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와 1990년대, TV앞에 우리를 불러놓고 한국역사와 한국문화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었던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한국탐구〉 〈한국의 이미지〉 〈한민족탐험〉 〈잊혀진 전쟁〉 같은 프로그램이다.
털어놓자면 연속기획물로 방영되었던 이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들에 마음을 빼앗겨 역사책을 다시 읽고 우리 문화를 만나면서 옛 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만큼 프로그램이 준 감동과 충격이 컸던 것인데, 사실을 추적해가는 탐구의 세계인 다큐멘터리의 힘을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돌아보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의 어둡고 처절한 역사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나, 이미 사라지고 잃어버린 문화의 원형과 정신을 찾아 그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놓는 일은 오랫동안 금기시 되거나 묻혀있던 영역이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은 그만큼 더 고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만들어낸 이동석 다큐멘터리 감독(68, N미디어 회장)을 만났다. 정신을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도전조차 쉽지 않았을 이 고된 영역에 뛰어들어 꼬박 35년 동안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만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직접 연출한 작품만도 200여편.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수많은 작품들은 거개가 명징한 주제를 인간적 감성으로 담아낸 것들이다. 덕분에 그의 이름은 독립제작사, 특히 다큐 PD와 작가들 사이에선 ‘전설’이 됐다.
인터뷰는 즐거웠다. 방송으로만 만났던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을 그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억으로부터 불러냈다. 귀한 시간의 궤적들이 살아나 다시 가슴을 뛰게 했다.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쏟았을 열정과 고된 노동의 시간을 짐작해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다큐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논리적이지만 결코 단호하게 규정짓지 않는 철학을 지키며 다큐멘터리 PD로만 일관되게 살아온 삶의 노정에 답이 있었다.
-아직 현역이시죠.
“이제 물러났죠. 현업에서 나온 지 여러 해 되었어요. 지금은 가끔씩 후배들 작업을 자문해주고 있는 정도죠.”
-40년 가까운 시간을 제작현장에서 보내셨는데 축적된 경험과 제작 노하우를 가두어놓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많은 제자와 후배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격려하고 힘이 되어 주는 것이겠죠.”
-방송일은 어릴 적 꿈이었습니까.
“그렇진 않아요. 신문기자였던 아버지 영향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국어선생님 말씀을 듣고 신문방송학과를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기자가 아닌 PD가 되신 것은 군기 때문이었군요.(웃음)
“대학 4학년 때 TBC 방송실습과정을 거쳤는데, 실습생 중에 2명이 특채됐어요. 저는 드라마를 하고 싶었는데, 신임 PD를 선임하는 편성부장이 다큐파트로 불렀어요. 그때 막 다큐라는 형식이 들어왔거든요.
-처음부터 다큐로 시작하신 셈인데, 마무리까지 다큐로 하셨으니 흔치 않은 과정입니다.
“그렇게 되었네요. 당시는 드라마나 엔터테인먼트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큐라는 길을 일관되게 걸어갈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할 일이예요.”
-살다보면 그런 계기나 인연이 참 소중한 것 같아요.
“맞습니다. 저도 제 인생에 가르침을 준 선배들이 있어요. 군대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인연이 된 분들인데 제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잘 살아올 수 있었다면 그분들의 덕분이지요.”
-감독님이 권해주신 글 중에 ‘조차장’이야기가 감동이었습니다.
“ ‘조차장’은 제 직속 선배였어요. 나이로는 다섯 살 위였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의식과 정신세계를 가진 분이었죠. 공은 후배들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이 안는 것은 물론이고 늘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는 분이었지요. 일화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에게 그는 ‘전설’이었어요. 그런 선배를 만났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죠.”
(이 감독은 인터넷 카페 하나를 소개했었다.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의 일화와 경험을 글로 올린 카페였다. ‘내가 만난 사람들’편에 ‘조차장’ 이야기가 있었다. 단숨에 여러 편 글을 읽었는데 드라마 한편을 보고난 느낌이었다.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
-그런 선배가 지켜주고 있었으니 일하는 보람이 컸을 것 같습니다.
“자존감이 강한 만큼 내공도 깊은 그 선배가 교양팀의 차장으로 있었으니 우리 팀은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자존심과 옮고 그름에 대한 판단, 비판에 강했어요. 어느 날 정신적 육체적 고단함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사표를 내고 집에 처박혀 잠자고 음악 들으며 지내고 있었는데 입사동기생이 찾아왔더군요. 조차장이 ‘차장이 싫어서 사표는 내는 거라면 이대로 끝내고, 회사가 싫어서 그런 거면 빨리 나와라. 회사는 우리가 노력해서 고치면 되는 거니까’라는 말을 그대로 전하라고 했다면서. 이튿날 출근했어요.(웃음)”
(조차장은 어느 날 불쑥 이 감독에게 말했단다. ‘나는 말야, 이런 예감이 들어. 당신은 방송생활을 민족의 문제, 한민족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일로 시종할 것 같은 예감.’ 돌아보면 그의 작업 대부분이 ‘민족’이란 주제로 엮어져 있으니 그 선배의 예감은 기막히게 적중한 셈이다.)
