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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 연가 - 이승수

눈을 씻고 봐도 불이었다. 둔덕 너머 우리 논이 뻘겋게 타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갔다.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왜 그렇게 발이 느리던지 꿈결인가 싶었다. 보리 이삭이 노랗게 익어가고 논에 자박자박 물이 잡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하굣길 신작로에서 벚나무와 엉덩이 씨름을 하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힐 양이면 개울로 달려가 불거지와 한바탕 뜀박질을 하곤 했다.

 

논에 다다른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서 마지기가 넘는 논이 앙증맞게 핀 붉은색 꽃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것 아닌가. 무슨 일이람?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떼 지어 핀 꽃을 보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꽃대를 쭉 쓸어보았다. 보란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이들은 내 손이 가는 대로 순순히 몸을 눕히는 것이었다.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논에요, 꽃이요….”

 

나는 숨을 헐떡이며 검정 고무신 한 짝을 내동댕이친 채 마루로 기어올랐다.

 

“자운영이다. 거름으로 쓸 것이여.”

 

아니 그렇게 예쁜 꽃을 거름으로 쓰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빨간 양탄자가 우리 논 위를 날았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알게 된 바로 그 양탄자였다. 나는 그것을 잡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았다. 잡아야 해, 잡아야…. 다급해져 “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양탄자가 갑자기 좌우로 흔들리더니 뒤집혀 곤두박질을 쳤다. 달려가 보니 양탄자는 오간 데 없고 갈아엎어 시커멓게 변한 논바닥뿐이었다. 허망했다. 두리번거리며 양탄자를 불렀다. “야!” 목청을 높이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다음 날 이웃집 ‘순이’ 누나가 나를 불렀다. 마른침을 삼키던 누나는 네 번 다섯 번 정성껏 접은 쪽지를 내밀었다. “심부름 좀 해줘! 느네 논 지나서 다리공사 하는 데 있지! 거기 ‘차영’이란 형한테 좀 갖다 줘.”

 

한달음에 달려가 쪽지를 전했다. 쪽지를 받아든 형은 내 손에 스피아민트 껌 두 개를 쥐여주었다. “이게 웬 떡 이다냐!” 하나는 내가 먹고 또 하나는 셋으로 나눠 동생들 줘야지. 그날 밤 우리 방 벽에는 껌딱지 네 개가 들쑥날쑥 붙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쪽지 심부름은 계속되었다. 주거니 받거니…. 당연히 껌도 양쪽에서 들어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열 개가 넘기도 했다. 차츰 내 친구들 집 벽에도 껌딱지가 나붙었고, 나는 차츰 껌 대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 후 자운영밭에 쟁기가 들어갔다. 꽃밭이 무참히 뒤집혔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순이가 꽃밭에서 차영이랑 놀았다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소문은 우리 부모님 대화에도 끼어들었다. 밖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왕왕거렸다. 쪽지 심부름이 끊겼다.

 

“자운영 꽃밭이 무슨 잘못이라고…?”

 

쟁기 밑으로 사라진 자운영 꽃이 아른거렸다. 껌도 따라 춤을 추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순이 누나가 보따리를 싸 들고 집을 떠났다. “승수야! 고맙다. 잘 있어라.” 내 손에 껌 두 통이 들어왔다. 별로 반갑지 않았다. 차영이 형이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내 손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자운영 밭으로 달려갔다. 꽃이 무성하던 자리, 그곳에는 물만 흥건히 고여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때인 것 같다. 내 마음에 작은 꽃밭 하나 생긴 것이. 그 후 도회지에 나와 학교 다니는 동안 고향과 멀어졌다. 가끔 집에 갈 때면 자운영 꽃밭을 떠올렸지만, 어디에도 자운영은 없었다. 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날 보니 길가에 ‘자운영 마을’이란 안내판이 서 있었다. 끌리듯 찾아든 마을 들판은 자운영 꽃 천지였다.

 

“아! 자운영.”

 

나는 논두렁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물 대기 한창인 옆 논에 고향 하늘이 내려와 앉았다. 순이 누나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내 안의 꽃밭에서 자운영 꽃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요즈음에도 내 안에 가끔 자줏빛 꽃 구름이 인다. 나는 거기 머물러 있으려다 일을 그르치곤 한다. 지금 칠순을 바라볼 순이 누나는 차영이 형과 잘살고 있는지…?

 

△이승수씨는 지난 2009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영화에세이 〈울면 지는거야〉와 공저 〈영화치료의 기초이론〉을 냈으며, 현재 익산우체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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