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의 일이지만 아직 생생한 풍경이 있다. 여름이 막 지나고 있던 9월 한낮이었다. 시인과 시인의 제자인 아이들이 길 위에 섰다. 임실군 장산리 진메마을부터 천담까지 이르는 십리길. 길 위의 아이들은 걷지 않았다. “넘어질라, 뛰지 말고 걸어.” 선생님은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서지도 걷지도 않았다. “그렇게 뛰어가면 들꽃을 볼 수 없다”고 소리치자 그제야 아이들이 섰다.
길 밑으로 강물이 조용히 흐르고, 반짝이는 나뭇잎과 온갖 풀숲으로 넉넉해진 나지막한 산들이 엎드려 있는 동안 들꽃들이 피고 지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 꽃들이 있고, 맑은 강물이 있고, 저기 산을 봐라. 나무들은 또 얼마나 예쁘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것처럼 놓여있던 그 길은 시인이 나고 자란 진메마을을 거쳐 천담으로 흐르는 섬진강 물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다. 강이 꺾어지는 지점이면 어김없이 길도 꺾어지지만, 길이 이어지는 동안 산도 물도 따로 가지 않으니 강길 이랄 수도, 산길 이랄 수도 없었다.
가을로 가는 늦여름 들꽃들이 지천이었던 천담 가는 길에 시인은 오래전, 또 다른 시인들을 불렀었다. 앞서 세상을 떠난 김남주 이광웅 시인이다. 들꽃과 강물과 나무와 숲과 ‘산중문답’. 가진 것 없이 걷는 길을 시인들은 좋아했다. 김남주 시인은 이 길을 따라 걷는 행복을 ‘별천지 비인간’이라고 했었다던가.
강물 흐르는 소리가 잦아들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환하게 울렸던 그 길은 이제 잘 다듬어진 산책길로 모습을 바꾸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로 가득 채워지는 길이 되었다.
시인은 2008년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을 한 그 해에 고향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8년. 시인은 다시 돌아왔다. 산과 들, 다시 지천으로 꽃이 피어나는 봄날이었다.
김용택시인(68)을 만나러 갔다. 시인이 돌아온 진메마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가 살았던 오래된 기와집은 낮은 돌담을 거느리고 더 낮게 내려앉았다. 뒤편에 들어선 새로운 공간들을 배려한 조화다.
시인을 찾아간 날, 진메마을 앞 낮은 산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산벚나무 꽃이 보이지 않았다.
“밤새 비바람이 세게 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벚꽃이 다 떨어졌네요. 산벚꽃이 피어나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때인데…….”
전주살이 시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그는 들판에 벌거벗고 서있는 듯,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소리에 밤새 뒤척이다 깼다고 했다.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처음 전주로 갔을 때의 낯설음을 이제는 바뀐 환경으로 다시 안게 되었으니……. 곧 괜찮아지겠죠.”
환갑을 넘긴지 오래지만, 시인의 웃음은 여전히 아이 같다. 인터뷰 하는 내내 그의 웃음소리가 ‘낯설다’는 그의 새로운 공간 안에서 유쾌하게 떠다녔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괜한 걱정이다 싶었다.
-몇 년 만인가요. 고향집에 다시 돌아오신 것이.
“아내와 두 아이가 96년엔가 전주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한동안 어머니도 계시고 학교도 있어서 전주와 고향집을 오가며 살다가 2008년 퇴직한 해에 전주로 갔습니다. 가족들은 20년만이고, 나는 8년 만에 돌아온 셈이군요.”
-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많았어요. 전주의 아파트 생활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미 익숙해져버려 다시 시골생활로 돌아가는 것에 자신이 없었죠. 그래도 아이들이 다 커서 떠나고 아내와 단둘이 지내다 보니 고향집이 그리워지더군요.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니 빈집이지만, 인생의 마무리를 이곳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또 원했고요.”
-계기는 따로 있었죠.
“사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일이었는데, 임실군이 ‘섬진강 벨트 사업’에 참여하면서 결정이 빨라졌어요. 예술가와 작업실을 지원하는 사업인데, 제가 고향 집과 뒤편 땅을 기부채납하고 농림축산부와 임실군이 예산을 지원해 공간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진메마을 그의 고향집 뒤편에는 오른쪽과 왼쪽에 단층짜리 벽돌 슬래브 건물이 들어섰다. 왼쪽은 시인의 살림집이고 오른쪽은 그의 서재를 겸한 문학공간이다.)
-문학관으로 활용하기에는 규모가 작아 보입니다.
