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보다 일찍 사회현실에 눈을 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엄혹한 시절, 그해 11월 21일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이튿날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데모에 나섰다. 친구들을 독려해 거리로 나갔던 그때, 그는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일주일 후 학교는 그를 제적시켰다. 그는 10월 유신을 반대한 최초 데모 주동자이자 최초 제적생이 되었다.
남북분단의 암울한 역사와 반민주적인 사회현실은 그의 삶을 저항적 사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80년대 초반, 사회변혁의 의지는 출판운동으로 이어졌다. 반쪽짜리 역사관을 온전한 역사관으로 확장시키고 건강한 아동도서 문화를 이끌어내는 출판운동의 중심에서 보냈던 30여년 세월은 부침의 굴곡이 심했으나 우리나라 출판사를 새롭게 쓰는 물꼬를 열고 발전시켰다. 어찌하다보니 정치의 길에 서게 됐다. 확고한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기왕에 들어선 이 길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성공시키고 싶었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62, 경기 광주시 갑)을 만났다. 30여년 출판인으로 살아온 그의 정치인으로의 변신과 10대부터 저항적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온 그가 새롭게 펼쳐갈 정치 지형도가 궁금했다. 그는 출판사 ‘산하’ 대표로 일찌감치 이름을 알렸다. ‘산하’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로도 그렇지만,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온 단행본 어린이책 ‘산하어린이’ 시리즈로 신뢰를 쌓아오면서 명성을 얻은 출판사다. 1990년부터 국내 창작동화의 시대를 연 ‘산하시리즈’로 세상에 나온 책은 150여권. 창작동화와 지식정보의 지평을 넓힌 어린이책으로 평가받는 ‘산하어린이’는 ‘살만한 세상’을 꿈꾸어온 그가 지켜 이루어낸 결실이다.
국회 그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인터뷰 약속시간은 1시간 가깝게 늦어졌다. 그가 공동주최한 특별지방행정기관 지방이양 정책토론이 예상보다 길어졌기 때문인데, 덕분에 그가 자신이 주최하는 토론회가 아니어도 국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주제의 토론회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가능하면 시간을 쪼개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회의원이 되니 좋은 것을 꼽으라면 좋은 토론회에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다양한 주제를 수준 있는 전문가 발제와 토론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망외의 소득이죠.”
출판인이 아닌 정치인으로 그를 만나는 일은 기대보다도 더 흥미로웠다. 사회현실에 눈을 떴던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가 서 있었던 저항적 사회운동의 길은 더 활짝 열려 있는 듯 했다. 그만큼 정치인이 된 그의 의지는 단단해 보였다.
-출판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 오시면서 일구어온 성과가 큽니다. 출판인에서 정치인으로 왜 길을 바꾸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정치 쪽에 관여는 해왔지만 직업 정치인은 아니었으니 시작이 빨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닌데, 그렇다고 정치와 무관한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이 늘 정치와 맞닿아 있었거든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셨죠.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으니 꽤 긴 세월이죠. 제가 고 3때 유신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들을 독려해 헌법이 통과된 다음날 유신반대 데모에 나섰지요. 덕분에 제적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다음해에 구제를 받아 졸업장을 받긴 했지만 10월 유신 최초 데모 주동자이자 최초 제적생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야말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늘 생각했던 때인데, 친구들이 모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 데모했던 친구들 중 3명이 퇴학당하고, 여러 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는데, 대부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퇴학을 당했던 채수찬 전 의원 같은 경우는 그 다음해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했는데, 제가 꼬드겨 데모한 덕분이니 ‘수석도 내 덕분’이라고 말합니다.(웃음)”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생운동의 날개를 달았겠습니다.
“친구들은 대부분 1학년 때부터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감시가 워낙 심하기도 했고요. 학내활동보다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대해서 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요주의 인물이었군요. 그래도 줄곧 사회변혁 활동은 주도해 오셨을 텐데요.
“삶의 틀 자체가 그런 기반 위에 있었으니까요. 군대 다녀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지하철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고, 방산시장에 정식으로 취직을 해 짐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출판 일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습니까.
“출판일은 사회운동을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82년 즈음,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중 일부는 출판 쪽으로 갔지요. 그즈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여 〈금요회〉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사회과학서적의 문을 연 출판사였습니다. 당시 출판 쪽에서 일하던 16명이 뜻을 함께 했었는데, 그 중 정치 분야로 진출한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당시에는 출판보다 서점을 통한 사회운동이 더 활발했었는데 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와 서점이 짝을 이루는 형식이었습니다. 당시는 책을 내면 문공부의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반쪽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이를테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있으나 ‘사회주의 경제학’은 없는 식이었습니다.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내건 책 한권이 없었을 때였으니까요. 모든 학문이 반쪽으로 되어 있으니 우리가 반쪽을 채우자고 해서 운동권 인사들이 출판 쪽으로 많이 들어갔죠. 우리가 펴낸 책들은 대부분 판금되는 번역서들이었는데 그래서 책을 내고 도망 다니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금요회〉의 역할이 컸겠습니다.
