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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꿈틀거림

▲ 신은미 한국화 아티스트

서걱서걱 내리는 비가 주변의 온기와 소음을 흡수해 유난히 적막하던 날 밤이었다. 샵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덜컹거렸다. 그 소리에 놀라 쳐다보니 지저분한 행색의 수상쩍은 아저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 묻자 우물쭈물한다. 예상치 않게 문이 잠겨 있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다 곧 뒤따라오던 비슷한 모습의 일행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마침 문을 잠가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들어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이후로 나는 해가 지면 항상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작업을 한다.

 

약자의 자리에서 낸 용기

 

본인보다 약한 상대가 보이면 힘으로 제압하고 욕구를 채우려 드는 사람들. 대중교통에서 분풀이 대상이 되어 이유없는 욕을 들어야 했던 기억,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불합리한 상황에 응하게 만들던 사람들과 일말의 가책 없이 성추행을 자행하던 남자들.

 

나는 항상 약자였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오빠를 둔 탓에 눈치 보는 것에 익숙했고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는 성인으로 성장했다. 제대로 의견을 이야기하지 못해 원치 않은 일을 해야 했고 혼자 속앓이하기 일쑤였다. 항상 폭력적인 힘에 의해 제압당해야 했던 나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나약한 존재였다.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을 향해 당당히 내 권리를 지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용기도, 도와주는 이도 없어 결국 자책만 했다.

 

순두부처럼 야리야리하게 흔들리던 초등학교 시절. 딱 한번 용기를 낸 적이 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평소 나답지 않게 친구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고 한동안 대다수의 친구들을 등지고 지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보란 듯이 당당하게 그 친구와 둘이서만 다니면서 뒤에서 욕을 하던, 앞에서 손가락질 하던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약자처럼 보였지만 그때의 난 약자가 아니었다. 왜 그 이후에 난 그때처럼 행동하지 못했을까. 약자기 때문에 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고 고개 조아리는 상황이 더 나의 가슴을 사무치게 했다.

 

지금 온 나라가 한 가지 이슈로 들끓고 있다. 그녀가 강자의 위치에서 군림하다가 아래로 끌려 내려오니 모두가 벌떼처럼 달려든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그녀는 과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까. 약자로 살아온 이들은 당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평생을 강자로 살며 부당한 이익을 챙겨온 그들은 그녀의 딸의 인터뷰처럼 자신의 잘못을 신경 쓰지 않는다.

 

당당함을 가지고 일어나야

 

내가 오빠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몇 대 때린 거 가지고.’ 이 한 마디에 다리 힘이 풀렸다. 온힘을 다해 버티는 나와는 달리 가해자는 한번 슥 쳐다보고는 태연히 자기 볼일을 본다. 그때부터였다. 당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깨닫게 해주리라고 다짐을 한 것이. 남을 변화하기에 앞서 내가 변해야만 했다. 내가 약자라는 사실보다 진정 부끄러운 것은 목소리를 내야 될 때 스스로 두려움을 집어먹고 그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끔 거들었던 상황들이다.

 

지금의 난 과거에 비해 여러모로 나아지고 있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로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더 이상은 당연히 굴복당할 수 없기에 그동안 조금씩 이겨내온 나의 값진 시간들 속에서 용기를 한 움큼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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