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한 시인의 문학과 삶을 조명하는 연구로만 바쳐온 시인. 그 덕분에 한국문학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목가적 서정시인으로만 알려져 온 신석정 시인은 문학사의 새로운 노정, 그 주인공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존경해온 시인을 스승으로 만난 것이 20대 초반, 시인을 꿈꾸던 젊은 문학도는 스승과 사제의 인연을 생애의 축복으로 알고 스승의 시정신과 청빈했던 삶의 태도를 온전히 자신의 귀감으로 삼았다.
서정시와 저항시의 두 세계를 치열한 시정신으로 지향했던 스승의 문학을 그대로 안아 자신 또한 시대를 투영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제자. 원로시인 허소라 교수(80)의 이야기다.
시인으로 문학연구자로 문학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살아온 그의 삶은 온전히 석정 시인의 문학만을 지평으로 삼았다. 군산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후에도 시쓰기와 석정 문학연구로만 시간을 보내온 그를 만났다.
-지난 연말, 유난히 활동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석정문학상 수상도 축하드립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리 되었어요. 석정문학상도 그렇고 전주문학상도 그렇고 상을 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예요. 더구나 이 나이에 상을 받는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요.”
-근래 활동이 뜸하셨는데 연말에 이어진 수상소식에 인문학콘서트 초대까지 반가워하실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내 나이 여든을 맞고 보니 아무래도 외부 활동보다는 안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어요. 책도 읽고 밀린 자료 정리도 하고, 더러 시도 쓰면서 지냈지요.”
-늘 문학소년 같은 이미지의 교수님이 벌써 여든이 되셨다니 믿겨지지 않습니다.(웃음) 건강은 괜찮으시지요.
“특별히 앓고 있는 병은 없지만 공연히 온몸이 줄어들고 있는 듯 한 느낌을 갖습니다. 나이병이지요. 건강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국정농단 사태로 온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매주 토요일, 광장의 촛불 집회를 보면서 석정 시인의 시집 〈촛불〉의 시어들이 떠올랐습니다. 현실의 암담함을 치열한 자각으로 인식해 시로 구현해냈던 석정 시인은 오늘의 상황을 어떤 시어로 담아냈을까 궁금했습니다.
“너무 유연하다고 나무라셨을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 그 엄혹한 시대에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정치적 저항시를 발표했던 분이니까요.”
-석정 문학 연구에 오랜 시간을 쏟아오셨습니다. 석정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교수님의 연구로 물꼬가 트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 연구를 시작하셨습니까.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석정 문학연구에만 온전히 매달려왔으니 40년도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석사 박사 논문도 모두 석정 선생님의 문학세계가 주제였어요.”
-한 문학인의 삶과 문학세계에 그 오랜 시간을 천착하는 일이 놀랍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석정 문학에 대한 왜곡된 시각, 편향된 평가를 바로 잡고 싶어서였습니다. 석정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야 마땅한데도 지방에서 활동했던 ‘향토시인’ 정도로 평가되는 일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것을 문단적 야맹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런 현상을 꼭 바로 잡고 싶었습니다.”
-석정 시인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로 뿐 아니라 부모와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만큼 제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제게는 늘 미치지 못하는 거목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떻게 스승과 제자가 되었습니까.
“전북대 국문과 2학년 때 선생님이 한 학기 강의를 하셨어요. 가람 이병기 선생님이 석정을 굉장히 아끼셨거든요. 그때 시론 강의를 맡겼는데 그 강의를 듣게 된 거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촛불〉이나 〈슬픈목가〉등을 구해 읽으면서 존경하게 되었던 석정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이듬해에는 교내 대학생 작품 응모에서 제 시가 장원에 뽑혔는데 그때 심사를 석정선생님이 맡으셨어요. 이후부터 선생님이 찾으시면 댁에도 드나드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셨군요.
“많이 챙겨주셨지요. 그때는 전화가 없을 때여서 손자를 시켜 메모를 전하셨어요. 시 한편 갖고 빨리 오라는 내용이 많았는데 가보면 서울에서 신문사 기자가 와있었어요. 선생님 원고를 청탁하러 온 기자에게 제 시도 꼭 챙겨주셨어요.”
-등단도 석정 선생님 추천으로 하셨죠.
“석정 선생님이 당시 〈자유문학〉 심사위원이셨는데 3회 추천을 받아야만 등단의 절차를 끝낼 수 있었어요. 1년여 만에 3회 추천 모두를 석정선생님이 해주셨죠.”
-인연이 아주 깊었군요. 석정 문학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겠습니다.
