때 공연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극작가가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특별한 계기를 굳이 꼽으라면 대학 1학년 때 황순원 선생님을 만난 것일 겁니다. 선생님이 글쓰기를 독려하셨으니까요.”
-지난해에 탈고했다는 작품이 궁금합니다.
“이제 집필에 대한 의욕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래도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두 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4.19를 다룬 것이고 하나는 고향이야기를 쓰는 거예요. 작년에 쓴 신작이 4.19를 다룬 것입니다. ‘봄 꿈(春夢)’이라고 이름 붙였죠.”
-왜 굳이 4·19를 다룬 것이어야 했습니까.
“내가 4·19세대예요. 대학 3학년 때 4·19가 나고, 4학년 때 5·16 쿠데타가 있었죠. 나는 앞장서 치열하게 나서지는 못했지만 참여는 했습니다. 4·19세대 작가로서 늘 마음 빚이 있었어요. 우리 문학예술사를 둘러보면 6.25나 다른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작품은 많은데, 4·19 민주 혁명을 다룬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저는 그 이유가 4·19가 난 1년 후에 5·16쿠데타가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4·19는 묻혔죠. 작품을 쓸 사람이 없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내가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었어요. 작년 겨울에 장막극 ‘봄꿈’을 탈고했죠.”
-어떤 내용입니까.
“4·19는 혁명의 주도세력이 따로 없습니다. 국민이 주체였지요. 학생들부터 구두 닦는 거리의 아이들까지. 특정한 영웅이 아닌 레미제라블처럼 민초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다루었어요. 민초들이 엮어내는 큰 흐름, 그 의지로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름 없는 사람들의 혁명사라고 할 수 있어요.”
등단 50년의 시간위에 올려진 그의 40편 장막극은 과하지도 빈약하지도 않는 적당한 양이다. 게다가 그 대부분의 작품이 공연되었고, 일본과 프랑스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작가로서는 행복한 일이다.
누구보다도 연극 보는 일을 치열하게 해온 그에게 오늘의 연극 지형을 물었다.
“연극 무대가 왜소하고 가벼워졌다고 할까. 연극 뿐 아니라 모든 장르가 다 그렇게 되었죠. 사적이고 표피적이고 규모로는 왜소하고 소극장으로만 몰려들고 소재도 그렇고. 인생의 깊이라든지 사회에 관한 깊은 천착이나 성찰을 담은 작품은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아요. 안타깝지요. 그래서 요즈음은 연극 보러가기도 겁이나요. 연극이 보기 싫어질까봐…….”
그래도 그는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고 말한다. 그 희망을 모처럼 올리는 ‘두 영웅’ 객석을 꽉채울 관객들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노경식 극작가는] 역사적 상황·인물 주로 그려낸 '정통 리얼리즘 극작가'
극작가 노경식씨는 1938년 남원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남원에서 마쳤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났으니 60년 가깝게 타지에서 살았으나 남원 억양을 아는 사람들은 대화만으로도 그가 남원 사람인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2대 독자였던 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공부 잘했던 그는 서울대 경제과를 지망했으나 첫해 낙방하고 후기였던 경희대 경제학과를 들어갔다. 대학 1학년 때 교양국어를 가르쳤던 황순원 교수가 학보에 기고한 그의 글을 보고 글쓰기를 권했다. 학교의 문화상 공모에 처음으로 희곡을 써서 당선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문학은 그가 걷고자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를 키운 할머니는 손자가 은행원이 되는 것을 유일한 소원으로 삼았으나 직장생활에 별로 뜻이 없었던 그는 군대문제까지 여의치 않게 되자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드라마센터에 연극아카데미가 개설되자 망설이지 않고 서울로 올라가 극작반에 들어갔다. 연극과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철새’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는 출판사 편집자를 거쳐 81년 전업 작가가 되었다. 71년 발표한 ‘달집’은 그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 ‘달집’은 국내는 물론 일어로 번역되어 일본 공연이 이루어질 정도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동안 발표한 작품은 40편.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운이 좋았던’ 덕분에 3~4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대 위에서 생명을 얻었다. 무대를 만나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희곡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그는 그만큼 스스로를 행복한 극작가라고 생각한다.
한일관계의 얼크러진 역사를 주목해 역사적 상황과 인물을 그려내는데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그는 ‘달집’이나 ‘소작지’ ‘징게맹개 너른 들’을 비롯,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담아내거나 ‘천년의 바람’ ‘서울 가는 길’ ‘하늘만큼 먼 나라’등 시대상황을 담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을 연극무대로 끌어들였다. 한국 현대 연극사를 관통하는 등단 40여년 궤적으로 그는 유치진, 차범석으로 이어지는 정통 리얼리즘 극작가로 꼽힌다.
65년 등단한 이후 출판사에 몸담았던 시절을 거쳐 전업 작가로 살아오는 동안 온전히 극작에만 매달려온 그는 백상예술대상 희곡 부문을 세 차례나 수상했으며 한국연극예술상, 서울연극제 대상, 동아연극상 작품상, 대산문학상, 동랑 유치진 연극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이 그 앞에 놓였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극작으로 건재한 그의 작품 하나가 올해 초 무대에 올려진다. 2007년 국립극장이 위촉해 쓴 ‘두 영웅’. 작품은 완성했으나 공연되지 못해 텍스트로만 남아있던 작품이다. ‘두 영웅’은 초연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수십 년 같은 길을 걸어온 원로배우들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자리라는 점에서 그에게 각별한 의미다. 19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대극장에서 올리는 ‘두 영웅’은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과 일본의 두 영웅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웅이 사라진 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서울연극협회 원로회의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차범석연극재단 이사, 사명당기념사업회 이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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