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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Pic] 서해 훼리호 침몰 23주기 … 우리는 안녕할까요?

지난 주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를 강타하고 지나간 태풍 차바는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남겼다. 10명이 사망실종됐고, 건물 수백채가 파손됐다. 자동차 2000여 대가 침수 등의 피해를 당했다. 올해 태풍은 공교롭게도 한반도를 피해갔다. 대신 태평양 먼 바다에서 발생한 태풍은 대만·중국과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들 국가에 큰 피해를 주었다. 10월로 접어들면서 ‘올해는 태풍이 없다’고 안심하는 사이 태풍 차바가 한반도를 할퀴고 말았다.

 

9월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 충격도 그렇다. 한반도에서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했다는 역사기록이 있었지만, 일본 열도에서 발생하는 지진들처럼 강력한 지진에 대한 기록이 한반도에 없었던 탓일까. 경주 지진 전까지 한국인들은 지진 공포에서 다소 자유로웠다. 설마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지 않은가.

 

지난 9월12일 저녁 7시 44분과 8시32분 경주시 남남서쪽 9㎞ 지역에서 진도 규모 5.1과 5.8의 지진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경주 일대는 물론 전북 등 전국 각지에서 진동이 느껴졌고, 경주 일대의 경우 민가와 문화재 등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다. 갑작스런 지진에 국민들은 일순간 지진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경주 일대는 문화재 뿐만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가 집중된 탓에 이번 경주 지진보다 강도가 조금만 센 지진이 실제 일어난다면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상의 피해가 예상되는 만큼 국민적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정부가 고베지진, 동일본지진, 후쿠시마 쓰나미 사태, 쓰촨성 지진 등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지진 빈도와 규모, 피해 정도 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대비해 왔다면, 경주 지진 공포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하인리히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하인리히는 미국의 한 보험회사 직원이었는데, 그의 업무는 사고 관련 통계 정리였다. 어느날 그는 산업재해 중상자 1명이 나오기 전에 똑같은 원인으로 경상을 입은 사람이 29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동일 원인으로 부상당할뻔했던 아찔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300명 있었다는 사실도 끈질긴 조사 끝에 알 수 있었다. 하인리히가 밝혀낸 중요한 사실은 큰 사고가 어느날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징후 끝에  대형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태풍과 지진 등 천재지변이든, 교통사고나 선박침몰, 건설현장과 제조공장 산업재해 등 사람의 실수, 무사안일이 빚어낸 인재든 각종 대형 사고는 느닷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풍과 지진에 미리 대비한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대비가 허술해 피해를 키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 태풍 차바 앞에서 무기력했던 부산과 울산 등이 그렇고, 천년고도에서 일어난 경주지진이 그렇다.

 

천재지변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숱한 전조증상들을 무시하지 않고 대비한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는 있다.

 

과학기술, 토목기술 등이 급속히 발전하는데도 대형참사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치명적 안전불감증 탓이 크다. 매번 속절없이 낚이고 마는 물고기와 다를 게 뭔가. 과거의 참사를 너무 쉽사리 잊고 안전불감증에 빠져버리는 인간들. 그럼에도 거안사위(居安思危)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이 명구는 그저 백지를 물들인 먹물일 뿐인 것이 현실이다. 23년 전 오늘,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인근 해상에서 터진 서해훼리호 참사가 그렇고 2014년 4월16일 발생한 남해 진도앞바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그렇다.

시대를 1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1912년 4월14일 밤 11시,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남서쪽 640㎞ 해상에서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0만톤으로 추정되는 빙산에 우현을 가격당해 침몰했다. 1513명이 희생된 이 사고는 느닷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출항을 서두르느라 무리한 설계 변경을 했고, 승객 전원이 아닌 절반만 탈 수 있는 구명보트를 탑재했을 뿐이었다. 빙산 출현 등 위험지역을 칠흑같은 야간에 운행하면서 과속했고, 결국 경계 시스템이 무너졌다. 게다가 타이타닉 침몰 지점에서 약10마일 거리를 항해하는 배가 있었지만, 무선 통신을 꺼 놓고 있었다. 만약 이 선박이 타이타닉의 구조신호를 정상적으로 받고 구조에 나섰다면 희생자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23년 전인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 10분께, 전북 부안군 위도면 파장금항을 출항한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인근에서 일명 ‘삼각파도’를 맞고 그대로 침몰했다. 110톤의 여객선 정원은 221명이었지만 실제 배에 탄 사람은 승객 355명, 선원 7명 등 362명이었다. 15리터짜리 멸치액젓 600통과 자갈 7.3톤, 낚시꾼들의 각종 낚시도구 등 화물도 대거 실려 있었다. 승객이 정원을 1.5배 이상 넘어 만원을 이루자 자연스럽게 승객들은 아래쪽 선실부터 콩나물시루처럼 꽉 자리를 잡아 앉았고, 화물은 배의 위쪽에 많이 실렸다.