“문학관으로 활용되기에는 어렵지요. 제가 아직 원하지 않고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과 자료를 정리해 보존하면서 서재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물론 찾아오는 독자도 이곳에서 만나고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고 지었더군요.
“우리 동네에 열 두 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초등학생이 세 명, 유치원생이 한명 있어요. 이 아이들을 불러서 재미있게 놀 생각입니다. 인근 지역 아이들에게도 글쓰기와 책읽기를 가르치고 글을 써보게 할 생각이에요. 작은 학교에서 하게 될 가장 중요한 일이죠.(웃음) 그 아이들이 모두 자매인데, 아이들 엄마가 제 제자예요. 동네 할머니들을 위한 시간도 갖게 될 겁니다. 이따금씩 소리꾼이나 연주자들을 부르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어드리고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나요.
“그동안에도 우리 마을에 문학기행을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게다가 우리 동네에서 천담까지 가는 길이 잘 다듬어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게 되었죠. 마을 사람들의 불편이 큽니다. 제가 집에 있을 때는 그 분들과 만나 마을이야기며 산과 강이야기, 제 문학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공간이 찾아오는 분들에게 쉼터가 되고, 때로는 도서관이 될 수 있겠죠. 자치단체나 다른 단체의 힘을 얻지 않고 올해 1년은 자연스럽게 제 힘으로 꾸려가보려고 해요. 여건이 된다면 임실 순창 지역의 문인들과도 만나 책읽기도 하고 글쓰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지역에 작은 도서관이나 독서동아리가 꽤 많더라고요.
- ‘김용택의 작은 학교’가 규모를 앞세워 지어진 적지 않은 문학관들의 역할에 새로운 모범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문학관을 먼저 내세웠다면 저 또한 그런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군과 다소 갈등을 겪으면서도 제가 원하는 공간을 고집했습니다. 지어놓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래전부터 군에서 큰 예산을 들여 문학관을 짓자는 제안을 해왔었지만 제가 생각해보니 문학관을 지을 만큼 문학적인 성과가 있는지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아 응하지 않았었거든요. 이번에도 사실은 17억 원 정도의 예산이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땅을 제가 내놓았으니 적은 예산으로 공간을 짓고 나머지는 마을을 위해 써달라고 했어요.”
-그동안 강연을 많이 다니셨는데 강연 요청은 지금도 많습니까.
“많이 줄었어요. 강연은 퇴직 한 이후 8년 동안 본격적으로(?) 다녔어요. 안 가본 자치단체가 별로 없죠. 주말을 제외한 평일은 거의 강연하는 일이 일상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40년 가깝게 아이들과 만나다가 퇴직을 하다 보니 허허로움이 커서 강연을 더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일상이 되었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실텐데 어떤 이야기를 하십니까.
“대상에 따라 다르죠. 강연하면서 소통이 가장 잘되는 분들은 학부모들과 교사들이예요. 일반 대중 강연도 재미있는데,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하죠. 가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는데, 강연을 정말 열심히 듣습니다.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확인시켜드리니까요. 저는 어머니를 통해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압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면 제 손을 잡고 우시는 분들도 많아요. 당신들의 삶에 대한 회한이겠죠.”
-어떤 이야기에 가장 공감하시나요.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머니가 살았던 삶이,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 시를 만들어주었다고 이야기 하죠. 어머니가 말하는 것을 받아썼더니 시가 되었으니 여기계신 어머니들이 모두 시인이시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요즘 며느리들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가 흉도 봐요. 엄청 좋아하시죠.(웃음)”
-그분들로서는 마음 치유가 되는 시간이겠군요.
“사실 치유가 되는 것은 그 분들만이 아니라 저도 치유가 됩니다. 오히려 배움은 제가 더 크죠.”
-강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소리도 있습니다.
“알지요. 그런데 저는 강연이 정말 재미있어요. 말하는 것이 즐겁고요. 제가 워낙 말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제 일상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릅니다. 저녁 아홉시면 자고 새벽 세시나 네시에 일어나죠. 새벽 2-3시간이 글도 쓰고 책도 읽는 시간입니다. 아침이 되면 그때부터는 할일이 별로 없게 되죠. 제 경우에는 두 시간 정도 글을 쓰다 보면 지치더라고요. 창의성도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저는 강연이 없을 때는 그냥 놉니다.”
-그래도 강연을 다니다보면 시를 쓰는 시간이 아무래도 적어지지 않을까요.
“저는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강연을 하는 일이 즐거우니 문제 될 일이 전혀 없어요.”
