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은 판소리의 땅이다. 지리산의 강건한 울림을 그대로 안은 동편제 소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명창들이 시절을 보내며 그 울림을 생명의 소리로 다듬고 다스려 전해주었던 땅.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더러는 단절되고 더러는 묻혔으나 남원의 문화적 토양은 동편제 소리의 기반 위에서 성장해 오늘에 이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인가. 남원 사람들이 갖고 있는 판소리에 관한 자긍심은 남다르다. 사실 소리를 생산해내고 또 그 소리를 판소리의 굵은 맥으로 지켜왔으니 자긍심의 근거는 충분하다.
남원에서 판소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온 김용근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57)도 그 중 한사람이다.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에서만 살아온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판소리 명창들의 삶을 추적하고 기록해 판소리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온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다. 판소리 명창들의 삶을 찾아 찾아나선지 올해로 30여년.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기록으로 남겨둔 그의 일상이 궁금했다.
여름 한 중간, 남원시 대산면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1986년 공무원이 된 그는 지금 대산면사무소의 산업계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드러낼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던 그와의 인터뷰는 예상보다도 길어졌다. 그의 말대로 판소리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구를 위해 학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해온 것도 아닌 그의 판소리 연구는 외롭고 험난했으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질서이자 삶의 가치로 안겨 있었다.
“내가 수집해 놓은 자료들이 이제 좀 좋은 결실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들의 직업을 만드는데도 그렇고, 옛사람들의 삶과 지혜를 오늘의 우리 삶으로 끌어들이는 통로로도 그렇고. 들여다보면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만한 자료가 아주 많거든요.”
고단했던 여정, 그러나 그가 돌아보는 30년 가까운 세월은 기쁨과 보람으로 빛났다. 생애를 이렇게 후회 없이 살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판소리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86년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유난히 일본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남원에도 외국 손님들이 많았었죠. 그런데 정작 남원을 잘 소개할 수 있는 안내자가 없었어요. 단순하게 문화재를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 안의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판소리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판소리를 소리로만 접하지 않고 거의 종합인문지리서로 정리해놓으셨던데요.
“판소리를 공부하다 보니 그 자체가 종합인문학이었어요. 사설부터 모든 것이. 명창들의 삶을 추적하다보니 정말 흥미로운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어요. 그래서 판소리도 배우고 북도 배웠지요. 명창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겠더라고요.”
-〈판소리 북〉이란 책도 내셨죠.
“북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아요. 조선시대에는 남원이 북을 가장 잘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우시장이 있었거든요. 궁중에서 쓰이는 판소리 북은 반드시 남원에서 만들어갈 정도로 남원을 인정했습니다. 그만큼 북만드는 기술이 빼어난 장인들이 많았던 거죠.”
-기록이 있습니까.
“제가 마을의 노인들께 들은 이야기예요. 실제로 저희 아버지도 북을 만드셨거든요. 남원 북은 소리꾼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어요. 판소리 소리꾼들은 제자가 소리를 어느 정도 배우고 분가를 하게 되면 그 징표로 북을 맞춰 주었어요. 북을 만들어주려면 남원으로 왔어요. 남원에 귀명창이 많았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북은 일본식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아요. 안타까운 일이죠.”
-한국의 전통 판소리를 일본식 기법으로 만들어진 북으로 장단을 맞춘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요.
“북은 귀명창이 만드는 것이거든요. 보통 북을 주문하면 6개월 동안 여덟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 소리와 맞추었답니다. 소리꾼이 가진 소리의 특성과 잘 맞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 과정을 거치고 북이 완성되면 스승은 붓으로 써서 제자에게 그 북을 주었어요. ‘이제 내 소리가 너한테 간다’는 뜻이었죠.”
-지금의 소리 물림과는 많이 달랐군요. 의미가 깊습니다.
“일본식 기법으로 만드는 북이라고 제가 단언하는 이유가 있어요. 원래 우리 북은 태극단청을 넣었었거든요. 1910년대의 판소리 자료를 보면 북에 태극 마크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요.”
-판소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생활사 자료까지 수집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판소리가 그렇게 방대한 분야에 걸쳐있는 것인지 몰랐었어요. 그런데 들어가다 보니 판소리 사설만해도 모든 분야가 집적된 종합인문지리지와도 같더라고요. 이것을 제대로 알려면 풍수지리도 공부해야하고, 의학적인 지식도 있어야 하고. 예를 들어 사설에 약초이름이 나오면 일일이 찾아서 그 의미를 알아야 사설의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흥미도 있었겠지만 힘드셨겠습니다.
“학문의 경험이 짧으니 온전히 독학으로 해야 했죠. 전문가도 아닌데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지리산 일대의 마을은 다 찾아다녔어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결국은 소리꾼들의 삶을 밝히는 종합서가 되었죠. 〈동편제로 지리산을 말하다〉 같은 책이 바로 그 결실입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더군요.
“사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찾아다녔지만 판소리 명창과 관련된 지역은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안간 곳이 없어요. 왜냐면 소리꾼들이 한 곳에서 거주하는 기간이 평균 3.5년이거든요. 이름이 알려진 소리꾼의 후손들은 거의 다 찾았어요. 지금처럼 개인정보공개를 규제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호적과 족보를 조사하면 거주지까지 알 수 있었거든요.”