 

바람과 파도가 거셌지만 배는 ‘뒤뚱거리며’ 출항했다. 월요일 출근을 앞둔 낚시꾼들의 압력이 출항을 부채질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사후 밝혀진 사실이지만, 파장금을 떠난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부근에서 스크류에 걸린 그물 때문에 속도가 떨어졌을 때 삼각파도를 맞았다. 승객과 화물이 잔뜩, 그것도 불균형하게 실린 배는 복원력을 잃고 그대로 침몰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선실에 있던 승객 등 292명이 사망했다.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는 1970년 12월15일 남해안에서 침몰, 323명의 사망자를 낸 남영호 침몰사고 이후 최대 해상 참사였다. 남영호 침몰 후 23년 만에 닥친 서해훼리호 참사는 전형적인 인재였다. 남영호의 교훈은 온데 간데 없었다. 높은 파도가 예상된다는 기상청 에보가 있었지만 무시됐다. 휴가 간 항해사를 대신해 갑판장이 키를 잡으면서도 승객을 정원 대비 1.5배 이상 더 태웠고, 엄청난 무게의 화물까지 실었다. 당국의 구조 헬기는 30분이나 늑장 출동했고, 결국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악몽은 21년 만에 그대로 재현됐다. 피해는 훨씬 더 커졌고, 안전불감증과 도덕적 해이는 점입가경이었다.

 

지난 2014년 4월 15일 밤, 악천후를 뚫고 무리하게 인천연안여객선 터미널을 출항한 세월호가 16일 오전 8시 30분 무렵에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바다에서 침몰, 안산 단원고 2학년 수학여행단을 비롯한 476명의 승객 중 172명만 생존했다. 세월호는 아직까지 인양되지 않았고, 9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에 있다.

 

세월호 참사는 그로부터 21년 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44년 전 남영호 사고와 다를 바 없었다. 참사의 교훈은 어디에도 없었고, 선장과 승무원이 제 목숨보다 먼저 챙겨야 할 승객과 배를 버리고 탈출하는 세계 최악으로 기록될 치욕까지 남겼다.

 

세월호는 짙은 안개 때문에 다른 선박들이 출항을 포기하는 상황에서 출항을 강행했다.

 

승객 등 476명과 함께 자동차 180대, 화물 1157톤을 실었는데, 무리한 과적이었다. 선사는 승객과 화물을 더 싣기 위해 상식을 벗어난 수리를 했고, 그 때문에 급격한 변침에서 복원력을 상실한 선박은 끝내 중심을 찾지 못한 채 침몰했다.

 

세월호는 서해훼리호보다 구조 가능성이 나은 상황이었다. 20년 전에 비해 대한민국은 통신과 선박, 헬기 등 모든 면에서 우수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무기력했고, 인간은 훨씬 이기적이었다. 100년 전 캘리포니아호가 무선통신망을 끈 채 운행하는 바람에 타이타닉 피해가 컸던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상관제센터는 세월호를 추적하지 못했고, 현장에 출동한 해경은 피난방송을 하지 않았고, 구조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조류가 국내 두 번째로 빠른 사고해역 맹골수도를 통과하다 사고가 났는데, 입사 4개월째인 3등항해사가 키를 잡았다. 배가 침몰하자 선장과 선원들은 앞다퉈 도주했고, 모든 관계기관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런 사이 295명의 목숨이 스러졌고 9명은 아직 행방을 알 수 없다.   

 

서해훼리호 참사 때처럼 세월호 참사 때도 사회 전반에 만연된 안전불감증이 핫 이슈가 됐다. 거리 곳곳에서는 지금도 ‘진실을 밝혀달라’며 노란 깃발들이 울부짓고 있다. 노란색이 탈색하고, 풍파에 찢기고 있지만 국회의 세월호특별법 개정은 시원찮다.

1993년 10월10일 오전 서해훼리호가 침몰할 즈음, 기자는 일요일을 이용해 대전과학엑스포 관람 중이었다.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전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격포항에 갈 수 있었고, 이어 사고 해역으로 가는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사고해역에는 커다란 원형 구명보트가 펼쳐져 있었고, 구조대원과 주변 어민들이 곳곳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희생자들이 장례식장으로 가기 전에 임시 안치된 군산월명공원으로 갔다. 암울한 통곡의 장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찾은 유족들은 시신 수습이라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세월호보다 운이 좋았다면, 서해훼리호 희생자들은 11월 2일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되면서 사고 23일만에 희생자 주검 모두를 인양했다는 사실이다.

 

몇 년 후, 기자는 지금은 퇴직한 공무원 한 분을 만났는데 바로 1993년 서해훼리호 생존자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었다. “아랫쪽 선실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배가 기울면서 물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갑작스런 상황에 대혼란이 벌어졌고,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헤엄쳤지요. 선실 유리창을 내가 깼는지, 이미 깨져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수면으로 떠오를 수 있었어요. 다행히 수영을 할 줄 알았고, 배영으로 물위에 떠있는데 짠물을 많이 먹었어요.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힘이 빠졌는데 다행히 구조돼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했어요.”

 

반면 292명의 유족들은 통곡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당시 정부는 소액의 보상에 나섰고, 힘없고 가난한데다 가장까지 잃어 당장의 삶이 막막했던 유족들은 그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살아야 했다.

 

23년이 지난 지금, 희생자 가족들은 어디에서인가 남은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은 성장해 가장 노릇을 하고, 사회의 주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앞에서 그들은 또 다시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정부의 끝없는 무사안일에, 이 사회의 도덕적 해이에 분노하며 울어야 했을 것이다. 

/글=김재호

/카드=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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