“16개 출판사가 모였으니 상징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번역서를 내는 일을 도모했는데 3년 정도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제가 초대 총무였는데, 85년에 저희 출판사(이삭)가 등록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자유실천문인협회 기관지를 펴냈었거든요. 네 권 째까지는 판매금지가 되긴 했지만 잘 지나왔는데, 다섯 권 째 민족문학 5호는 제본소에서 5000부 전량을 압수당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누군가가 그 중 한권을 빼와 그것을 마스터로 돌려 다시 5000부를 찍어 냈지요. 그 때문에 등록 취소가 되었고요. 계간지 취소는 있었지만 출판사 등록을 취소한 것은 이삭이 처음이었습니다.”
-출판 활동이 중단되었겠군요.
“그런데 마침 전주에 후배들이 등록한 출판사가 있었어요. 그것이 ‘산하’입니다. 86년부터 그 이름으로 출판활동을 했지요. 그러다가 88년에 산하를 서울로 가져온 겁니다.”
-어린이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88년부터 기획은 했는데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9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기가 있었나요.
“우리 아이들 덕분이었어요. 큰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하루는 방학숙제용 책을 가져왔더라고요. 들여다보니 선정된 책의 면면이 정말 엉망인 거예요. 학교에 항의했지요. 그런데 학교는 정작 모르는 일이더군요. 학부모들이 납품 업체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고 책을 공급받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학교에서는 교육청에서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교육청에서도 모르는 일이었고요. 다른 학교도 다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 화가 나더라고요. 당시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이슈화되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이 산하가 어린이책을 기획하는 계기가 되었군요.
“아빠가 출판 일을 하는데,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책 한두 권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기회가 닿았어요. 이오덕 권정생 윤기현 조월례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이 우리 아동문학을 살려야한다는 생각으로 출판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산하와 인연이 닿은 것이죠. 우리 아동문학의 개척자이자 공로자이신 선생님들과의 인연이 산하어린이시리즈를 만들어낸겁니다. 그때만 해도 어린이책은 단행본은 없었고 거의 전집류였어요. 10만원 20만원씩 하는 책값만으로도 경제적 부담이 컸지요. 그래서 큰 부담 없이 사서 볼 수 있도록 2000원짜리 단행본으로 만든 겁니다. 첫 번째 책이 〈참나무 선생님〉이었어요. 그 뒤 ‘산하어린이’ 시리즈가 10권 정도 나왔을 때 언론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경제적으로도 성공하셨겠네요.
“실상은 그렇게 되지 못했어요. 그때는 어린이책에 인세란 개념이 없었어요. 삽화는 물론이고요. 매절(lump sum, 買切) 방식으로 발간하는 것이 관행이었죠. 저희도 어린이책을 돈벌이로만 생각했다면 그렇게 했을 텐데 글 원고는 물론이고 그림도 인세 제도를 시행하고 싶었어요. 내부적으로도 찬반 양론이 있었는데, 결국은 인세를 시행했지요. 그것이 출판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시작이었어요. 더구나 삽화를 회화를 전공한 작가들에게 부탁하면서 그 부담이 더 커졌고요.”
-그 부담을 고스란히 출판사가 안게 되었군요.
“그때부터 수입보다는 투자의 비중이 커지게 되니 인세가 밀리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시리즈를 계속 냈습니다. 98년, 시리즈를 시작한지 8년 만에 100권을 돌파했지요. 국내 필자의 창작동화로만 100권을 만들었으니 출판계의 화제가 될 만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물을 같이 하면서 베스트셀러로 이어졌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는데, IMF가 터지면서 서점에서 받은 어음이 부도나면서 출판사가 어려워졌어요.”
-지금은 출판사나 서점이나 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경인데요.
“출판업의 문제는 사실 유통에 있습니다. 온오프라인 서점을 비롯해 공급받는 대상에 따라 공급률이 달라지거든요. 과거에는 서점에 정가의 80% 가격으로 공급했었는데 지금은 50%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해도 출판사나 독자들은 그 혜택을 못 받고 있는 것이지요.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면 정치 쪽의 일이 무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금요회〉 시절부터 출마 권유를 받았었습니다. 당시 전북 출신 운동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전북민주동우회〉를 만들었는데 제가 운영하던 이삭출판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정치권 진출을 모임 내부에서도 고민했었는데, 제 경우는 출판 일을 버리고 정치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선거철만 되면 말이 나오긴 했는데, 그때는 마음을 접고 있는 상황이었죠.”
