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던 일
그러던 어느 여름, 계절학기로 개설된 ‘성의 철학과 성윤리’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무려 지하철로 열 정거장이 넘는 다른 학교까지 가서 말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터라 주변에서는 쓸 데 없이 멀리까지 가서 학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수업을 듣지 말라는 조언을 했지만, 나는 그 수업을 듣고야 말았다.그리고 그 수업에서 나는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고 있을 정도로 인상 깊은 말을 듣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불쾌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때 이것을 단순한 감정의 경험에서 끝내지 않고, 그 기분의 기저에 깔린 원인을 찾아 이성적인 언어로 표현해보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노력한다면 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불평만 하지 말고 상황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보자는 말이다. 합리적이지 않은 규칙이나 제도 등에 의해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나만 그런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인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일하면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나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등을 자주 보는데, 그런 노력들 덕에 이런 법률도 제정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일할 때에도 막연한 답답함을 적극적으로 말로 풀어보면서 그 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관련 법령을 찾다 보면, 승소의 기쁨을 누리는 때가 많다.
모두가 수강하지 말라고 말렸던 저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을 배움이다. 이 정도면 살면서 다소 쓸 데 없는 짓을 일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삶의 많은 부분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삶의 많은 부분 지탱해주는 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6년이 가면, 나는 이십대를 지나 서른 살이 된다. 그동안 계속 밖으로 에너지를 쏟아내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이십대 초반에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밑거름을 만들어둔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른 살을 앞두고 다시 삼십대를 견뎌낼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일구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은 무엇인가 편치 않다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 왔다면, 이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가 아닐까. 새롭게 삼십 대를 맞이한 시점에서의 ‘쓸 데 없어 보이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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