-감독님 첫 작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카메라의 눈’인데, 10분짜리 가십 프로그램이었어요. 한주간의 이슈를 다루면서 고발도 하고 알리기도 하고. 피디저널리즘이랄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제를 좀 돌려보죠. 2001년인가요. 〈인간극장〉이 방송됐습니다. 반향이 컸지요. 휴먼다큐란 새로운 형식도 그렇고, 다루는 주제가 주는 따뜻함도 그렇고. 감독님 제작사 작품이죠.
“맞아요. 휴먼다큐멘터리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인데, 그 전까지 제작된 휴먼 프로그램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제작을 했어요. 당시 유행했던 것이 입지전적인 인물을 다루는 것이어서 내용이 부실하거나 재미가 없으면 침소봉대하는 예가 많았어요. 그런 환경이니 프로그램에 어떤 틀이 생기게 되겠죠. 책의 소제목 같이 완전히 정제되고 가로세로 구획 정리 된 듯한, 그렇게 매끈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죠.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쉽게 식상해 합니다.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런 식이 되는 거죠. 새로운 휴먼다큐를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그대로 전달하는 형식이었죠. 시청자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시청자들의 몫에 맡기고 전달에 충실하자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극장〉입니다.”
-사실 감독님이 운영하셨던 ‘리스프로’도 인간극장 때문에 알게 되었거든요.
“리스프로는 제가 만든 독립제작사예요. 프로덕션 2호지요. 〈인간극장〉은 2001년에 안성에 있는 방송대학 기숙사에 우리 회사 PD와 작가 20여명을 합숙시켜가며 얻어낸 결실입니다.”
-지금까지도 방송되고 있으니 15년 장수 프로그램이군요.
“우리는 2008년 회사 문을 닫으면서 그만두었어요. 당시에는 30명 정도가 7개 팀으로 나누어 제작을 했는데, PD 작가 자료조사원 조연출 등 한 팀이 아이템을 결정해 제작하는 형식이었죠. 그때는 전 과정을 점검하면서 소제목까지 함께 정했어요. 소재발굴부터 완성까지 철저한 검증을 그쳤죠.”
-〈인간극장〉은 리스프로 식구들이 함께 일궈낸 대표작이었군요.
“그런 셈이죠. 독립제작사는 스스로 방송을 해보겠다고 들어온 사람들이어서 열정과 의욕이 대단합니다. 군인으로 치자면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에서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모여드는 지망생들이거든요. 촬영부터 편집까지 과정은 물론이고, 방송 저널리즘도 다 넣어주어야 하죠. 남다른 결속력이 생기게 됩니다.”
-제도권 방송국에서는 그런 과정이 시스템으로 정착되어 있지만 독립제작사 같은 경우는 그렇지 못하니 어려움이 컸겠습니다.
“장단점이 있지만 독립제작사 출신 PD들은 전사가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경비 시간 장비까지 어느 것 하나도 충족한 여건에서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실력도 더 쌓아야하고 노력도 더해야 하죠.”
-한때 ‘리스프로’는 정말 잘나갔던 제작사였지 않습니까.
“일하는 식구가 120명이나 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늘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프로그램을 하나 맡으면 최소한의 인건비는 나오니 유지할 수는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늘 불안하거든요. 관례적으로는 6개월 단위로 방송국 프로그램이 편성되는데 6개월로 끝나버리면 인력도 빼게 되니 가슴이 아프죠. 공간도 그렇고요. 덕분에 이사도 수없이 다녔습니다.”
- ‘리스프로’의 대표작이 많지요.
“인간극장 전에 〈현장르뽀 제 3지대〉가 있었어요. ‘기자들 뒤통수치는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었죠.(웃음) 〈어른들은 몰라요〉 〈무한지대 큐〉 〈퀴즈 대한민국〉 같은 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거의 롱런 했어요.”
-처음 두 명으로 시작한 회사의 성장도 놀랍거니와 앞날이 창창하던 방송사를 나와 독립제작사를 열었던 용기가 궁금합니다.
“부장이 되고 보니 중간 역할의 어려움도 그렇고 그 과정에서 안게 될 갈등과 스트레스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어요. ‘여섯시 내 고향’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사표내고 나왔죠. 방송을 안하겠다고 나온 터여서 2년 동안은 방송과는 다른 분야의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런데 식구들이 늘면서 젊은 친구들이 방송 쪽으로 마음을 두더라고요. 모른 척 할 수만도 없어서 방송 쪽 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갑과 을의 관계로 일하기는 싫더군요. 온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 존중해주는 여건에서 일을 할 수 있었죠.”
-현장에서 뛸 때의 다큐와 지금 다큐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요즈음은 방송을 안보니 알 수 없어요. 프로야구 중계나 고전영화 정도 보는 것이 전부지요.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메커니즘이 많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우선은 외형적으로도 화질이나 화면 스케일이 달라졌잖아요. 고급화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다큐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이나 자세가 그만큼 따라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장인정신으로 내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지금은 시스템화 되면서 ‘직장’이라는 인식이 더 큰 것 같더군요. 필생의 업이나 소명의식으로 하기 보다는 직장일로 하는……. 들어보면 제도권 방송사가 아닌 독립제작사들은 3D 업종 비슷하게 인식되면서 특히 다큐멘터리 PD가 갈수록 줄어든다고 해요.”