“그렇죠. 지방에서 활동하신다는 이유만으로 변방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온당하지 않는 일이거든요. 더구나 선생님의 다양한 문학세계가 편향되게 평가 받는 일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석정의 시세계는 오랫동안 목가적 전원시, 혹은 서정시로만 분류되어 왔습니다. 그러니 현실참여의 저항시를 써온 시인으로 재조명 받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예요.
“물론 선생님은 목가적 서정시도 많이 쓰셨지만 아주 강한 어조로 써낸 현실 참여시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시의 자연서정과 현실참여라는 이원적 경험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오셨죠. 그런 점에서 석정은 한국시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시인으로 평가 받아야 마땅합니다.”
-교수님도 많은 영향을 받았겠습니다.
“선생님의 시정신을 이어받고 싶었지만 그 세계에 늘 미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선생님은 민족의식이 투철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직시하는 감각이 워낙 탁월하셨어요. 한국군이 월남전에 파병될 때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는데 어느 날인가 신문을 읽으시면서 ‘달러하고 목숨을 바꾸는 짓’이라며 분노하셨어요. 월남전에서 희생당한 한국군이 4300명. 선생님은 다가올 상황을 그렇게 짚어내셨던 것이죠.”
-기억에 남는 일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화가 많지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5.16이 났을 때 교사들이 자율권 보장하라고 국회 앞에 가서 데모를 했는데 그 사태와 관련해 석정 선생님이 경찰서에 끌려가셨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쫓아갔더니 의자에 혼자 앉자계시더군요. 취조관이 자리를 비웠었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그 취조관이 ‘선생님이 쓴 시한편이 인민군 1개 사단과 맞먹는 위력이 있는 것을 아느냐’고 하더래요. 그 사람이 시의 힘을 알았던 것이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시였습니까.
“당시 교사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모를 했어요. 선생님은 전주고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그때 〈단식의 노래〉란 시를 쓰셨거든요. 이 시가 데모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그 사건으로 여러 선생님들이 다른 학교로 전출되고 붙들려가서 취조를 받는 고통을 겪었어요. 이후에도 남산기관에 끌려가시기도 했고, 여러 번 어려움을 겪으셨지요.”
-화제를 좀 바꿔보겠습니다. 석정 선생님과 가까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특별한 계기는 아닌데,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던 시가 있었어요. 속으로는 따뜻하지만 겉으로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하시지 않는 분인데, 제가 발표한 〈목종〉이라는 시를 과분하게 칭찬하셨어요. 1964년에 경기도 운천리 미군부대에서 캔 하나를 훔치러 들어간 소년이 사살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간지에 이 엄청난 사건이 고작 네줄 다섯줄짜리 기사로 나왔더라고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때 전북일보에 〈목종〉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했지요. 나무종은 아무리 때려도 소리가 나지 않잖아요. 그것을 읽으시고 선생님께서 ‘소라 시가 참 좋더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분의 평가보다도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교수님이 펴낸 〈흐느끼는 목마〉는 당시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되었던 산문집인데요.
“그랬었죠. 30쇄가 넘게 인쇄를 했으니까요. 당시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어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감정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책이거든요. 그러니 사춘기 여고생들이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겠죠.(웃음)”
-그 책을 내게 된 뒷이야기가 더 흥미롭던데요.
“제가 대학신문에 시를 발표했던 적이 있어요. 그 신문이 전국의 고등학교 도서관에 보내졌던 모양이에요. 제 필명이 허소라잖아요. 그 시를 읽은 포항의 여고생이 제게 편지를 보낸 거예요. 제목이 〈미지의 언니에게〉였어요. 저를 여자로 알았던 겁니다. 친구들이 그냥 여자인척 답장을 해주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차례 주고받았는데 사람이 언젠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는 법이라고 그런 상황이 온 겁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글로 용서를 빌었지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제가 시작된 겁니다.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지만(웃음) 그 과정에서 주고받은 편지가 〈흐느끼는 목마〉로 엮인 거죠.”
-부안에 석정문학관이 문을 연 것이 2012년이었던가요. 문학관이 문을 열기까지는 교수님의 열정이 바탕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문학세계를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정리하는 일도 그렇지만 대표작이나 유작 등 관련 자료를 모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40년 전의 일인데 웬만한 발표작은 거의 다 찾아냈고, 미발표작도 거의 발굴했습니다. 그 자료들이 큰 힘이 되었지요.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제 생애에 가장 큰 보람과 의미를 얻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많은 작품은 어떻게 수집하셨습니까.
