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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서 농사 지으며 악기 만드는 현악기장 박경호 씨 "악기 만드는 건 새로운 소리 찾아가는 과정"

▲ 이탈리아의 악기제작학교 굽비오를 졸업한지 5년만에 고향 부안에 내려와 정착한 악기장 박경호씨가 작업장에서 자신이 만든 악기를 살펴보고 있다. 안봉주 기자

인터뷰 약속이 있던 날 아침, 도착하는 시간을 알리느라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답이 왔다. “그 시간에는 고구마를 캐야 하니 오전에 도착하면 좋겠습니다.”

 

부안에서 악기를 만드는 박경호씨(47)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그는 이탈리아의 악기제작학교 굽비오에서 악기제작을 제대로 공부한 현악기장이다. 한국에서 서양악기를 만드는 사람, 그것도 고향 부안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자기만의 현악기를 만드는 그의 존재는 특별하다. 1990년대 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02년부터 지금까지 그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 서울에서 10여년을 보내면서 그는 적지 않은 악기장들이 걷는 평탄한 길 대신 외로운 자기만의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소리를 찾아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와 주목받았던 그를 새악기에는 관심 없는 한국 연주자들은 금세 외면했다. 악기가 팔리지 않았지만 악기를 수리하는 일만으로도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건. 그러나 기존 악기의 소리를 복원하는 일에 자신의 열정을 쏟고 싶지 않았다.

 

작업실 임대료도 내기 어려울 정도의 궁핍했던 시간이 찾아왔다. 악기를 만드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소리를 내는 나만의 악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201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더 외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지닌 바이올린이 두 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에서 태어났다. 지난해 여름 오스트리아 카린시안 국립음악원 교수가 작업실을 찾아왔다.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깨트린 파격의 바이올린과 현악기들을 주목한 그는 오스트리아 전시를 제안했다. 지난 5월 그의 악기들이 유럽의 연주자들을 만났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박씨의 바이올린이 생명을 얻는 시간이었다.

 

자신이 만든 악기가 특정한 공연장에서만 연주되지 않고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광장에서 연주되는 악기가 되기를 바라는 그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서양악기를 만든다는 것, 그것도 부안의 한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악기를 만드는 그의 삶은 가난했으나 풍요로웠다.

 

-농사를 많이 짓습니까.

 

“고구마 농사 400평 정도 짓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고구마를 캐야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기계로는 추진 흙을 털어내지 못하거든요. 사람 손으로 캐야하는 상황이어서 친구들이 날 잡아 도와주러 왔어요. 오후에는 고구마를 캐야 합니다.”

 

-농사일과 악기를 만드는 일을 함께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습니다. 악기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지만 필요한 만큼 노동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좋아요.”

 

-흙집의 구조가 독특하면서도 편안합니다. 직접 지으셨다고 하던데요.

 

“사실 집 짓는 것을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는데 그냥 할 수 있겠다싶더라고요. 눈으로 익히고 책으로 배우면서 했습니다. 마무리하면서 손을 좀 빌렸을 뿐 아주 천천히 제 손으로 지은 집이지요. 덕분에 대단한 시설을 하는 것도 아닌데 2년이나 걸렸습니다.(웃음)”

 

-경험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의욕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할 수 있겠다 싶으면 무조건 달려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무모하다 싶은데도 또 그렇게 나서면 일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생은 하지만요.”

 

-악기 만드는 일도 그런 열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바이올린은 기존 악기와 모양이 전혀 다르군요. 다 연주가 가능한 것들입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새로운 악기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찾는 일이죠. 악기마다 담고 있는 사연이 다르니 소리도 각각 다른 소리를 갖게 되는데, 기존 악기와 달라서 선뜻 연주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연주자에게도 새로운 시도가 되겠죠.”

 

-악기가 꽤 많은데 소장하고 있는 악기가 많은 것은 그만큼 판매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렇죠. 악기가 판매 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새 악기를 제작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악기가 팔리지 않는다고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요. 작업을 꾸려 가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팔리는 만큼만 만든다면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을까요. 마음을 비운지 오랩니다.”

 

-연주자 수적 규모로 보면 악기가 팔리지 않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연주자들이 새악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올드나 모던악기를 선호하죠. 그런데 연주자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100년 이상 된 올드 악기나 100년 미만인 모던 악기가 모두 수제작은 아니거든요. 연주자들이 갖고 있는 악기 중에서 수제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검증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85프로 정도는 공장제일겁니다. 수제작이라해도 한사람이 전 과정을 도맡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만들어서 조립하는 형식이지요. 18세기 19세기의 악기들 거개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악기들이 지금 전 세계를 ‘올드’나 ‘모던’이란 이름으로 휩쓸고 있거든요. 모두 수제로 둔갑해서요.”

 

-언뜻 생각하기에는 연주자들이 자기만의 악기로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향할 것 같은데 의외입니다.

 

“새악기의 장점이 바로 거기 있죠. 연주자가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올드나 모던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소리잖아요. 물론 장단점은 있겠죠.”