-우리나라의 방송프로그램도 큰 폭으로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현장에서 투쟁하다시피 제작해온 독립제작사의 공도 큰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방송 내부에서도 많이 발전했고요. 일단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니 거기 맞추는 노력이 필요했겠죠.”
-다큐의 흐름은 어떻습니까.
“세계적으로는 퇴조 현상이에요. 일단 따분하고 딱딱하잖아요.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대로 보는 시청자들이 많지 않을 겁니다. 문화 환경 변화와도 관계가 있지요. 다큐멘터리는 원인과 결과로 짜입니다. 중간에 놓치면 벽돌 한 장 빠진 것처럼 앞뒤의 맥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논리적인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집중해 보아야 하는데 가볍고 흥미 있는 프로그램들 속에서 시청자를 붙잡고 있기 쉽지 않아요.”
-예능이 대세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겠습니다.
“요즈음은 다큐멘터리도 ‘예능 플러스 다큐’ 비슷한 형식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코미디니 예능이니 경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게 되었거든요. 그렇다보니 다큐멘터리 작가도 줄어들고 있다고 해요. 활동하고 있는 다큐 작가들도 현실적으로 고민이 많고요. 어느 방송사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교양팀을 아예 없앴다고 하던데요. 사실이라면 안타까운 일이죠.”
-대학에서 인문학 순수예술이 구조조정 되는 상황과도 같군요.
“방송도 문화니까 변하는 것이 당연하죠. 그렇긴 하지만 기본적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안 되는 일이예요.”
이 감독은 나직하고 정갈하게 대화를 한다. 그래서 현장에서만 30여년, 온갖 역사물과 문화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겪었을 극적이고 역동적인 순간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정제된 논리와 분석이 바탕이 된 진실의 힘이 아주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종군위안부 역사를 밝혀내는 이야기가 그랬고, 한민족의 근본적 심성을 밝혀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던 한민족탐험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카톡에 올라있는 그의 말풍선 글이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잘 계시죠.’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배려. 더 이상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 [이동석 감독은] 방송사PD·광고기획자에서 독립제작사 설립, 다큐멘터리 지평 넓혀…감동 주는 작품 고수
이동석 감독은 김제가 고향이다. 세 살 때 전주로 이사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전주에 살았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전주를 떠났지만 여전히 전주 사람이다.
그는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입문했다. 방송국 PD가 된 것은 기자였던 아버지의 영향과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조언이 컸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 그가 존경했던 선생님은 신문방송학과를 권했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대학신문사에 들어갔으나 워낙 센 군기에 눌려 포기하고 대학 방송국으로 옮겼다. 후에 방송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계진 김종호 씨 같은 좋은 선배를 그곳에서 만났다. 대학 4학년 때 TBC가 졸업반 대상으로 개설한 방송실습이 끝나고 특채로 임용 됐다.
1975년 방송국을 그만두고 광고기획사를 냈으나 2년 만에 손을 들고 ‘오리콤’에 들어가 카피라이터 밑 광고기획자로 일했다.
1981년에 다시 KBS에 입사했으나 교양제작국 부장으로 승진하던 해에 퇴사해 MBC프로덕션에서 2년 동안 역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1993년 독립제작사 ‘리스프로’를 설립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한국탐구〉시리즈나 〈한국의 이미지〉 〈김용운 교수의 한민족 탐험〉 〈이민 이후 한인들〉 〈잊혀진 전쟁〉 등 민족적 문제를 천착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두 명으로 출발한 ‘리스프로’는 독립제작사 중에서도 실력 있는 제작사로 성장해 2008년 타의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다큐멘터리 영역의 지평을 열고 넓혔다. 〈현장르포 제 3지대〉 〈인간극장〉 〈퀴즈대한민국〉 〈생방송 큐〉 〈스님 성철 큰 스님〉 등이 리스프로가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한국방송대상, 백상예술대상, 한국방송위원회 프로그램상 등을 수상했다.
현장에서 뛰던 시절, 자료 수집을 위한 ‘잘 드는 가위와 날선 칼’이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충분한 자료를 통해 밀도 있는 구성을 하지 않으면 다큐멘터리의 완성도를 얻기 어렵다는 믿음은 그가 직접 연출하고 제작한 모든 프로그램에 적용됐다.
‘감동이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다큐멘터리를 남기고 싶었다.
그 역시 회사 문을 닫은 고통을 견디며 1년 반 동안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후배들과 제자들이 스승의 날에 보내온 수많은 카드꾸러미에 감동하며 힘을 얻었다.
그의 한글 글씨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한 후배가 현업을 떠난 그에게 글씨를 컴퓨터 서체로 만들어볼 것을 권했다. 그래서 시작한 한글 서체 폰트 개발을 위한 붓글씨 쓰기는 지금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최근엔 부안마실축제 총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됐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