-출마는 하지 않았지만 정치 쪽 일은 지속적으로 해 오신 셈인데요.
“직업으로 정치를 삼지는 않았지만 재야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쪽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본격적인 계기라면 98년에 김근태 선배가 ‘국민정치연구회’를 만들었을 때부터 함께 하기 시작해 새천년민주당 창당 준비위원으로도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국정자문위원을, 김근태 선배가 의장으로 있을 때는 의장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는 2008년에 처음 도전했었죠. 왜 광주였습니까.
“친하게 지냈던 문학진 의원 지역구가 하남 광주였습니다. 문 의원이 출마했을 때 선거를 도와주었는데, 아쉽게도 3표 차이로 낙선했어요. 그 뒤 선거구가 새롭게 획정돼 문 의원이 하남 쪽으로 가면서 권유를 했고, 정동영 선배가 대선 출마할 때는 제가 그 지역의 선대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이 되었습니다.”
-국회에 들어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현안이 많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지금은 사드에 관한한 가장 강경한 반대론자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드 문제에 앞장서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절박한 현안이 세월호입니다.
일부에서는 ‘세월호 피로감’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이야기하는데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세월호 문제는 참사의 진상을 밝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자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고를 없게 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부가 먼저 나서서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것이 우선이거든요. 그런데 입장이 바뀌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는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월호 사건을 만들어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이 사건은 박근혜정부가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나중에 벌어질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렇습니다. 세월호는 미뤄둘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새만금과 관련된 법안을 김관영 의원과 공동발의하셨던데 새만금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전라북도가 홀대 받는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증거가 새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 가까운 동안 투자된 예산이 아마 4조~5조 정도 될 겁니다. 사대강은 어떻습니까. 3년 만에 22조를 다 썼습니다. 환경문제 등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작용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새만금에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먼저 작동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안을 찾고 투자해야 한다고 봅니다.”
-출판인으로서 일궈놓은 일이 많습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어떤 일들을 해나가실 생각입니까.
“기회가 된다면 남북문제를 해결하는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들여다보니 6자 회담이 2008년에 열린 것이 마지막이었더군요. 지금은 대화 자체가 완전히 막혀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0년 햇빛정책의 결실이 아깝기만 합니다. 그 불씨를 살려내는 일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 [소병훈 의원은] 고교 졸업 때 "남북통일 위해 태어났다" 다짐…민주화운동 온힘
소병훈 의원은 군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학교(전주북중)에 입학하면서 전주로 온 그는 초등학교를 군산에서 다닌 탓에 친구가 없었다. 자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었는데 전국에서도 시설 좋기로 이름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덕분에 그는 엄청난 양의 책을 독파할 수 있었다. 전주고에 들어가서도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반민주적인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정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는 옳은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언했다. 헌법이 통과되자 그는 친구들과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데모를 이끌었다. 주동자가 되어 제적을 당했지만 다행히 이듬해에 졸업장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그는 ‘나는 남북통일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썼다. 어떤 길을 가든 남북통일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성균관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내에서 데모나 시위를 주도하는 대신 다른 대학 운동권과 교류하고 연대하는 일을 도모했다.
대학 졸업 후엔 지하철 현장과 방산시장에서 짐 나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결혼을 한 이후였지만 노동의 대가를 보상받는 정도만으로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여겼다.
80년대 초반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거나 출판 분야로 눈을 돌릴 때 그는 출판을 택했다. 83년 출판사 ‘이삭’을 열었다. 출판 분야에서 일하던 운동권 출신 선후배들과 뜻을 모아 〈금요회〉를 만들고 사회과학서적을 출간하는 일에 앞장섰다. 엄혹한 시절이었으나 그만큼 민주화를 위한 저항운동의 의지도 강해졌다.
85년 문공부는 그의 출판사 ‘이삭’의 등록을 취소했다. 86년 후배들이 등록해 갖고 있던 ‘산하’의 이름을 빌려 출판활동을 지속했다. 88년에는 ‘산하’를 서울로 가져와 본격적인 출판 사업을 시작했다. 일반 도서류를 출판하면서 꽤 많은 베스트셀러를 냈다. 89년부터는 어린이 책을 단행본으로 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출판사에 기록될만한 ‘산하어린이시리즈’ 시작이었다.
2008년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더불어민주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사회변화를 꿈꾸어온 그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연고가 없는 경기도 광주를 정치적 고향으로 삼아 재도전까지 결행했으나 당선고지가 보이는 바로 앞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도전해 당선, 초선의원이 됐다. 문화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임위원회를 교육문화체육관광위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했으나 안전행정위원회에 배정돼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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