 

-연주자들에게는 새악기가 부담스러운 대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겠죠. 새악기는 길들여지지 않는 그 자체의 소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바이올린을 제대로 만들려면 나무를 10년 정도는 말려서 악기를 깎습니다. 그 과정이 또 2년 걸립니다.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좋은 연주자라면 악기장이 만들어가는 2년 동안의 과정의 의미와 가치를 잘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나무를 깎고 줄을 걸고 색을 칠하는 과정이 2년이나 걸린다니 악기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대단한 공력이 필요하군요.

 

“저는 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소리를 찾다보면 계속 새로운 소리가 나오거든요. 연주자가 원하는 소리가 있다면 그런 소리를 찾아 악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강한 소리나 부드러운 소리가 똑같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좋은 소리가 따로 있습니까.

 

“좋은 소리는 듣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개인마다 좋아하는 소리가 다른데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리인가를 규정하는 일은 옳지 않아요. 그런점에서 보면 아마티나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 세계적인 3대 바이올린 명장의 악기가 꼭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좋은 소리와 좋은 악기의 경계가 궁금해지는군요.

 

“누군가 좋아하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왜 꼭 기존 악기소리를 닮은 악기를 만들어야하는가를 고민해봤는데 만들어진 소리를 따라다니면서 악기를 복원하는 일은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소리를 가진 악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었지요.”

 

-바이올린의 새로운 모형을 개발하신 이유겠습니다.

 

“새로운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니 자연히 모형을 바꾸어보고 현도 바꾸어보면서 다양한 바이올린을 제작하게 되었죠. 개량악기가 된 셈인데, 따지고 보면 바이올린의 역사도 불과 400년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계속 발전해온 것인데, 지금까지의 바이올린은 오늘의 극장 조건에서는 수명을 다했다고봐요. 공간이 너무 크거든요. 바이올린의 역사를 돌아보면 극장 악기가 아니라 거실이나 살롱 같은 작은 공간용이었거든요. 지금 우리가 듣는 연주는 악기의 제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장치(스피커)를 거친 소리를 듣는 셈이지요.”

 

-바이올린 3대 명장 이후 새로운 소리로 독보적인 반열에 이른 악기장은 없었습니까.

 

“제작자는 많아요. 그 대부분이 기왕의 소리를 재현해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악기 모양을 바꾸어 새로운 소리를 찾으려했던 제작자들도 있지만 빛을 못 봤어요.”

 

-팔리지 않는 악기를 만든다는 것, 외롭고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동안 판매된 악기도 있지만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15년 동안 한결같은 상황이니 좌절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죠.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내가 만들면 연주자들이 찾겠지 하는. 그런데 정직하게 만들어낸다고 팔리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정직하게 하면 악기가 더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현재 유통되는 바이올린 상당수가 수제작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는데 기계로 만든 것과 수제작은 많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소리의 오묘함, 그 차이가 크죠. 소리는 만들어지는 것인데 제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밀가루 반죽을 오래하면 쫄깃쫄깃해지듯 손으로 소리를 생각하며 만들어낸 악기의 소리는 쫄깃쫄깃해지는 특성이 있어요. 그런데 공장제는 한계가 있거든요.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것이죠.”

 

-찍어내는 것의 한계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공장제를 찾는 연주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가격의 차이 때문이겠지요.

 

“보급형 바이올린은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공장제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공장제가 수제작으로 바뀌어 판매되는 유통 현실이에요. 올드니 모던이니하며 연주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악기만 해도 공장제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수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요.”

 

-이런 환경에서 고집스럽게 이어오는 박경호식 바이올린의 특성이 궁금해집니다. 바이올린은 나무도 중요하겠죠.

 

“나무가 50%를 좌우한다고 봐요. 어느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과정으로 거쳐 재목이 되었는가가 중요하죠. 나머지 50%가 목공(제작)을 하는 사람의 기술력입니다.”

 

-어떤 나무를 사용합니까.

 

“저는 알프스나 발칸반도 나무를 사용합니다. 기온의 차가 심하지 않은 지역이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순하고 온화(?)합니다. 겨울에도 영상 2-3도 정도에 머무르는 지역에서 자란 나무를 선호하죠.”

 

-소리도 그런 소리를 좋아하시는군요.

 

“강한 소리보다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젊었을 때는 힘 있고 강한소리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더라고요.(웃음)”

 

-만들어놓은 바이올린의 색상도 다 다른데 칠도 직접 하십니까.

 

“줄을 걸고 칠을 해 완성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제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안료를 사다 색깔도 제가 내는데, 그 안료들이 대개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칠 자체가 동양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색상도 다양하고 모양도 독특한 ‘박경호 바이올린’이 탄생하는 것이군요. 새로운 악기에 대한 도전 정신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개인적인 성격도 있고, 유학시절 스승의 영향이 컸습니다. 늘 정해진 길로만 가지말라며 ‘네 것을 만들라’고 하셨거든요. 한국에 돌아와 변형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도 ‘창의력을 살리라’고 했던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을 겁니다.”