-얼마 전에 보도됐던 송흥록 명창의 후손도 그렇게 찾으셨군요.
“그렇죠. 제가 밝혀내기 전까지는 송흥록 명창의 후손도 조상을 모르고 있었어요. 6대 장손이었는데, 집안 어른들이 그런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왜 개인정보를 공개하느냐고 원망도 들었어요.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죠. 그래도 결국은 후손들의 동의를 얻어서 남원 운봉에 송흥록 명창의 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죠.”
-이화중선 명창도 같은 경우일 것 같은데요. 그렇게 명창들의 가계를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호적이나 족보가 가장 큰 통로예요. 왜냐면 소리꾼들은 대부분 통혼을 하거든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그러니까 하나를 찾으면 줄줄이 연결이 돼요.”
-공무원 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작업이 가능했습니까.
“직장 일을 제대로 안한 것 아니냐는 말씀 같은데, 그런 오해를 안 받으려고 업무를 미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서서 맡았지요. 제가 이래 뵈도 국가가 인정한 모범 공무원입니다.(웃음) 담당 업무도 그렇지만 제가 판소리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으니 관광과의 업무도 자주 맡았거든요. 외부에서도 이런 저런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해오니 아무래도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죠.”
-표현이 적절치 않지만 잡일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을 하실 시간에 좀 더 개인적인 역량을 높이는 공부를 했더라면 공무원으로서의 환경도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었겠죠. 과장 국장 승진도 하고…….그런데 그렇게 했으면 제가 해온 제 나름의 질서는 없었겠죠.”
-소장님만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오셨다는 말씀이군요.
“저희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제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 반대가 심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제 징용을 다녀오셨거든요.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한테 엄청나게 당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내 아들은 절대 공무원 시키지 않겠다고 작심하신거지요. 그래도 아들이 공무원이 되니 두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첫째는 아침에 7시 이전에 출근할 것, 둘째는 월급의 30%는 네 것이 아니니 다른 목적으로 쓰라는 것이었어요. 제 경우는 판소리를 연구하는데 30%를 쓴 셈이지요.”
-아버님의 가르침이 대단하셨군요.
“저희 아버지는 글을 모르셨어요. 그래도 분명한 당신만의 철학을 갖고 계셨죠. 제게도 그 철학을 주셨는데, ‘자기가 세운 질서가 공심이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예를 들면 길을 건널 때 파란불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건너가는 것은 내가 연구해서 세운 질서가 아니고 누군가 만들어놓은 규칙을 따라가는 거죠. 그런 것 말고 ‘너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를 만들라’는 말씀이었죠.”
-옛 사람들도 소리나 북을 배우는 과정이 고단했겠죠.
“물론지요. 그런데 제가 만났던 명창이나 노인들은 판소리나 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배우는 것이 아니고 놀다가 저절로 되는 것이 소리라고요. 놀다가 따라서 하면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소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죠. 놀이로 배우고 가르치는.”
-흥미롭습니다. 소장님도 소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을 텐데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저는 소리꾼이 되려는 것도 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어요. 소리와 북을 익힌 것은 조사에 필요했기 때문이죠. 제가 북을 치고 소리를 안했으면 소리꾼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빤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가도 얻어내지 못하는 자료를 ‘나는 얻을 수 있었다’는 자부심이 느껴집니다.(웃음)
“그 이전에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연구자들이 그동안 판소리와 지리산 문화를 조사한 논문만도 4백 권을 수집해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허와 실을 검증해보았어요.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더라고요.”
-그렇게 바로 잡은 고증을 학계도 인정합니까.
“대부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아요. 판소리연구자들이 제가 발굴한 자료를 갖다 쓰면서도 출처 기명은 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요. 그러면서도 정작 연구에 필요하면 다 찾아오시죠. 그럴 때는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신경을 쓰진 않습니다. 제가 발굴한 자료로 학술 연구를 진전시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이런 작업을 본격적으로 일구신 것이 90년대인가요.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북을 배우면서 명창들을 찾아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일입니다. 하다 보니 연구 분야가 커졌어요. 소리꾼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를 하는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소리를 하는 분들의 건강은 일반인들과 달랐습니까.
“잔병치레를 하면서도 일반인들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았죠. 1910년대까지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3.5세였습니다. 그런데 소리꾼들은 62세였거든요.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반인들은 잔병치레를 15.5개 정도였는데, 소리꾼들은 4.7개. 그러니 병 없이 오래 살았단 말이잖아요.”
-그런 기록이 있습니까.
“제가 통계로 수명을 조사해보니 소리꾼들이 일반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평균기간이 3.5년~4년인데, 그렇다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살았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도 어떻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외국 학자들은 이 부분을 주목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독일 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남원을 찾아옵니다.”
-우리나라의 연구는 어떻습니까.
