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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영남의 경우

연예인도 오류 범할 수 있어…법과 여론의 매질 치른 후엔 무대설 수 있게 관용 베풀자

▲ 홍용웅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장

조영남 사건을 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과오와 책임을 깨끗이 시인하고 석고대죄 했으면 좋았을 걸 궤변을 늘어놓아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솔직함이 그의 장기 아니었던가?

 

그의 잘못은 명명백백하다. 화투그림이 순수예술인지, 행위예술인진 모르겠지만 대작(代作)을 진품으로 팔아먹은 소행은 백번 욕먹어 싸다.

 

결국 사기죄로 기소됐다니 자업자득이다. 팬들 사랑을 먹고사는 그가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가 추락한 이카로스 꼴이 되었다. 동정과 증오가 교차하지만, 어쨌든 상응한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성과 예술성 간의 경계는 어딘가 하는 질문이 되살아난다. 이는 독일작가 토마스 만이 그의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던졌던 화두기도 하다.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마음속에서 혈투를 벌이는 시민성과 예술성에 관하여 성찰한다.

 

시인 지망 고교생 크뢰거의 마음은 혼돈 그 자체다. 학교와 부모에 순종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는 ‘범생’친구들이 부럽기만 한데, 그의 내면에서 이글거리는 예술에의 열정은 자신을 끝없는 의심과 반항의 용광로로 이끈다.

 

그러나 기성의 예술가들은 그를 범속한 시민적, 인간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배척한다. 그는 예술성과 시민성 그 어느 영토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자 이방인일 뿐이다.

 

과연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모범시민이 되길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획일화된 시민사회의 규격 속에 그들을 구겨넣어 독창적 예술혼의 만개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예술인이라면 으레 대마를 피거나 법을 경시하고 기행을 일삼아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들도 시민적 기본규율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다른 직업인보다 더 칼같이 날이 선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부당하다.

 

간혹 공인(公人)을 자처하는 연예인들이 있는데 이는 착각이다. 연예인은 공적 영역에 복무하는 공인이 아니라 유명인일 뿐이다. 정치인, 공직자가 바로 공인인데, 이들은 모범시민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민혈세로 자리를 보전하기 때문이다. 공인의 잘못은 흐지부지 넘기면서 유독 예술가, 연예인들을 잡도리해서는 곤란하다. 법과 원칙에 따라 책임은 엄중히 묻되 마녀사냥, 인격살인은 안 된다.

 

그들도 인간이고, 인간은 오류로부터 면역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서 조영남은 하나의 반면교사일 뿐이다. 그의 음악과 언행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는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음악적 천분과 성과로 볼 때 우리 시대의 쓸 만한 ‘광대’인 그를 능지처참(陵遲處斬)할 것까지야 없잖은가?

 

친일행각으로 비난받는 예술가들 문제도 비슷하다. 독보적 문학성을 부인할 길 없는 춘원과 미당 같은 이들을 인제 와서 뒤늦게 부관참시(剖棺斬屍)해야만 속 시원할까? 하이데거, 카라얀, 피카소, 마이클잭슨도 생전에 중한 과오를 범했지만, 인류는 그들의 작품을 여전히 보고 듣는다.

 

이런저런 잘못으로 법과 여론의 매질을 톡톡히 치른 연예인들이 적절한 시점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자. 악플과 찌라시의 저주가 난무하는 시대에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는 너그러움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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