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이런 조약에 서명한 적이 없다.”
대한제국의 억울한 역사를 토혈(吐血)한 순종의 유언이다. 1875년,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도입한 운양호를 통한 함포외교로 조선 개방을 강압하였다.
일본은 자국의 불법침략에도 불구하고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였고, 그 결과는 강화도 조약에 이어 1910년 ‘국권피탈(國權被奪)’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일본의 ‘국제법’과 제해권(制海權)의 중요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찾을수 있다. 대한제국의 국제주의적 외교 전략 봉쇄를 위해 일본이 가장 먼저 취한 것이 외교권 박탈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대한제국의 주변해역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청일전쟁 전까지 조선의 제해권은 서해의 경우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청이 행사하였고, 남해의 경우 일본과 영국, 동해의 경우 러시아와 일본이 제해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21세기 약육강식의 무대는 여전히 ‘바다’를 중심으로 재현되고 있다. 전통적 대륙국가인 중국은 대양진출을 선언했고, 일본은 19세기 제해권 탈환에 혈안이 되어 있다. 무대는 또다시 한반도 주변수역이다. 대양으로 진출하려는 대륙세력과 전통적 해양세력인 일본반도 주변수역의 패권은 지역해 패권을 좌우하고, 이는 미국과의 새로운 세력 재편 문제로 확산된다는 점에서는 국제적이다. 우리나라의 서해와 남해, 그리고 동해가 동북아에서의 지정학적 축을 형성한다는 점에서도 상황은 낯설지 않다. 국제적 정당성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국제법과 국제기구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도 유사하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가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축으로 성장했고, 국제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모든 국제적 이슈에 소위 ‘입장’을 표명할 위치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다에는 중국어선의 불법성과 폭력성, 중일의 지역해 패권 쟁탈, 이어도 주변수역에서의 권리 행사, 독도문제에 대한 주권행사 등 굵직굵직한 바다의 문제가 산재해 있다.
우리의 이익을 지키는 일이고, 후세대에 대한 의무이다.
그러나 바다를 국가 역량 확대의 축으로 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여전히 열정적이지 않다. 바다를 바라볼 뿐, 바다의 지식과 바다의 힘을 이해하지는 않는다.
바다는 우리나라 물류이동의 중추이고, 광물과 생물자원의 보고이며, 대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힘의 기반이다. 바다의 공간을 상실했을 때, 우리의 미래는 구한말 보다 더욱 어려운 지역해에 갇힌 나라로 전락할 수 있다. 대양으로 나갈 길이 막히는데, 무엇을 얻을수 있단 말인가.
주변국의 해양공간 확보를 위한 갈등과 국제적 영향력 강화 경쟁은 이미 지역해에서의 무력 분쟁을 고려하면서 접근되고 있다. 올해 7월 중재재판소의 남중국해 판결(중국 대 필리핀) 역시 해양공간에 대한 문제이면서, 지역해 패권에 대한 분쟁이었다.
필리핀이 중국을 상대로 국제재판에 제소한 것도 놀랍지만, 승소로 이끈 차분한 법적 논리와 근거, 소송 대상 해역에 대한 체계적 이해는 더더욱 경이롭다.
국제사회에서 약소국으로 평가되는 필리핀에게 소송 과정에서 위축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바다를 지배하는 질서는 시대를 관통하며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바다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아는 자를 위해 논의되고, 새로운 질서로 재창출된다는 점이다. 시대를 지배할 것인가.
그렇다면 강대국간 대립의 파고(波高)에 당당히 권리를 천명하고 돛을 올려야 한다. 시대를 진단하고, 정세를 이끌어 가는 혜안은 바다 없이는 불가하다. 바다를 이해하는 깊이가 미래를 진단하는 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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