“일일이 찾아다녀야만 가능한 일이었어요. 60년대부터 찾아다녔는데 아무래도 신문에 발표된 시가 많아서 서울의 신문사 자료실을 찾아다녔습니다. 처음 찾아낸 것이 선생님 첫 작품인 조선일보에 실렸던 〈기우는 해〉였는데 그게 언제 실렸는지가 정확하지 않았어요. 당시 조선일보에 석정선생님 자형뻘 되는 분이 문예부장으로 계셨는데, 그래서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실렸던가 봐요. 신문사 담당자에게 부탁을 해서 필름을 돌리다보니까 그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그 순간, 신경이 곤두서더라고요. 날짜를 보니 1924년 4월 19일자였어요. 그것을 가져오면서도 얼마나 소중한지 가방에 넣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서 등에 끼워서 가져왔지요.(웃음) 그때 선생님 필명이 ‘소적’으로 되어 있었어요.”
-이후에도 수많은 작품을 원본으로 확인하고 수집하셨겠습니다.
“조선일보에 실린 작품만 스크랩북으로 네 권 분량이고 전북일보에 실렸던 작품도 두 권이나 됩니다. 이 작품들이 모두 제 연구의 바탕이 되었고 문학관 자료가 되었지요.”
-2009년엔가 석정의 미발표작이 교수님의 노력으로 발굴되어 빛을 보게 되었었는데요.
“현실참여 성향이 강했으나 발표되지 않았던 시 11편을 그때 공개했었지요. 혁신이란 단어만 입에 올려도 공산당으로 몰렸던 1960년대 엄혹한 상황에서도 저항성이 짙은 시를 기고할 정도로 선생님은 저항시를 많이 썼습니다. 미발표작 시들은 그럼에도 발표하지 못했던 시들인데 선생님의 육필원고에서 찾아낸 것들이었어요. 덕분에 기존의 평가로부터 석정의 시세계가 재평가되어야 하는 이유가 더 분명해졌습니다.”
-당시 그렇게 왕성한 발표활동을 하셨던 것을 보면 석정 선생님의 문학이 그만큼 평가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선생님은 정지용 김기림 박목월 박두진 선생님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인들과 교류가 깊었어요. 김기림 시인은 특히 석정 선생님의 시세계를 높이 평가 했는데 한해를 돌아보는 연평에 선생님을 늘 거론할 정도였죠.”
-40년이 훨씬 넘는 동안 석정 선생님의 시세계만을 천착해 연구해오신 교수님의 작업으로 자칫 문학사의 한편에 겨우 이름을 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석정의 문학이 재조명을 받아 온전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폭넓은 연구 작업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습니까.
“오히려 제 연구가 아직도 미진하다는 것에 한계를 느낍니다. 석정은 한국시사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문학사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후배들이 풀어야할 과제입니다.”
허 교수와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석정의 문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만큼 그의 모든 문학 연구 작업의 시간과 정신은 석정의 문학위에 놓여 있었다. 넓지 않은 그의 서재를 채우고 있는 여러 권의 스크랩북과 빛바랜 자료들까지도 석정의 문학에 닿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놀라웠다. 한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위해 달려온 수십 년 세월의 고투가 그의 삶으로부터 더 빛나 보였다.
● [허소라 교수는] 석·박사과정 모두 석정문학 주제 논문으로 마쳐
허소라 교수는 진안이 고향이다. 본명은 형석이지만 필명인 소라가 더 널리 알려졌다. 군청에서 근무하셨던 아버님을 따라 초등학교 시절, 전주로 나왔지만 중고등학교는 금산에서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가 석정시인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59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자유문학〉에 시 ‘지열(地熱)’ ‘피를 말리는……’, ‘도정(道程)’ 등 세편의 시를 추천받으면서 등단했다. 당시 시 추천을 해준 사람도 석정시인이었다.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군산 수산고등전문학교와 수산전문대학을 거쳐 군산대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
석정 시인의 시세계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경해왔던 그는 스승의 문학이 한국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 석정 문학 연구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석정 연구를 시작한 20대 이후부터 그의 작업은 오로지 석정의 문학과 생애 위에 놓여있었다. 고려대 석사과정과 경희대 박사과정을 모두 석정문학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마쳤다.
2012년 개관한 부안의 석정문학관 조성작업에 참여했으며 많은 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기획되고 완성됐다. 신석정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 제전위원장과 석정문학관 초대관장을 역임했으며 중국연변대 객좌교수를 지냈다.
1964년 첫 시집 〈木鐘목종〉을 낸 이후 〈풍장〉 〈아침 시작〉 〈겨울밤 전라도〉을 비롯한 시집과 6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로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산문집 〈흐느끼는 목마〉, 평론집 〈못다 부른 목가〉 등 15권의 저서를 냈다.
전라북도 문화상·전북대상·백양촌문학상·모악문학상·윤동주문학상과 석정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다양한 관점으로 석정의 문학세계를 조명한 논문 50여 편을 발표했다.
석정의 수많은 시를 발굴하고 수집했으며 지난 2009년에는 미발표 저항시 11편을 공개해 석정 문학을 새롭게 연구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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