-선생님의 시와 강연의 역할이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이죠. 시가 곧 말이고 말이 곧 시예요. 저는 강연을 다니면서 많은 공부를 합니다. 지역을 알게 되고,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죠. 그렇다보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시인이 따로 있고, 강연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제 시와 삶이 강연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란 삶을 정리해주는 것이죠. 제 철학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풀어졌다가 다시 내 삶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저는 즐깁니다.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시를 쓸 때가 아니고 삶을 살아갈 때거든요. 그래서 저는 삶의 현장에 함께 있다는 것을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깁니다.”
-화제를 좀 돌려보죠. 여러 해 전, 문화예술계의 지인들과 함께 고향집에 ‘가끔씩 열리는 학교’를 열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양한 영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만나 그 일을 도모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또한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러다 결국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저는 무엇을 하든 지속성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없더라고요. 몇 번 주목받는 행사로 그런 일을 꾸려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구상했던 일들을 지금 담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공간이 생겼으니 어쨌든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할 생각이죠. 시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것들이 모여지면 그 시들을 예쁘게 마을 여기저기에 걸어두고 싶어요. 좋은 시를 읽으면서 마을길을 걷게 하는 시간을 나누는 거죠.”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문학을 동경하게 되는 것일까요
“맞아요.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꿈꿉니다. 나이가 들면 시나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하죠.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게 되고. 그런데 사실 시를 쓰겠다는 것을 목표로 세우는 것은 잘못된 일이예요. 시를 쓰려고 하면 안 되죠. 생각을 써야합니다. 생각을 쓰다보면 시를 쓰려는 사람은 시를 쓰게 되고,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되거든요. 돌이켜보면 저는 시를 쓰려고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쓰겠다는 생각보다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그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 날 시가 되었던 거죠.”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좀 더 쉽게 시와 가까워지는 방법이 있을까요.
“시를 많이 만나는 것이겠죠. 제가 여러 해 동안 해온 일이 있습니다. 제 두 아이가 멀리 떠나 있을 때 매일 아침 한편씩 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천여 편 시를 보냈더군요. 저는 시가 사람을 잘 살도록 도와준다고 믿습니다. 잘사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거든요. 시는 자신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곧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죠. 저는 세상을 이해하는 일을 시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를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싶다면 우선 자기 생각을 글로 쓸 것을 권하고 싶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일이고, 내가 새로워질 수 있는 일이거든요. 저는 새로워지려고 글을 씁니다.”
시인은 어머니로부터 삶이 곧 공부라는 것을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 어느 것에도 경계를 짓지 않았다. 어머니의 삶이 그러했다. 나무처럼 다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삶을 보며 그는 ‘삶이란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받아들여야 나를 새롭게 세상에 그려낼 수 있습니다. 받아들여야만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세요. 경계가 없는 곳이 없죠. 분단의 우리 역사가 그렇고, 좌파니 우파니 이념의 문제가 그렇고, 학연이니 지연이니 지역주의까지 패거리문화에 익숙해진 우리 삶은 황폐해져있습니다. 그 경계를 없애는 일을 나는 문학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갖게 하고 받아들이는 힘을 키워내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시인의 일상이 다시 새롭게 바뀌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의 귀향이 반갑다.
●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1982년 詩 '섬진강' 발표…삶의 아름다운 풍경 서정적으로 노래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것이 1982년. 당시 발표작이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로 시작되는 〈섬진강〉이었다.
그는 섬진강 줄기가 흐르는 강변,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농사꾼의 장남으로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순창농고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얻기 보다는 농사짓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교원양성소 시험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스물두 살, 모교인 덕치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노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를 알게 됐다.
교사를 하면서 시인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시인이 되고자 시를 쓰지 않았다. 교사가 된 후 그는 책읽기에 빠졌는데,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졌다. 생각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어느 날 시가 되어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가 맞닿아 있는 지점은 늘 자연과 어머니와 고향마을이다. 그가 쓰는 시와 산문과 동시는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고,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아 키우고,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만나고, 시인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오랜 세월 삶의 흔적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작고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깨우쳐 주며 살아온 그의 시와 삶은 따로 가지 않는다. 수많은 독자들이 ‘김용택의 시’에 마음을 주는 이유다.
2008년, 38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무리 했지만 일상은 더 분주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는 강연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연에 나서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더 넓어졌다. 계층이 따로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는 일이 곧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아내와 아이들이 전주로 나간 지 20년, 그가 고향집을 떠난 지 8년. 다시 진메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작고 예쁜 살림집과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 이름 지은 문학공간을 새로 얻었다. 시인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을 비롯한 열권의 시집과 〈인생〉 〈오래된 마을〉 〈콩, 너는 죽었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동시집을 냈으며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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