“아직은 연구자를 못 만났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제가 분석하기로 소리는 음양오행이 기본이거든요. 사실 판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소리예요. 진양이네 자진모리네 중중모리네 하는 말은 판소리에 없습니다. 귀명창들은 소리를 권할 때 ‘자진모리 한대목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쓴소리 한 대목 하라’고 하죠. 간과 담은 한의학적으로 쓴맛으로 관여합니다. 중중모리는 신소리라 하는데, 신장과 소장, 신맛과 관련이 있어요. 쓴소리 신소리 매운소리 짠소리 이렇게 분류되는 것이죠. 아니리는 헛소리. 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병이 나는 것은 영양이 모자라거나 기가 막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영향이 불균형하거나 기가 막히거나. 옛날 속담에 기가 막히면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기를 통하게 해야 합니다. 그 기운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죠. 만약 신장과 콩팥이 아프면 신장과 콩팥의 기운을 높여줘야죠. 약으로 쓰는 방법, 호흡으로 하는 방법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비들은 호흡법으로 치유했어요. 그 호흡과 소리를 합한 것이 판소리인겁니다. 소리를 짠다고 하잖아요. 옛날에는 어느 부잣집에서 가족의 누군가 기력이 약해지면 잔치를 벌였습니다. 소리꾼을 부르죠. 소리꾼은 진단을 합니다. 간이나 담의 기운이 약하다면 거기 맞는 장단의 소리를 짜서 부르는 것이죠.”
-이런 특성을 아직 연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쉽군요.
“우리나라 판소리 연구는 아직도 ‘사설의 어떤 부분이 틀렸네 맞았네’ ‘명창의 출생지가 목포네 남원이네’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어요. 진전이 없죠. 저는 우리나라 판소리 연구가 일정한 한계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융합하지 않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문과 학문의 융합과 교류가 있어야하는데, 특히 판소리 같은 경우는 학문 융합으로 연구해야할 과제가 많습니다.”
인터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이야기는 영역과 영역을 넘나들면서 더 흥미롭고 풍요로워졌다. 깊은 바다에서 방금 낚아 올려 반짝이는 그물 안 물고기처럼 그로부터 듣는 지식과 진실은 생생하고 새로웠으며 깊이가 있었다. 어느 기관의 지원 한번 받지 않고도 판소리 연구에만 온전히 바쳐온 30년 삶의 궤적이 우리 판소리 연구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그의 오랜 소망처럼 전문적인 학술연구자들의 진지한 관심이 더해질 일만 남았다.
● [김용근 소장은] 30년 가까이 소리꾼 삶 연구…판소리 역사 살아있는 백과사전
김용근 소장은 남원 주천면에서 태어났다. 농사짓는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강요는 하지 않으셨지만 가르침은 엄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글을 쓰고 읽을 줄 모르셨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질서를 만들어 자식들이 자연스럽게 보고 배울 수 있게 했다. 덕분에 그는 부모의 삶과 태도가 아이들에게는 곧 교과서라고 믿게 됐다.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농사짓는 일에 마음을 두었던 그는 남원농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대신 군대를 다녀와 공무원이 됐다. 공무원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던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들을 마뜩치 않아 하셨지만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두 가지를 약속받고서야 상황을 받아들였다. 임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1년 만에 남원시로 전입한 이후 그는 줄곧 남원 안에서만 공무원생활을 했다.
80년대 중후반, 남원을 찾아오는 외국인 손님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남원의 판소리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판소리는 들어설수록 신비로운 영역이었다. 80년대 중반, 강도근 명창이 살고 있던 국악원 옆으로 이사를 해 매일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웠다. 판소리 명창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이후였다. 기존의 기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진실을 밝혀내고 싶었다. 주말이면 지리산 일대의 마을들을 찾아 나섰다. 첫 월급부터 지금까지 월급의 30%가 온전히 이 작업에 쓰였다. 판소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종합인문지리서와 같았다. 판소리 사설은 풍수지리부터 한의학까지 온갖 서적을 읽어 알아야만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었고, 소리꾼들의 삶은 신비로웠다. 조금씩 쌓여가는 자료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발굴한 자료가 전공자들을 통해 우리 판소리 연구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료의 효율적인 활용과 좀 더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1989년 지리산판소리문화연구소를 냈다. 1인 연구소였다. 그러나 판소리를 통한 연구영역이 확대되면서 연구소 이름도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로 바꾸었다.
30년 가깝게 발로 뛰며 찾아낸 자료와 기록들은 판소리 연구의 보고가 되었다. 호적이나 족보를 통해 밝혀낸 조선창극사 명창들의 생애 뿐 아니라 옛사람들의 생활사를 밝혀내는 온갖 자료들이 그의 손을 거쳐 정리되어 자료가 됐다. 이름만으로 판소리사에 남았던 명창들의 생애가 그를 통해 비로소 역사가 되었다. 국가공무원으로 30년 살아왔지만 그의 직급은 6급 계장이다. 지금은 남원시 대산면 산업계장으로 일하면서 여전히 판소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에 주말을 바친다. 그동안 펴낸 책만도 10여권. 그것도 순전히 자비로 낸 것들이다. 그의 말처럼 이 책들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콘텐츠들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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