 

-모형도 독특하지만 바이올린이 모두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악기마다 사연을 갖고 있으니까요. ‘한반도’ ‘아리랑’으로 이름을 단 악기는 모든 악기의 중심인 밸런스를 깬 악기예요. 밸런스 자체를 깨면 소리가 달라지는데 새로운 소리를 추구해보고 싶은 욕망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일부러 좌우 밸런스를 깨버렸는데, 나름대로의 심오한 의미가 있어요. ‘아리랑 1,2호’로 이름 붙인 바이올린은 하나는 북쪽지형을 하나는 남쪽 지형을 형상화해서 각각 고음과 저음을 갖게 된 두 녀석이 만나 연주를 했을 때 음의 조화를 융화의 소리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연주자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대상일 것 같습니다.

 

“맞아요. 우리나라 연주자들은 거부감을 보입니다. 물론 연주를 해보려고 하지도 않죠. 그런데 지난 5월 오스트리아 전시회에서 유럽 연주자들은 큰 관심을 갖더라고요. 서로 연주를 해보기도 하고.”

 

-지금까지 만든 바이올린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판매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악기는 연주자를 만나야 생명을 얻는 것일 텐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악기 제작과 관련해 찾아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악기제작 학교를 만들자는 제안도 있습니다. 때가 아니라고 답하죠. 지금은 열심히 내 악기를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악기는 힘이 있을 때 만드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힘이 떨어지면 소리도 떨어지거든요.”

 

-오히려 나이가 들면 악기 제작에 노련함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스트라디바리나 과르넬리도 전성기 5~6년 동안 만든 악기소리가 좋습니다. 노련미도 그렇고 힘이 어느 정도 붙었을 때였겠죠. 제게는 지금이 그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고단한 삶에서도 악기를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박경호 바이올린을 만들어내는 힘인 것 같은 아닌가 싶습니다.

 

“주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사실 고뇌가 큽니다. 악기를 만드는데도 경제력이 우선이니까요. 제가 시간나는대로 벌이를 위해 노동을 나가는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벌어오는 돈으로 줄을 사고 나무를 사 악기 하나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가 제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 악기장 박경호씨는 패션 디자이너 꿈꾸다 이탈리아서 만난 새 인생

악기장 박경호씨는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가 고향이다. 9대째 살아온 집터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짚공예와 목공예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는 지금도 아버지가 엮어냈던 다양한 짚공예 물건들의 맵시와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 동네에 목수아재가 살았다. 나무 냄새를 좋아했던 그는 나무로 만드는 온갖 물건들이 흥미로웠다. 그는 어린 시절을 돌이켜 자신이 악기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제로 고등학교를 갔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고 기타와 여행을 즐겼다. 대학은 당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고가 없는 서울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쥐어준 3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신설동에 있는 복장학원에서 2년 동안 양장일을 배워 패션디자인회사에 취직했지만 안겨진 것은 디자인이 아닌 백화점 영업직이었다. 4년 동안 영업일을 하다 보니 디자인에 대한 욕망이 더 커졌다. 마침 디자인실에 자리가 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바꾸었다. 4년 만에 디자인실장을 넘볼 수 있는 직책까지 올라섰다.

 

안정되었다 싶으니 개인 사업에 마음이 갔다. 어느 정도 성공궤도에 올라섰지만 아이엠에프 바람으로 부도가 났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1999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무작정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미래를 위해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이태리 패션학교 유학을 고민하고 있던 그는 페루지아를 여행하던 중 악기 제작하는 곳을 들르게 됐다. 굽비오 현악기제작학교였다.

 

마침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던 굽비오에 원서를 냈다. 영어도 이탈리어도 못했던 그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뜻밖에도 굽비오는 그를 합격시켰다.

 

한국인으로는 굽비오 1호 유학생이 되었다.

 

아내에게는 패션학교에 합격했다고 숨기고 유학을 떠났다.

 

후에 꼴찌로 합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3년 수학과정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다.

 

교수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양인 제자를 위해 그림까지 그려가며 가르쳤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언어를 공부하고 악기를 만드는 일로만 보낸 3년은 삶을 바꾸어놓았다.

 

2002년 굽비오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서울 방배동에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열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돈도 벌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부와 명성을 쫒는 대신 고행과 인내가 따르는 악기장의 길을 택했다.

 

악기 수리에 눈을 돌리지 않으니 작업실 임대료도 못내는 처지가 되었다.

 

새악기, 더구나 한국인이 만든 악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환경에서 그의 악기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소장품(?)으로 쌓여갔다.

 

2007년 고향 부안에 내려가 흙집을 짓고 지내다 다시 올라왔으나 악기제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은 더 어려워졌다.

 

2012년 어머니가 작고하시자 아예 악기들을 챙겨 고향집으로 내려와 작업실을 열었다.

 

2014년 서울숲 커뮤니티에서 그를 초대했다.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만 모든 과정을 거쳐 완성해내는 그의 악기들이 비로소 대중들과 만난 시간이었다.

 

지난 여름, 그는 오스트리아 카린시안 콘서바토리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악기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의 악기들을 유럽의 연주자들은 주목했다. 앞으로 5~6년 악기제작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가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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